역사 - 그 뒤안길

다산 정약용의 유배시절

뚜르(Tours) 2007. 8. 17. 10:55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

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

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의 나이 40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용기를 지녔던 다산,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행정경험을 쌓았던 다산, 장차 명재상이

될 것이 예상되었던 다산, 조선을 새롭게 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다산. 그러나 다산은 먼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다시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橘洞 :

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

에는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경세유표는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제안서이다. 목민심서는 현행법 내에서도 공직을 바로

잡아 백성을 살려내려는 취지였다. 다산의 정확한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민(民)을 구제하기 위한 방략이었다.

 

 

연령 연대 경력 국내 외 정세 주요저작
40 1801
(순조1)
▶2월에 책롱(冊籠)사건으로 이가환, 이승훈, 홍락민 등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되어 하옥됨.
▶셋째형 약종(若鐘, 세례명 아오스딩) 사형됨.
▶둘째형 손암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고, 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됨(3월에 도착).
▶10월에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으로 다시 투옥됨.
▶11월에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이배됨(형과 나주 밤남정에서 길이 나뉨).
▶마재 본가가 가택수색을 당하고 초고들이 산실됨.
▶서교를 범하는 법령 선포
▶신유사옥으로 권철신, 이승훈 등이 처형됨
〈爾雅述〉
〈己亥邦禮辨〉 〈百諺詩〉
(1820년〈이담속찬〉이란 이름으로 수정 보완하여 완성)
41 1802
(순조2)
▶큰아들 학연이 와서 근친함.
▶넷째아들 농장 사망.
   
42 1803
(순조3)
▶김대비의 해배명령이 있었으나 서용보가 반대   ‘檀弓箴誤'
‘弔奠考'
‘애절양'
‘사의재기'
<禮箋喪儀匡>
43 1804
(순조4)
    ‘兒學編訓義'
44 1805
(순조5)
▶봄에 아암 혜장선사와 만나 교유
▶겨울에 큰아들 학연이 찾아왔으며 고성사에서 주역과 예기를 가르침.
  ‘正體傳重辨(己亥邦禮辨)'
45 1806
(순조6)
▶목리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이주    
46 1807
(순조7)
▶장손 大林이 태어남
▶학문의 후계자로 여기던 약전의 아들 학초의 부음을 받음.
  ‘禮箋喪具訂' <상례사전>50권 완성
47 1808
(순조8)
▶봄에 윤단(尹博)의 산정(다산초당)으로 옮김.
▶둘째아들 학유가 옴.
  ‘祭禮考定'
<周易心箋>
<周易緖言>
48 1809
(순조9)
    <禮箋喪服商>
49 1810
(순조10)
▶ 학연의 청으로 해배명령이 났으나 공서파(홍명주 이기경)가 반대로 석방되지 못함. <詩經講義補>
<尙書古訓>
<梅氏書評>
<嘉禮酌儀>
<小學珠串>
50 1811
(순조11)

▶홍경래의 난 <我邦疆域考> <禮箋喪期別>
51 1812
(순조12)
▶딸이 윤창모(翁山 윤서유의 아들)에게 시집감.   <民堡議>
<春秋考徵<
52 1813
(순조13)
▶서모 김씨(슬하에 1남 3녀) 사망.   <論語古今註>
53 1814
(순조14)
▶조인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의금부에서 관문을 발송하여 석방시키려 했는데, 강준흠의 상소로 석방명령서가 발송되지 못함.
▶문산 이재의와 편지로 학문과 사변의 공을 논함.
  <孟子要義>
<大學公議> <中庸自箴/中庸講義補> <大東水經>
54 1815
(순조15)

  <心經密驗/小學枝言>
55 1816
(순조16)
▶6월에 형 약전이 유형지(흑산도)에서 작고.
▶학유의 처 심씨 사망.
  <樂書孤存>
56 1817
(순조17)
▶<방례초본>의 저술을 시작했는데 끝내지는 못함(뒤에 ‘경세유표'로 개명)   <經世遺表(邦禮草本)> (미완성)
57 1818
(순조18)
▶봄에 <목민심서>가 이루어짐.
▶8월에 이태순의 상소로 유배에서 석방됨.
▶9월에 강진을 떠나 고향 마재 본가에 돌아옴(9월 14일)
  <牧民心書>
<國朝典禮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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