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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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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橘洞 : 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에는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잡아 백성을 살려내려는 취지였다. 다산의 정확한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민(民)을 구제하기 위한 방략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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