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그 뒤안길

다산 정약용의 만년시절

뚜르(Tours) 2007. 8. 17. 10:48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를 저술하여 경세론의 삼부작(1표2서)을 완성

하였다. 또한『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

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

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얘기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 實事求是'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한다. 한쪽은 이익과 유형원의 학풍(經世致用)을 이어받고, 다른 한쪽은 박제가 ·

유득공 등 북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북학(利用厚生)을 섭취한 다산은 이들의 학문적 성과

위에서 '다산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를 만들어 낸다.

 

 

 

연령 연대 경력 국내 외 정세 주요저작
58 1819
(순조19)
▶선산(충주 하담)에 성묘.
▶여름에 <흠흠신서>가 이루어짐.
▶가을에 용문산 유람.
  <欽欽新書>
<雅言覺非>
59 1820
(순조20)
▶봄에 배를 타고 북한강을 거슬러 춘천 청평산 등을 유람.    
60 1821
(순조21)
▶9월 맏형 약현 작고.   <事大考例刪補>
61 1822
(순조22)
▶회갑년을 맞이하여 ‘자찬묘지명'을 지음.
▶석천 신작(石泉 申綽)과 편지로〈周禮〉에 대해 논함.
  ‘자찬묘지명'
62 1823
(순조23)
▶승지후보로 낙점되었으나 곧 취소됨   ‘산행일기'
69 1830
(순조30)
▶탕제의 일로 부호군(副護軍)으로 단부되었으나 약을 올리기 전에 익종(翼宗: 순조의 세자) 승하    
73 1834
(순조34)
▶11월 순조 환후가 급해 소명을 받고 상경 중 승하소식을 듣고 귀향.   <상서고훈>과 <지원록>을 개수하여 합편
<매씨서평>개정
75 1836
(헌종2)
▶회혼일인 4월 7일(음 2월 22일)에 본가에서 병으로 서거.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에 안장.
   
  1882     ▶여유당전서가 全寫되어 內閣에 收藏됨
  1910 ▶7월 18일 정이품(正二品)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문도공(文度公)이라 함  
  1911
   
  1934 ∼38 1936년 다산서거 100주년   ▶정인보
▶안재홍 등의 노력으로 여유당전서 76책이 간행됨
  1960     ▶정다산전서 4권 발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