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그 뒤안길

다산 정약용의 관직시절

뚜르(Tours) 2007. 8. 17. 11:19
 

오늘날의 다산이 있기까지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정조이다. 개혁 군주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을 보호해 준 방패막이이자 동시에 경전에

관해 서로 토론하고 잘못된 점을 비판하였던 학문적 스승이자

친구였다. 또 스러져가는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던 정치적 동지였다.

다산이 22세(癸卯年, 1783) 되던해 봄,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다산은 10년 연상인 정조를 처음만난다. 정조가 <중용>에서 의심스러운 80조(70조-이광용)를 기술하고이에 대한 답을 적어 올 것을 숙제로 내주자 서학을 포함

하여 폭넓은 독서를 한 사람으로, 사적으로는 큰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자신과는 사돈 사이인 이벽과 상의하여 <중용강의>를 지어 바쳤다. 여기에서 다산은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은 理가 發해서 나온것(四端理發)이라는 퇴계를 비롯한 기존의 일반설을 뒤집고 氣가發한 것(四端氣發)이라는 율곡의 說을 주장하였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을 위한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배다리를 만들어낸 다산은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중 정조로부터 화성

(수원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게 된다.

다산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인 화성(수원성)은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였다.

 

23세(甲辰年, 1784) 4월, 큰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斗尾峽)의 배 위에서

다산과 사돈관계에 있던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85)으로부터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책을 보게 된다.

다산은 이벽과의 만남 이후 한동안 천주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다산은 젊은 한때 사 · 오년 동안은 마음으로 열중하였지만 1791년의 진산사건(신해사옥)

이후에는 사설(邪說)로 여기고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 정약종이 신유년의 옥사에서

1786년에야 비로소 천주교를 배웠다고 자백하였으니 다산도 아마 이 무렵부터 믿지 않았을까

한다.

끈질기게 붙어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다산은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오늘날의 다산이 있게 된 것이다. 정조사후 중앙의 세도정치

라는 혼탁한 정국 속에서 벼슬살이를 계속 하였다면, 그저 그런 평범한 선비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유사옥으로 인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하며 남긴 방대한

<여유당전서>는 그를 주자와 견주는, 오히려 그를 뛰어 넘는 위대한 학자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다산학)는 '한국학의 보고'가 되었다.

 

 

 

 

 

 

 

연령 연대 경력 국내 외 정세 주요저작
22 1783
(정조7)
▶2월에 세자책봉 경축으로 열린 증광감시에서 둘째형 약전과 함께 경의 초시(初試)에 합격
▶4월에 회시에서 합격하여 진사가 됨(정조와 처음으로 상면). 성균관에 들어감.
▶회현방으로 이사하여 재산루에 삶.
▶9월에 장남 학연(學淵) 태어남.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음 ‘유수종사기’
23 1784
(정조8)
▶여름에 정조에게 〈중용강의(中庸講義)〉80여 항목을 바침(율곡의 기발설을 위주로 했는데 정조가 감탄).
▶이벽(형 약현의 처남)을 따라 배를 타고 두미협을 내려가면서 천주설에 대해 듣고 책 한권을 얻어 봄.
▶6월 반제에 뽑힘.
▶이승훈이 西敎관련 책을 가지고 귀국 <중용강의>
‘독손무자' ‘제정석치화룡소장자' 등
24 1785
(정조9)
▶10월 정시(庭試)초시에 수석으로 합격   ‘우인이덕조
만사’
‘추일서희’
25 1786
(정조10)
▶2월에 별시(別試) 초시에 합격
▶7월에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태어남
  ‘감흥이수’
26 1787
(정조11)
    ‘추일문암산
장잡시’
27 1788
(정조12)
  ▶남인이 攻西派와 信西派 로 분리 ‘원진사칠수증내’
28 1789
(정조13)
▶1월 반시에서 표를 지어 수석을 차지하고 곧바로 전시에 나아가 수석으로 급제함.
▶3월 전시에 나아가 탐화랑의 예로써 7품관에 부쳐져 희릉직장에 제수됨.
▶堂下文官중 문학이 뛰어난 자를 뽑아 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됨. 초계문신에 임명되어 <대학>을 강의함(이것이 ‘희정당대학강의').
▶5월에 부사정(副司正)이 되고, 6월에 가주서(假注書)가 됨.
▶겨울에 배다리(舟橋)의 제작규제를 만들어 공을 세움.
▶12월에 셋째아들 구장(懼?)이 태어남.
▶장헌세자(사도세자)묘를 수원으로 이장
▶프랑스 대혁명
‘희정당 대학강의'
‘문제책'
‘차장호원'
‘송진택신공광하유백두산서
29 1790
(정조14)
▶2월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됨.
▶3월 翰林被選과정 문제로 해미현(海美縣: 충남 서산군)으로 정배. 배소에 이른지 6일 만에 용서받아 풀려 남.
▶9월에 사간원 정언(正言)과 이어서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받음.
  ‘해미남상국사당기'
‘단양산수기'
30 1791
(정조15)
▶3남 사망
▶5월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됨.
▶10월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됨.
▶겨울에 시경강의(詩經講義) 800여조를 정조에게 바쳐 칭찬을 받음.
▶사학도(邪學徒)라 하여 반대파들로부터 규탄받음.
▶진산사건(신해사옥) <시경강의>
‘재유촉석루기' ‘유세검정기'
‘북영벌사기'
‘억여행'
31 1792
(정조16)
▶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됨.
▶4월 9일에 진주목사로 있던 아버지가 임소에서 별세. 5월 광주에서 여막을 짓고 거처함.
▶겨울에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기중기와 녹로를 고안하여 수원성 축조에 이용함(경비 4만 냥을 절약)
‘성설'
‘기중도설'
32 1793
(정조17)

▶남인의 영수 채제공, 영의정이 됨  
33 1794
(정조18)
▶6월에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침.
▶7월 성균관 직강(直講)에 제수됨.
▶8월 비변사랑(備邊司郞)에 임명하는 계가 내려짐.
▶10월 홍문관 수찬에 제수됨.
▶10월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현감 김양직과 삭령군수 강명길을 벌함.
▶12월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됨.
  ‘7월7일야'
‘명봉편'
‘영수석절구'
‘박학'
‘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
34 1795
(정조19)
▶정월에 사간원 사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됨.
▶2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됨.
▶3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됨.
▶7월에 주문모 입국사건으로 충청도 금정(金井-洪州) 찰방(察訪)으로 좌천.
▶성호유고 교정
▶12월에 용양위(龍槐衛) 부사로 옮김.
▶4월에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잠입 하여 서교 전파하다 7월에 발각 ‘봉곡사술지시서' ‘서암강학기'
‘조룡대기'
‘유오서산기'
‘도산사숙록'
‘기민시'
‘탄빈'
‘취가행'
35 1796
(정조20)
▶12월에 병조참의,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됨.
▶수원성 준공(둘레길이 5,743m, 4,600보)
  ‘양강우어자' ‘신승지광하만사
36 1797
(정조21)
▶6월에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사직상소(辨謗辭同副承旨疏-일명 自明疏)를 올림
▶6월에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에 제수됨.
  <마과회통> ‘변방사동부승지소'
37 1798
(정조22)
    <사기찬주>
38 1799
(정조23)
▶2월에 황주영위사(黃州迎慰使)가 됨.
▶5월에 형조참의에 제수되어 많은 옥사를 처리함.
▶12월에 넷째아들 농장(農?)이 태어남.
▶채제공이 죽음 ‘확연폭포가'
‘입갈현동'
‘영남인물고서'
39 1800
(정조24)
▶봄에 고향에 돌아와 저작에 주력하면서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함. ▶6월 28일 정조 승하하자 11살의 순조를 대신하여 노론벽파인 김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 ‘여유당기'
‘강변도중작'
‘만출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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