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루가 19.2-4).
예수님 당시에 세관장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매국노였습니다.
자신의 민족의 재산을 거둬서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 군인에게 바쳤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죄인 취급했고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세관장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는 자체가 바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키가 작은 그가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더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그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수치스러움을 뛰어 넘는 무엇인가
가치로운 것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옭아매었던 수치심을
용기 있게 드러낸 행위입니다.
한 존재를 파괴하는 수치심은
비밀스럽게 어두운 곳에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치유 받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존 브래드쇼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비탄으로부터 나와서
고통을 끌어안아야 한다.
진실로 느끼고 있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만큼 그대로 느껴야 합니다.
만약 그 이상으로 아니면 그 이하로 느낀다면
무언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손이 델 정도의 물그릇을 들었는데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피부는 심하게 손상을 입게 됩니다.
나병 환자들이 피부에 손상을 입는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감정이 심하게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을 많이 접했고
그것을 치유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뎌진 감정이나 지나치게 예민한 감정은
우리 자신과 관계를 파괴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치유되지 않는다면 평생을 쫓아다니면서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고통들을
자캐오가 무화과나무에 올려놓듯이 드러내야 합니다.
그 고통을 끌어안는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래 주저하고 머물렀다면,
이제는 그 고통을 친구 혹은 상담자가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으로 올려놓아야 합니다.
정 힘이 들면 예수님께 직접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곧바로 단순히 괴로움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고통이 자기-학대로서가 아니라
변화를 위한 자극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치유는 내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들이 갖는 수치심은 수치심이 갖는
그 자체로서의 감정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우리가 어렸을 때 아니면
교육으로부터 학습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학습에 의해서 생긴 심각한 열등감은
그들의 가치에 대해 있는 그대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
해로운 환경에서 배운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공정한 해석에의해서 생긴 파괴적인
자기-정의를 그만두고 자신들을 새롭게 평가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수치심으로 심하게 상처 입은 상태는
많은 문이 있지만 문의 손잡이들은 모두 밖에만 있는
방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정신 치료사들은 말합니다.
이렇게 손잡이들이 밖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옵니다.
우리는 말을 할 수도 없고 경고도 방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수치심을 인정하고 그 근원을 추적하는
힘겨운 투쟁을 하는 목적은
문의 손잡이들을 문 안쪽의
올바른 위치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캐오가 스스로의 문을 열고
무화과나무에 올라갔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가 우리의 세계에
들어오게 할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누구와, 언제 그리고 어떻게 가까워질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으므로 친교는 안전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단순한 피해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나누고 열 수 있으며 심지어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건강한 부끄러움은 자신을 상대방에게 얼마나 열지
그리고 얼마나 닫아야 하는 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수치심은
자기인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감정은 시선의 중심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이 감정은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달콤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계와 약점에 대한 인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건강한 죄책감과 같이 수치심으로부터 오는
고통스러운 자극은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이 고통스런 자극은 우리를 거짓으로 치장한 의상들
그리고 우리가 심지어 자신에게까지 위장하기 위해 사용해온
역할들과 장치들을 꿰뚫어 보게 합니다.
치유된 수치심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수치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수치심은 존재의 가장 핵심에 자리하기 때문에
수치심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수치심은 참된 존재를 감추기도 하고
또한 드러내어 주기도 합니다.
수치심의 치유를 통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그리고 참된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속지 않으며 자발적이며 내적인 응답으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마치 자캐오가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을 네 곱절로 갚아 주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가리고 마취시켜온
그 밖의 이름 붙여지지 않은 중독들로부터 해방됩니다.
부족한 자신을 좀 더 편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들이 그저 적이지만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소속되기를 갈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루가 19,9).
영적성장을 위한 감성수련 문종원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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