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기다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
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세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생각해 보아라.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루가 12,35-40)
아브라함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신앙, 특히 알지 못하는 곳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름에 흔쾌하게 따라 나서는 관상적 신앙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 길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그순간 우리는 그릇된
길을 가고 있는 셈이 된다.
이 대목에서 주님은 두 가지 비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둘은 모두 불확실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번째 비유에서 종들은 주인이 언제 혼인잔치에서 돌아올지 모르고 있다.
두 번째 비유에서 집주인이 언제 도둑이 들지 알면 깨어 있으면서 집을
지킬 것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비유는 영적 여정은 일정을 짤 수 있는 것도,
컴퓨터로 관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깨어 지키고 기다리면서도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의 불확실성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이 비유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고,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고,
여정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이며, 가능하다면 우리가 변모하여 합일을 이루는
정확한 날짜가 언제인지를 알고자 하는 우리의 고질적인 욕구를 엄하게
책망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실 때
그분의 반짝이는 눈빛을 우리가 간파해 낼 수 있을지 알아보기로 하자.
그분은 말씀하신다.
"허리에 띠를 단단히 매고 등불을 밝게 켜놓아라.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처신하라."
이 가르침은 우리가 기도중에 하느님을 기다릴 때 맛보게 되는 그 느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혼인잔치에 갔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출현이 지체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시며, 당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을
탓하거나 제멋대로 불만을 토로하 지 말도록 당부하신다.
기다림은 그분이 마침내 도착하실 때 우리가 지체없이 문을 열어드리고
그분의 현존을 누릴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다가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분명히 말하 거니와 그 주인은 앞치마를 두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리라."
이 말씀은 달리 표현하면 이런 뜻이 된다. "벗들아, 만일 내가 잔치에서
늦게 돌아온다고 불평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희를
받들어 주리라. 나는 한 밤중에 올 수도 있고 동트기 직전에 올 수도 있다.
만일 너희가 그때까지 깨어 있으면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나를 볼 수 있으리라."
주님은 우리가 티베리아 호수에서 만난 제자들처럼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것도 낚아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의 온갖 노력이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기다리다 보면 이윽고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내밀한 존재 속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어 모든 감각을 충만하게 채워줄
것이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마음의 변화를 안겨 주신다.
이번에도 우리는 해학적인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희도 알다시피 도둑이 언제 올지 주인이 안다면
그는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놓아두지 않으리라."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불시에 들이닥치는 침입자로 표상하신다.
이 비유는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불시에 우리 삶 속에 들이닥쳐 갑자기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온갖 순간들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분은 때로 우리가 한없이 가라앉고 있는 시각에 찾아오시곤 한다.
불안과 분노, 쓰라림, 음탕한 생각, 버림당한 느낌이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랑에 찬 현존이 느껴지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싶어진다.
"그래, 대체 무엇이 문제냐? 무엇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느냐?
날이 꽤나 어두워져서 네가 날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라.
사람의 아들은 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오시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때가 바로 가장 어두운 한밤중이다.
주님은 우리가 애원한다고 해서 돌아오시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이 보아서 우리가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되는 그때 오신다.
그리고 부활의 기쁨은 기다림의 고통에 비례한다.
영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저 "예." 하고 말씀드리기만 하면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거룩한 합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가 "예." 라고 대답 할 수 없다면 그저 기다리며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적어도 "아니오."라고는 말하지 않은 셈이니까.
토머스 키팅 신부와 함께 걷는 「깨달음의 길」에서
토머스 키팅 지음 / 성찬성 옮김 / 바오로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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