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유배후 시대 예언자2 - 말라기, 요엘, 요나 예언자
송재준(마르코)|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기원전 538년 페르샤 임금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바빌론 유배로부터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깨와 즈가리야 예언자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따라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나섰으며, 마침내 기원전 515년 완공된 성전을 하느님께 봉헌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유대 공동체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페르샤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어 이방인의 통치를 받았지만, 하느님 현존의 장소인 성전을 중심으로 경신례와 율법의 준수를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 공동체는 점차 회의와 자포자기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성전 재건과 함께 기대하며 기다렸던 영화로운 메시아 시대의 도래는 이루어지지 않고, 대신 이방인들의 압제와 경제적인 가난 그리고 사회적 불안 등으로 그들의 삶은 여전히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희망은 약해져갔으며, 그들 삶의 중심이 되었던 종교생활에 대해서도 무관심과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일군의 예언자들은 유대 공동체의 냉담한 신앙을 새롭게 일깨우면서 그들이 하느님의 참된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1. 말라기 예언자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진 말라기 예언서는 열두 小예언서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 “나의 사자(使者)”(말라 3,1)란 뜻을 가진 말라기 예언자는 유배지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기원전 520-515년)한 후 약 두 세대의 시간이 흐른 기원전 480/460년경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언자는 성전 재건 때의 뜨거웠던 신앙적 열정을 잃어버리고, 다시금 냉담한 종교생활과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 사회생활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그들에 대한 한결같으신 사랑과 이웃에 대한 정의로운 삶을 일깨움으로써 그들을 하느님 백성의 올바른 길로 이끌었던 개혁자였다.
1) 냉소적이며 회의적인 이스라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냉담했던 종교생활은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나는데, 예언자는 이러한 백성들의 불신앙을 신랄하게 지적하며 고발하고 있다. 백성들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1,2)라고 반문하며 하느님의 그들에 대한 사랑을 의심한다. 그리고 “주님의 눈에는 악한 일을 하는 자마다 다 좋고 그 분께서는 그런 자들을 좋아 하신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 “공정의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냐?”(2,17)고 비웃는다. 나아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2,14)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거부하면서도, 입으로는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2,13)라고 발뺌한다. 더욱이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개자로서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충실히 섬겨야 할 사제들조차 하느님의 제단에 부정한 빵을 바침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업신여길 뿐 아니라, “주님의 제사상이야 아무러면 어떠냐?”며 하느님 공경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고 예언자는 고발하고 있다.
2) 회개에의 촉구
이처럼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냉담함에 빠져있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는 그러나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한결같으신 분(3,6)임을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그 옛날 보잘것없던 이스라엘을 친히 선택하시어 시나이 계약을 통해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분이시며, 비록 이스라엘이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죄의 유혹에 넘어가 당신을 배반하고 목덜미 뻣뻣한 생활을 했을지라도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한결같이 사랑해주시고 감싸주셨던 분임을 일깨우고 있다. 이어 예언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하느님의 참된 백성으로 돌아오도록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3,7) 이러한 회개는 결국 하느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통하여 구현되어야 한다.(3,22)
3) 장차 도래할 주님의 날
나아가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의 날을 선포하고 있다. 그 때에는 당신의 사자(使者)를 통해 미리 당신 오실 길을 준비토록 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오시어 “제련사의 불과 같고, 염색공의 잿물과 같이”(3,2) 백성들을 정화시키실 것이다. 또한 레위의 자손들인 사제들이 금과 은처럼 정련되어 하느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될 것인데, 이로써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친교와 통교를 이루는 참된 경신례가 회복될 것이다. 이와 함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가리는 심판을 하실 것인데, 하느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충실한 삶을 살아온 이들은 “하느님의 소유”가 될 것이며 부모가 자식을 아끼듯 하느님께서도 그들을 아끼시리라고 예언자는 선포하고 있다.(3,16-18)
이처럼 말라기 예언자는 당시 신앙적 회의와 체념에 빠져있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그들에 대한 항구한 사랑과 충실하심을 일깨우면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금 하느님 백성의 참된 삶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던 사목자였다. 또한 장차 도래할, 결정적으로 의인과 악인이 가려지게 될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정의가 구현될 것임을 선포하고 그 날을 준비하는 충실한 삶을 강조했던 예언자이기도 하였다.
2. 요엘 예언자
‘야훼는 참된 하느님이시다.’란 의미를 지닌 요엘 예언자의 신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일반적으로 기원전 400년 전후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두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예언서의 내용은 ‘주님의 날’이라는 중심 주제에 집약되고 있다.
예언자가 등장한 것은 이스라엘에 가뭄과 메뚜기 떼에 의해 초래된 엄청난 자연재난이 닥쳤을 때였다.(1,2-12) 예언자는 당시 하느님 백성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갔던 이 재앙이 일회적으로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님의 날’이 시작되는 시대적 징표임을 밝히고 있다. ‘주님의 날’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려왔던 날로, 그들의 삶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종말의 날’을 말한다. 이러한 주님의 날에 관해서는 이미 아모스, 이사야, 스바니야, 에제키엘 그리고 말라기 예언자에 의해 예고된 바 있다.
그러나 요엘 예언자는 전통적인 내용에 새로운 점들을 첨가하고 있다.
1) 주님의 날은 미래에 도래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종말의 날에 하느님 앞에서 받게 될 심판의 대상은 바로 오늘 나 자신의 삶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2) 주님의 날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2,3.11)인 동시에 궁극적인 구원이 구현되는 날(3-4장)이기도 함을 가르친다.
나아가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지금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곧 옷을 찢는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진정한 참회’와 하느님이 진정 우리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하는 ‘실천적 결단’이 바로 그것이다.
3. 요나 예언서
예언자의 선포 말씀이 담겨있는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요나 예언서는 요나라는 예언자를 중심으로 서술된 독창적인 문학작품이다. 여기서 요나는 예언서의 작성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민족주의적인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을 대표하고 있으며, 니느웨의 주민은 이방인들을 총체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예언서가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이야기의 말미에 나오는 하느님과 요나의 대화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모두 다섯 장면으로 구성된 요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게 전개된다.
1) 하느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분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을 피하기 위하여 다르싯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1,1-3)
2) 이에 하느님께서 큰 폭풍우를 일으키시자 겁에 질린 선원들이 온갖 노력 끝에 주사위를 던져 마침내 폭풍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알아낸다. 그리고 요나의 청대로 그를 바다로 던지자, 폭풍이 가라앉는 것을 보고 선원들은 놀라움에 싸여 요나의 하느님을 경외하게 된다.(1,4-16)
3) 하느님께서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는데, 요나는 자신을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사흘 밤낮이 지난 후 하느님의 분부에 따라 큰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뱉어낸다.(2장)
4) 다시 하느님의 분부가 요나에게 내려지고, 그는 니느웨로 가서 심판이 닥치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요나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다. 즉 이방인인 니느웨의 주민들이 모두 참회하며 단식을 하게 되고, 이에 하느님께서는 재앙을 거두셨던 것이다.(3장)
5) 그러자 요나는 화가 잔뜩 나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자신이 선포한 대로 이방인들인 니느웨 주민들에게 재앙을 내리시지 않고 그들을 용서해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낮의 뙤약볕을 피할 수 있도록 그늘을 마련해주던 아주까리가 시들어버리자 또다시 투덜거린다. 이러한 요나를 달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께서 진정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너는 그토록 가엾이 여기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찌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4,10-11)
요나 예언서는 당시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축복과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창조주로서 당신의 무한한 자비에 의해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게 되리라는 보편적 구원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구원사상은 이미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만민 축복에 대한 약속’(창세 12,3)과 제2이사야 예언서(이사 40-55장)를 통해 준비되어 왔으며, 마침내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죽음과 부활)를 통해 완성되게 될 것이다.
[월간 빛, 200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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