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요한의 묵시록

뚜르(Tours) 2008. 7. 29. 10:12
요한의 묵시록 ◆
한자 ∼默示錄
라틴어 Apocalypsis Beati Joannes Apostoli
영어 Book of Apocalypse

   묵시록(黙示錄), 즉 “말없는 가운데 비밀을 나타내 보인다”는 우리말 표현이 성서의 마지막 책의 이름이다. 원래 이 표현은 그리스 말 apocaluptein, 다시 말해 ‘가리는 너울, 혹은 베일을 벗기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그러므로 묵시록은 하느님의 비밀을 갖추고 또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기는 책(revelatio)인 것이다. 묵시문학은 구약의 예언문학에서 출발한 성서의 매우 독특한 전통에서 연유하고 있으니, 예언자들의 신탁(神託)에 관한 일종의 재해석(re-interpretatio)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다. 또 묵시문학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성서성서주변문학에서 나타나고 있으며(다니 7-12장 참조), 그 문학의 선구자들로서는 에제키엘, 요엘, 즈가리야와 이사 24∼27장의 저자 등을 손꼽을 수가 있다.

   묵시록의 문학유형은 매우 난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신탁과 현시(顯示, visio), 하늘세계를 묘사하는 풍부한 이미지, 은유, 환유, 상징들이 묵시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전혀 차원이 다른 하느님의 세계와 영원으로부터 준비한 인류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비밀과 그분의 결정적인 승리에 대한 계획을 묘사하는 것이 묵시록의 대상이다. 이 같은 문학유형의 의도는 우주나 인류의 역사가 통째로 하느님 왕국의 긴박한 도래(到來)에 의해 변혁, 결정되며 또 시간의 마지막에 대한 비전은 새로운 창조와 맞먹는다는 것에 있다. 시련과 유혹 그리고 알력의 때인 현시대는 종국적으로 하느님의 질서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 또 하느님은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인 까닭에, 인간구원은 창조의 한 ‘케이스’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구원이 완성되는 ‘주님의 날’을 위해 인내로이 깨어 있으며 또 그날의 선택받은 자가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하느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한의 묵시록은 묵시문학의 유형과 구조를 사용하고 있지만 매우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묵시록의 중대한 일부인 2-3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이 편지들은 묵시문학의 형식보다는 예언자들의 설교양식을 취하고 있다. 편지의 발신자는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수신자인 동시대인들에게 설교형식을 통해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요한의 묵시록은 종교사에 관한 독특한 해석과 그 주요 관심사 때문에 여타의 묵시문학과는 구별된다. 시간의 마지막에 대한 요한적 비전은 초대교회의 신학적 확신을 그 밑바닥에 깔고 있다. 유태교묵시문학이 기다리고 있던 ‘새 시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마지막의 때[終末의 시간]는 이미 시작되었고 또 그때의 하느님의 선물 곧 모든 인간들에게 내리신 성령(사도 2:16-21 참조)은 전달되었으며, 그리스도 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부활한 사람이다. 하지만 왕국의 도래는 비밀스럽게 성취되고 있으니, 이 신비계시의 대상이기에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왕국은 그 영광의 현시를 지향하는 완벽한 실현을 기다리고 있다. 역사에 대한 이 같은 비전은 묵시문학의 주제인 ‘주님의 날’을 이중적으로 수식한다. 이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그분의 최상주권을 지적한다. 또 이날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 왕국의 보편적이고도 찬란한 현시의 날(Parousia),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날을 지적하고 있다. 이 두 날의 긴장감 속에서 교회의 때가 전개된다. 교회는 현시대의 때 안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종말의 실제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의 저자는 누구이며 그 책의 사건을 유발시킨 시대적 상황은 어떠한가? 불행히도 묵시록의 저자는 자신의 정체를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다. 저자는 자기의 가명을 요한이라 밝히고 있지만 스스로를 예언자로 소개한다(1:1 · 4 · 9, 22:8-9).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저자는 자신이 열두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인 넷째 복음의 저자 요한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성서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늘날 그들의 대부분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받은 에페소 교회의 편집자들의 손에 의해 묵시록이 쓰여졌다고 보고 있다. 묵시록의 수신자들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1:3 · 11, 2-3장)인데 그 교회들의 소재는 소아시아의 지방에 해당하고 그 지방의 수도는 에페소이다. 일곱의 숫자는 완벽성을 뜻한다. 하여 묵시록의 저자는 단순히 아시아의 일곱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 자신의 묵시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 묵시록이란 책의 사건을 유발시킨 시대적 배경은 아직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혹자는 묵시록의 연대를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인 박해예루살렘 멸망을 선행하는 시대(기원후 65∼70년)로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섬겨야 한다”고 선포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의 치세 도중, 그러니까 기원후 91∼96년 사이에 그 책이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화제 숭배를 증언한 프랑스 리용의 교부 이레네오에 따라 오늘날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둘째 번의 연대규정을 선택하고 있다. 묵시록이 주 예수의 왕국과 로마 황제의 신성 모독적인 왕국 사이의 적대관계를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묵시록은 박해와 위기의 시대에 쓰여진 책인 것이다.

   묵시록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그 해석 또한 심히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손에 전해진 오늘날의 묵시록 본문들은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독자는 이 책이 2부로 나뉘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제1부는 예언자적 기질을 지니고 있으니, 그 형식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1:9-3:22)로 나타나고 제2부는 엄격하게 묵시적 형식(4:1-22:5)을 취하고 있다. 제2부는 또 다음의 묵시적 주제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마지막 때의 전조(前兆)(6:1-11:19), △ 현시대의 시련과 대결투(12:1-20:15), 완성과 마지막의 현시(21:1-22:5). 이 도식은 또다시 일곱 숫자의 놀이로 복합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일곱 개의 인장, 일곱의 나팔과 잔이 그것이다. 일곱의 숫자 사이에 예언자의 비전들이 끼여들고 있으니, 수많은 암시, 구약본문들의 요약, 교회와 현시대의 신비에 대한 예언자의 명상록 등이 그 내용이다. 이 내용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대부분의 묵시록 주석가들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이 비전들의 대구법(對句法)을 감안하여 그것들의 수사학적(修辭學的) 구조에 유의하고 있다. 묵시록의 편찬자들은 이 비전들을 통해 언제나 변함없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가르침을 여러 가지 형태로 설명하며 재조명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문학형식과 복잡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묵시록의 메시지와 그 현실성은 놀랄 만큼 명백하다. 모든 예언자들의 메시지처럼 묵시록은 하느님 계획의 현실성을 선포하고 이와 연관시켜 우리들의 긴박한 참여를 강조한다. 이 선포는 ‘현시대’의 시간과 그 시간의 완성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창업은 이미 그 마지막 단계에 와 있으니, 인류는 이제 그 창업(創業)의 현시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1:7, 22:20). 이미 그리스도는 승리했고 그의 왕국이 창시되었다. 예수님이 구세주요 하느님이 세우신 우주와 인류역사의 주님이시다(5:5-14, 11:15-17, 12:10, 1911-16). 오늘의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시대 안에 살고 있고 구원의 선참(先參)과 심판의 전조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사건 앞에 불행히도 인간들은 서로 화해가 불가능한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승리에 가담하고 메시아적 백성의 실현인 바 하느님의 백성을 구성한다(7:9-17, 14:1-5, 15:2-4, 17:4, 19:1-9, 20:4-6). 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저항하는 불경자들이다. 묵시록은 이들을 ‘땅의 주민들’이라 부르니, 사탄사주에 놀아나는 자들로서 사탄처럼 저주받은 사람들이다(6:15-17, 9:20-21, 13:7-8과 14-17, 14:9-11, 17:8-14, 18:9-19, 19:19-22, 20:7-9).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위격과 업적에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선택한 공동체요 그분 사랑의 대상이다(1:56, 3:9, 7:3-4, 12:6, 19:7-9).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공동체이다(1:56, 5:9, 7:14, 14:3-4). 또 교회는 그리스도 왕국의 시작이요 왕과 사제다운 백성이다(1:6, 5:10, 7:15, 20:4-6). 이 같은 특성들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운명과 실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실한 증인’으로서 예언자였으니(1:5, 3:14, 19:11) 교회도 이 세상 안에서 증언을 하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교회도 그리스도처럼 예언자적사명을 수행한다(11:3-6, 12:17, 19:10, 22:9). 그리스도는 당신의 증언을 수난으로 완성했으니, 하느님의 원수인 세상의 적대 세력에 부딪쳤기 때문이다(1:5, 5:6). 교회도 그리스도처럼 시련과 투쟁, 순교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은 묵시록의 진리를 그들의 피소리로 증언하고 있다(6:9, 7:14, 11:7-10, 12:2 · 4 · 11 16:6, 18:24, 20:4). 그리스도는 승리하신, 부활하신 분이다(1:5 · 18, 5:5, 12:5, 17:14, 19:11-21).

   교회는 이미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고 있으니, 그 교회가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부활의 발단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6:11, 7:16-17, 11:11-12, 12:11, 17:14, 20:4-6). 그리스도는 영광과 최고주권자이시다(1:5 · 12-16, 19:16). 그런 이유로 교회는 이미 사제적 왕국이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경신(敬神)과 예배를 통해 천상의 전례(典禮)를 구현하고 있다. 교회의 전례는 곧 나타날 천국의 승리를 예시한다(7:9-12 · 15, 14:3, 20:4 · 6). 이리하여 현시대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양한 신비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천주의 어린양이 가시는 모든 곳을 따라 다닌다(14:4). 어린양의 길이 모든 그리스도 교인들의 윤리적 영성적 귀감인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안에서 그분을 성실하게 증언해야 한다(1:3, 2:10 · 13 · 26, 3:8, 14:12, 22:7 · 9). 교회는 이 지상생활에서 유형의 처지에 있는 공동체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는 세상의 빛도 소금도 아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유형지에 와 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이다. 하지만 교회는 그 시련 때문에 하느님의 보호를 보증받고 있으니, 교회가 이미 부활의 시초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련과 영광의 처지 안에서 교회가 취할 태도는 진리에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끝까지 진리를 증언하는 것은 예언자들의 성실성이다. 피의 순교를 마다하지 않음은 증언의 특수형식이라 할 수 있다(1:9, 2:2 · 3 · 10, 3:10-11, 13:10, 14:12). 교회는 탈출(脫出) 애굽의 길 위에 있다. 그의 길은 험난하고 목마른 사막의 길이다. 하지만 그 해방의 길이 지향하는 터미널은 교회의 참다운 조국, 곧 천상 예루살렘이다. 교회는 그 천상수도(天上首都)의 왕, 곧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동녀들이다(마태 25:2). 비록 현시대의 시련이 냉혹하더라도, 우리의 조국과 왕의 나라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이유로 교회는 현재의 시련과 미래의 결정적인 승리의 긴장 안에서 모든 희망의 기수인 것이다. “오소서! 주 예수님!"의 외침은 이 불굴의 희망을 증언하고 있다(6:10, 10:7, 11:17-18, 12:10-12, 15:3-4, 19:7-9, 20:3-4, 22:17 20).

   이 메시지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와 각자에게 호소력과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천상 예루살렘과 그 왕의 재림은 ‘인민의 아편’이 아니다. 교회와 그 안의 각 인간부활의 보증을 받은 이상 매 순간 그 부활사랑정의대로 행동하고 처신해야 한다. 신도 각자는 매 순간 이 세상우상숭배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사탄과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 함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현시점의 시간의 중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와 그 신도들의 매일매일의 삶은 세상의 죄와 타협할 수가 없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선다는 것은 지금 또 여기에서 전적인 투신과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나의 현존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전망 안에 둔다”는 것은 주 예수가 역사의 원칙이요 목적임을 의미하고 있으니, 지상적 실제들이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상대적이란 뜻이다. 또 묵시록은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강조하고 있다. 전례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그분을 파스카의 주님으로, 천상 예루살렘의 다시 오실 주님으로 상징화한다. 오늘의 교회가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장차 도래할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그리며 지내는 ‘초대받은 사람들의 행복’(묵시 19:9)을 상징화하고 있는 전례인 것이다. (徐仁錫)

   [참고문헌] A. Bisping, 1876 / E.B. Allo, Paris 1921 / A. Wikenhauser, Regensburg 1949 / J. Sickenberger(2hg), 1942 / J. Bonsirven, Paris 1951 / E. Schik(Echter Bible), Wurzburg 1952.

'교리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의 직무  (0) 2008.07.29
성서 구분  (0) 2008.07.29
이사야서  (0) 2008.07.29
예언자  (0) 2008.07.29
말라기, 요엘, 요나 예언자  (0) 2008.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