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스크랩] 2.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기도

뚜르(Tours) 2008. 10. 18. 10:58

2.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기도

기도는 머튼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완전함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하느님의 개입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의 과정으로, 도구로서의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기도에 대해서 머튼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머튼에게 있어서 기도는 아담이 하느님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에로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완전하게 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존재는 기도로써 지고한 완성에 도달하며, 기도는 우리의 가장 완전한 행위중의 하나이다. 즉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체험을 기점으로 자연적인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단계로 질적인 전환을 하고 우리의 영적 생명도 자연적인 일치를 넘어서 초자연적인 일치로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 기도를 두단계로 나누는데 그것은 자연적 단계의 기도로 능동적 기도인 묵상(meditative prayer)의 단계와 초자연적 기도로 수동적 기도인 명상(contemplative prayer)기도의 단계이다.

1)묵상 기도(meditation prayer)

머튼이 말하는 묵상기도는 능동적 기도를 나타내는데 다른 말로는 정신기도(mental prayer),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 묵상(meditation) 등을 사용하고 있다.

묵상 기도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구가하며, 의지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을 단순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신학과 철학과 예술, 음악의 모든 자료를 다 활용하고 있다. 내적인 삶에 관한 모든 전통적인 방법과 실천들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하느님에 의해 위가 일깨워지고, 그분과 우리들의 참다운 관계의 실현이 충만해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여는 능동적인 노력이다"라고 한다. 이것에는 우리의 사고와 행위, 그리고 의지작용이 요청된다. 그렇다고 객관적이고 사변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정신을 일깨워 준비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올리도록 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좀더 알고자 하고, 그분 안에 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묵상의 참 목적은 이러하다. 사람이 어지러움과 괴로움밖에 찾아볼 수 없는 피조물과 현세의 관심을 자유로이 훌훌 털어 버리도록 가르치는 것, 그래서 자기가 몹시 필요한 줄 아는 하느님의 도움을 즐겨 받을 수 있도록 의식적이며 사랑스런 하느님과의 접촉에 들어가는 것,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와 사랑-지금은 이를 돌려 드리는 것이 그의 기쁨이 된 사랑-을 갚아 드리는 것이다.

이런 능동적인 기도로서의 묵상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자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생명과 신앙의 진실에 대해 직접적, 실존적인 파악과 개인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 내부에 하느님의 앎과 사랑이 들어오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이 우리의 중심에 계심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 하느님을 인식한다.


둘째 묵상 기도는 사랑에로 통하는 길을 닦아준다.
그것은 순명과 겸손을 가르쳐 준다. 묵상으로 하느님께 끌려간 영혼은 곧 복종의 가치를 알아 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날이면 날마다 자기의 이기심과 교만, 무능과 졸렬의 짐 때문에 당해야 하는 난관과 번민은 남의 인도와 조언과 지도를 받고자 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머튼에 따르면 묵상 기도의 목표는 "순수한 마음"(purity of heart)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무조건적이고 완전히 겸손한 항복, 하느님이 의도하신대로 우리 자신과 처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을 말한다. 바로 새로운 영적 정체성, 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실재에 부합하는 "자기"와 상호 관계가 있다.


셋째로 묵상 기도에는 우리의 노력이 능동적이며 의식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그것은 아직 기도하는 원천이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묵상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향한 우리들 전존재의 의도적 개방이며, 우리 영혼의 거록한 중심으로 뚫고 들어감이다.

2) 하느님의 직접개입(God's direct intervention)

머튼은 묵상 기도에서 명상 기도로 전환시키는 하느님의 직접 개입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첫째, 그것은 깨달음의 선물이라는 분명한 체험으로 비교적 드물게 나타나지만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갑자기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비우는 공(空, emptiness)으로써 우리를 접촉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단순하게하는 단순성(simplicity)으로써 우리를 움직이신다. 일체의 다수성(multiplicity)은 끝난다" 둘째, 그것은 메마름의 광야를 거치는 것으로서 명상 기도에 이르는 가장 일반적인 길이다. 이때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떤 내적인 고통과 근심만은 의식하고 있다. 발전함에 따라 이런 무미건조한 고요함 속에서 쉬는 법을 배운다. 이런 체험의 복판에 현존하는 어떤 위로하는 강한 힘이 생긴다. 그리하여 본능과 본능의 모든 기능에는 고통인 빛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 주신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빛은 우리의 이기심과 어두움과 불안전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셋째, 맛과 휴식과 향유가 가득한 고요함이 있다. 이 고요함은 우리 영혼 속에 보내진 그리스도의 사명과 관계 있으며, 그리스도가 우리와 더불어 계시다는 표지이다. 이런 평정은 대부분 성만찬에서 얻어진다고 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직접개입을 통하여 비로소 묵상 기도는 명상기도로 질적인 전환을 하게 되고, 우리의 영적 생명도 자연합일의 상태에서 초자연합일의 상태로 변형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 이전에 이미 인간의 영혼 안에 명상과 거룩성의 씨앗은 뿌려졌으나 그저 잠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씨앗은 싹이 트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 즉 자연합일의 상태에 에 있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직접 개입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새로운 세계, 모든 자연적인 지식과 모든 자연적인 사랑의 단계를 뛰어넘는 풍부한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신비합일은 즉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은 명상기도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3) 명상 기도(contemplation prayer)

이는 수동적 기도의 단계를 나타내는 말로 명상(contemplation), 수동적 명상(active contemplation), 주부적 명상(infused contemplation), 신비적 명상(mystical contemplation)등을 사용하고 있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은 하느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니, 그분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대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한다. 명상은 순수 사랑의 발전이요 완성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명상이란 무엇인가 39) 명상은 사람의 지적 영신적(靈神的) 삶의 최고의 표현으로 깨어 활동하며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생명 자체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존재가 보이지 않는 초월적 그리고 무한히 풍요로운 원천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는 것이다. 명상은 이성과 믿음이 본질적으로 염원하는 일종의 영적 통찰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은 "보지 않으면서" 보고 "알지 못하면서"알기 때문에 통찰력이 아니다.

명상은 보다 깊은 믿음이며 형상이나 말, 명확한 개념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지식이다. 명상은 말과 상징으로 암시될 수는 있지만 그 아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순간 명상은 안다고 했던 것을 취소하고 확인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명상중에 우리는 "알지 못함으로" 알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아는것이나 "알지 못하는 것"을 모두 넘어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 음악 그리고 예술은 명상의 체험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명상은 이 모든 것을 점유하고 초월하며 완성시키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이 모든 것을 대체하고 또 그것을 모두 부인한다. 달리 말해 명상은 초월적이며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아는 데에까지 뻗어 나가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명상은 일깨워 주는 뜻밖의 은총, 모든 실재 안에서 실체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주는 뜻밖의 은총인 것이다. 즉 한정된 우리 존재의 뿌리에 있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생생한 일깨움이다.

또한 명상은 부르심의 응답이기도 하다. 우리 존재의 심연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부터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이 대답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생명이며 하느님의 창조성이다. 우리 자신은 하느님의 반향(反響, echo)이 되고 하느님의 창조성이 되는 것이다.

명상의 생활은 두 단계의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데 첫째는 질문의 의식이고, 둘째는 대답의 의식이다. 이 둘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고 엄청나게 서로 다른 단계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에 대한 의식이다. 질문 그 자체가 대답인 것이다. 우리 자신은 그 둘 다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명상은 철학적인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본질에 대한 정적(靜的) 인식 또한 아니다. 명상은 하느님안에 있는 나의 생명을 통해서, 또는 신약 성서가 말하는 "자녀 됨"을 통해서 하느님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은 종교적이고 초월적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우리 안에 감추어진 신비의 창조 사업을 자비로이 완성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명상은 일깨움이며 계몽이고, 하느님께서 창조적이며 역동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사랑이 확신하게 해주는 놀라운 직관적 인식이다.

즉 "우리 존재의 심층에서 형언할 수 없는 영적인 접촉에 의해 지각된 우리 자신의 무(無, nothingness)와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실존적 인식"이고, 하느님의 지혜와 깨달음의 선물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각별한 배려로써 길러 주시고 완성시키고자 우리 영혼 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의 활동이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명상을 분석하려 하면 할수록 명상의 진정한 내용은 없어지게 된다. 이런 명상의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이성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명상은 외적 자아의 기능이 아니며 또 기능일 수도 없다. 명상에서만 깨어나는 초월적 깊은 자아와 일반적으로 단수 일인칭으로 불리는 피상적이며 외적 자아는 정반대이다. 이런 피상적인 "나"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개체성"이며 우리의 "경험적 자아"인 것이다. 세상에서 일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며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는 진정한 "나"가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우리 대부분이 죽기 전에는 찾지 못하는 신비스럽고도 알려지지 않은 "자기"의 흔적, 가면,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명상은 이런 "나"는 진정으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관찰과 반성의 범주를 넘는, 설명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나"에 대한 일깨움이다.

이것에 근거해서 머튼은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에 대해 비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자기의 정신적 근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유리된 존재, "생각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기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어떤 위안을 얻으려 애쓰는 소외된 존재의 선언이다. 이것은 자신을 한 개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신비를 직접 또는 즉각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스스로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은 반대로 실체를 주관적인 것으로서 경험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외적 자아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상징되는)"나의 것"이 아니고 실존적 신비 안에 있는 "나 자신"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명상은 연역(演繹)을 통해 실존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유롭고 인격적 실체가 실존적 심원(深原)에서 생도하며 하느님의 신비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직관적 인식을 인해 현실화한다.

머튼은 또한 명상을 황홀이나 무아지경, 갑자기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듣는 것도, 상상력도 아니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도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명상에 따라오는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명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들을 명상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명상기도의 완성은 신비 합일 즉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합일이다. 이것은 "앎과 사랑에 있어서 마음과 뜻의 완전한 동일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앎과 사랑을 초월하는 완전한 영적 교통 속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하나 됨(perfect coalescence)이다." 이런 순수하고 완전한 명상기도의 단계에서 안간은 무화(無化)된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행동의 원천과 행위자와 종착지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완전한 명상의 기도의 사람들 안에서 세상에 평화가 이룩된다.


출처 : 가톨릭 영성의 향기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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