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스크랩] 4. 토마스 머튼의 성경 이해

뚜르(Tours) 2008. 10. 18. 10:56

4. 토마스 머튼의 성경 이해

 

"성경은 어떤 책인가?" 이 물음은 그리스도인, 유대인, 나아가 회교도들이 성경에 대해 가져 온 매우 특이한 주장, 즉 성경은 다른 책과 다르고 인간의 운명은 바로 이 책에 달려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여기서는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는 근본 주장의 의미부터 밝혀 보고자 한다.

성경은 자신이 지닌 메시지가 단순히 누구를 가르친다거나, 혹은 먼 옛날의 일을 알려준다거나, 혹은 어떤 윤리적인 원칙들을 일깨워 준다거나, 혹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설명하는 데 만족할만한 가설을 제시한다거나,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그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제기한 근본 주장은 권위 때문에 성경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그 자체의 힘에 의해 인식되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실제 경험을 통해서 인식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어떤 일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씀은 그 사람의 실존 전체를 바꾸어 버린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 존재의 근거이자 원천이고 동시에 인간 역사의 중심이며 인간의 운명을 이끄는 궁극적인 자유가 벌인 사적이면서 복합적인 인간 세계의 침입, 이 궤뚫음, 이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누구인가 되묻는 책이다. 성경의 바닥에 깔려 있는 이상하리만치 기묘하게 완곡하면서도 집요한 주장들은 정체(正體)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여타 책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정체를 묻고 있다. 바르트(K. Barth)가 지적하고 있듯이, 성경에 대해 묻기 시작하는 사람은 동시에 성경이 그에게 묻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현대인들의 반응은 재미없어 하거나 무슨 뜻인지 몰라 당혹해 하고, 금방 잊어버리며, 심지어는 성경이 수면제 구실을 하기도 한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성경이 항상 흥미로운 책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최종적으로 성경 안에 몰입할 때, 나아가 성경에서 이야기되는 내용에 대해 좀더 파악하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성경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경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경의 진리에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변적인 물음을 갖고 성경에 다가갈 때, 도리어 성경은 우리에게 지독하게 실제적인 물음을 던지며 맞서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신앙이 없거나 또는 스스로 신앙이가정하고 있는 비합리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자들 보다 더 나은 위치에서 성경와 대화를 나누고 씨름하면서 성경 속으로 몰입해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그들은성경이'하느님의말씀'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반면 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호의적으로 성경를 대하므로 인해서 무의식중에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경이 오로지 자기만의 책인 양, 또는 자신이 성경에 관한 모든 것을 알기나 한 것처럼 지나치게 만족하여 자신의 신분과 외적인 특권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이 시대의 보편적인 관점은 선조들의 광적(狂的)인 신심을 반성하도록 우리를 일깨워 준다.

성경에 빠져든다는 것은 아무런 이의없이 성경의 주장을 그냥 다 받아들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정직하지 못한 복종보다 오히려 솔직한 항변을 더 높이 평가한다. 달리 말해 성경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주장에 머리로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자신이 성경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주장하는 기본 진리 가운데 하나는 단순히 하느님은 항상 옳고 인간은 언제나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진실된 대화 속에서 서로 대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대화는 서로 상대방의 권리와 자유를 충분히 존중하는 두 인격 사이의 참된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여전히 타당하고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그런 꿈을 선포하고 있다. 이런 꿈에 대해서 머튼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방식에 동의한다. "성경은 수 천년 동안 정당성을 지녀 온 수많은 규범과 원칙을 담고 있는 특이한 책이다. 그 책은 인간들에게 여전히 타당하고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그런 끔(vision)을 선포하고 있다"(당신도 신처럼 될 수 있다 에서) 무슨 꿈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프롬에게 있어서 그것은 '철저한 인본주의(radical humanism)'로서, 인류의 하나 됨과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내적 조화와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프롬은 성경에서 자유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계속 강조한다. 그가 성경에서 발견한 철저한 인본주의는 "완전한 독립을 인간의 목표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허구와 환상을 꿰뚫고 들어가 현실을 완전히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한다. 실로 성경에서 가장 당황스럽고(이성적으로 볼 때) 터무니없다고 느껴지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께서 끝내는 인간을 죽음에서까지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의 메시지가 무의미해지고, 현대인에게 냉담하게 무시당하고 있는 무신론적 유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신자들은 한탄한다. 이런 기묘한 현대의 문제점에 부딪히면, 우리는 성경이 모든 이의 책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의 신자들만의 책이 아니다. 어쩌면 진지하게 성경에게 물음을 던지는 비신자가 오히려 신자가 놓쳐버린 그 무엇을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할 점이 있다. 우리는 성경의 메시지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 무거운 짐 진 자, 억눌린 자, 아무런 기본군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메시지임을 잠시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원래 특별히 그 메시지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음송되고 들려지던 구전을 모아 놓은 것으로 생생한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에서 말해지거나 읽혀지고, 영창, 노래로 불려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가 회당 혹은 교회(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 라는 말은 '듣고 응답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한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메시지 그 자체가 공동체나 모임을 이루고 이를 굳건히 결속시키는 그 무엇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말씀'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의식을 행하는, 곧 함께 믿고 응답하며, 받아들이고, 확인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일이 필수적이다.

전승되어 온 모든 위대한 종교 고전(古典)들은 인간들에게 무엇인가에 이르는, 곧 인간의 내면적인 의미에 닿는 생명의 길로 가는 열쇠, 아마도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기를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혁신을 일으킬 열쇠를 제공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간과 역사에 영향을 끼쳐 왔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모든 고전들과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알 때 우리는 다른 고전에 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무언가를 성경에서 얻으려고 기대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를 읽을 때에 아주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자세로 각 본문의 저자들이 의도했던 실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또한 성경 각 권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는 문학 형식과 역사적 배경의 폭넓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통일성을 가진 책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이러한 의미에서 '세속적인 책'이다. 인간의 삶, 노동, 동료들과의 관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놀이와 즐거움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를 우리들의 편견적인 신앙이나, 신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왜곡되고 잘못된 환상에 빠지게 된다.

성경 본문을 통해 독자에게 도전하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동참, 자유의 결단과 투신,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판단을 요구하는 성경 속내용에서 나오는 신앙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는 결코 성경를 이해할 수가 없다.

불트만이 제시한 성경를 이해하는데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 번째는 성경 본문 자체의 의미를 미리 파악하는일(Vorverst ndnis)인데, 이것은 주로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에 관한 문제라 하 수 있다. 두 번째 차원에 가서야 성경은 실제로 파악된다. 성경 정경의 저자와 편집자가 본격적으로 성경 저술 및 편집에 착수하게 된 것도 바로 한층 깊은 두 번째 차원에서였다.(이 깊은 차원은 반드시 '신비적'이거나 모호하지 않고 오히려 분명하게 인격적이다).

이제는 성경를 진지하게 읽을 때 체험하는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성경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우리는 성경이 어떤 이론이나 이념보다는 사건들(events)을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경의 메시지는 크고 작은 각종 사건들(happening)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그 사건들의 의미 속에 암시되어 인류와 하느님의 백성, 우리 각자에게 전달된다. 둘째로 이 사건들은 모두 예상할 수 없고 자유로운 개입 또는 침투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들은 종종 폭발적이고, 놀라우며 극적이다. 셋째로 만일 인간이 단순히 자신의 경향성과 이념만을 따르기로 한다면, 비록 그것들이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잘못이나 부정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내면의 진실과 우리 삶의 실재에 충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우리 자신을 완전히 초월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진리에 충실함을 포함하고 또한 요구한다. 넷째로, 갈등하는 두 가지 자유의 대립과 그것들이 서로 다른 두 차원에서 벌이는 역사상의 상호 작용은 가만히 있는 것도, 일정한 방향 없이 제멋대로 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성경의 매우 중요한 관념인 계약 개념이 대두된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인하게 된다. 사건을 이끌어 가시는 자유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발전시키고 완성하게 된다. 다섯째로 이점에서 신약과 구약의 관계가 뚜렷해진다. 여섯째로 이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사건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안이 되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갈라놓게 되었다.

성경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성경 안에서 서로 작용하고 있는 제각기 다른 여러 역동적인 요소들, 서로 다른 갖가지 관점과 여러 가지 경향, 자료 및 문학 형태를 모두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출처 : 가톨릭 영성의 향기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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