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제2부 이상들을 실현할 수 있는 틀 ㅣ (1) 새로운 법

뚜르(Tours) 2008. 10. 18. 11:34

 

 

 

제2부   이상들을 실현할 수 있는 틀

 

2-1. 새로운 법


 완전해지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이상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지키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규율’,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지켜야 할 일반적인 규범과 기준이 있다.

그러한 규율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영적 교리와 근간이 되는

폭넓고 보편적인 규범을 몇 장에 걸쳐 성찰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거룩하게 되기 위한 그릇된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교회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각각의 그리스도인을 개별적으로 소집하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소집은 부르심이자 ‘소명’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소명,

곧 당신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가끔 우리는 그 소명을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특권으로 여기곤 한다.

그들이 완전에 이르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봉헌한다.

그러나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르며,

자신의 삶이 허락하는 한 그분의 모범을 따라 마침내 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기도를 많이 하거나

9일 기도를 많이 바치는 것,

성상 앞에 초를 밝히고 기도로 밤을 새우는 것,

또는 금요일에 금육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미사를 드리거나 특정한 자기 부정의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바람직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런 맥락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종교적인 의미가 결여된 텅 빈 제스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 응답한다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고 실행하기 위해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죽음과 부활의 본질이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르셨다(마태 26,42; 루가 2,49; 요한 5,30; 히브 10,5-8 등).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은 아버지의 뜻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에 명확하고 뚜렷하게 나타나 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선 바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 하나 위대한 계명에 가장 완전하게 요약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소유하시고자 죽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지금,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법이 되어야 한다. 이 내적인 법,

순수한 사랑의 법인 ‘새로운 법’은 ‘자녀 됨’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4-15).


성령은 외적인 계명인 옛 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이 옛 법을 내면화시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레 우러나는 사랑으로 하도록 만든다.
성령은 우리가 익숙한 법들과 상치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그분은 우리가 규범을 더욱 잘 지킬 수 있게 하시고,

가족, 직장, 각자가 선택한 삶, 사회적 관계, 기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하느님과의 내밀한 대화 등의 의무를 사랑으로써성취하게 하신다.

 
성령은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라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하느님의 섭리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도

사랑을 다해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애정이 깃든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은총이 가득한 그 뜻을 충실한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함은 결국 충실함과 사랑의 문제, 특히 무엇보다도 의무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모든 관계 안에서 표출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사랑은 어떤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고, 우선권을 둔다는 것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을 보류하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애정 어린 순종과 거리낌 없는 포기의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자신의 뜻을 꺾으면 꺾을수록 더욱더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것이다.

또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욱더 일치하게 될 것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더욱더 가까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