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ㅣ (3) 천편일륙적 성인상

뚜르(Tours) 2008. 10. 18. 11:37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1-3. 천편일률적 성인상


 성 베네딕토가 쓴 <수도 규칙서>에 보면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구절이 나온다.

거기서 그는 수도자는 거룩해지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길 바라서는 안 되고,

거룩하다는 명성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우선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실제적인 영적 완전함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전함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거룩함과 나르시시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교회가 우리에게 공경의 대상으로 천거하고 있는 영웅적인 남녀의 성덕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왔다.

성인들은 일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각 속에서 금세 정형화되는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고정 관념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인전들은 대체로 비현실적인 영웅담이나 기적 같은 것들을 강조해 왔고

성화(聖畵)들 역시 그 점에서는 톡톡히 한 몫을 했다.

 

그리하여 거룩함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인에 대해 대중적이고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게 된다.

아니면 목표 달성의 어려움 때문에 마치 교회가 그것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도(正道)로 제시하는 것인 양

일정한 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게 된다.

그 모델이라는 것이 각 성인들 나름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구현한 것이지만

이를 뭉뚱그려 만든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모방에 불과하다고는 생각지 못한다.

 


 그런 틀에 박힌 이미지를 그려보기란 어렵지 않다.

성인은 실오라기만큼의 도덕적인 결함도 없다.

성인은 과거에 많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현재는 완전한 회심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죄를 지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사소한 유혹도 느끼지 않은 채 성장한다.

물론 유혹을 받기도 하겠지만, 유혹이 그를 힘들게 하지는 못한다.

성인은 모든 것에 대한 확실하고 영웅적인 해답을 알고 있다.

성인은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불 속이나 얼음물, 가시덤불로 뛰어든다.

성인의 의도는 언제나 가장 고상하다.

 

성인의 말은 언제나 교훈적인 격언으로 가득하고,

모든 상황에 놀랄 만큼 적합한 말들이라 다른 이들의 생각까지 잠재울 수 있다.

이처럼 두렵기까지 한 ‘완전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인간적인 대화를 할 필요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성인들은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듯 유머도 할 줄 모르고,

감정도 없고 인류 공통의 관심사에도 아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인들은 매 상황마다 가장 알맞은 덕을 발휘하기 위해 항상 그들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왕과 그를 수행하는 고관대작들이 모퉁이를 도는 순간에

문둥병자의 상처에 입을 맞춰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심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이 같은 이미지를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삶 안에서 재현해 보려는

순진한 신참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깨달아 갈 때,

우리는 속으로, 그가 결국은 옳았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같은 거룩함은 확실히 절대적인 것에 대한 사이비 예찬이다.

양보란 없으며 타협도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진심으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룩함의 기적이 어느 정도는 초자연적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초자연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본성과 은총은 완전히 대립되는 것인가?

거룩함은 본성과 관련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배격하고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고정 관념이 되어 버린 이미지를 그리스도인이라면 실현해야 할 완전한 모델로 여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권리로 사람들이 그 모델을 좇으려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룩함의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 은총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혼란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은총은 본성을 완성한다.”라는 보편적 명제는 영성 생활에 미봉책을 허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진리로서,

성인이 되기 이전에 모든 인간성과 인간의 실제적인 조건인 나약함 속에서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성인’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성인들은 모두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그들의 인간성은 거룩함으로 인해 더욱 풍부하고 깊어졌다.

성인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 ‘육화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인간적인 분이셨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그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되었고,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약함과 모든 고통을 체험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육화한 말씀 안에서 또 그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보다 더 ‘초자연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해지려면,

우리는 우선 그분께서 그러하셨듯이 철저히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현존과 일치하고

천상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녀로서의 특권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거룩함은 인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인간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은 더 많이 걱정해 주고 고통받고 이해하고 동정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한편,

유머와 세상의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만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인간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격하시키며,

자신을 남들과 다른 경이의 대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완전함에 이르는 길’의 서투른 모방이요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모방은 육화 신앙을 거스르는 명백한 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지키고자 하신 인간성을 경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무질서한 사회에서나 통하는

저급한 인간적 가치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도한 동물적 본능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깊숙히 내재되어 있는 인간적 욕구들을 왜곡하고 개발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격정을 다스리기 위해 고안된 혹독한 고행 생활은

정서적으로 제대로 성숙하지 않고 천성이 허약하며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의 기술 지향적인 삶이 인간의 정서와 본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좀더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기계를 다루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 사이에서 생활이 양분된 사람은

조만간 그의 본성과 인간성이 심하게 훼손되어 고통받게 될 수도 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교적 교육으로 적절하게 계발되고 형성된 정상적인 지성과

정상적인 인간적 의지와 자신을 헌신하고 봉헌할 수 있는 훈련된 자유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먼저 건전하고 안정된 인간적 정서를 전제로 한다.

은총은 본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완성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는 건강하고도 본능적인 자발성이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인간의 감정과 본성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 안에서 활동하였다.

그분은 모든 일에 섬세하고 따뜻하고 사려 깊은 인간 됨됨이를 보여주셨다.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누르려고 해서는 안 되고

(많은 경우 그 같은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 사랑의 봉사 가운데 정서 생활을 형성하고 계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바리사이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바라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다른 사람들의 눈에 영웅적으로 보이는 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신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성인은 자신이 거룩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거룩하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승복하는 사람이다.

그는 신적인 거룩함의 실체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 안에서 거룩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거룩함을 자신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거룩함을 가장 마지막에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 안에서 무(無)와 자기 중심적인 성향과 죄라는 거짓된 실체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룩한 구세주의 현존과 자비의 빛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어둠까지도 밝게 비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성인은 사람들이 죄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성인은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하느님 연민의 대상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또한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의 도구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세상에 비추는 창이 되기를 원할 뿐이다.

이를 위해 그는 거룩해지려고 한다. 그는 덕망 있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선함이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영웅적으로 덕행을 실천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마태 5,48) 사랑 안에서 완전해지기를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