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제2부 이상들을 실현할 수 있는 틀 ㅣ (2)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뚜르(Tours) 2008. 10. 18. 11:33

       

 

 

제2부   이상들을 실현할 수 있는 틀

 

2-2.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어떤 체계적이면서도 조직적인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신비롭고 거룩한 그분의 뜻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가?

내 희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흡족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의지가 빚어 내는 허상일 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짧은 생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하느님의 뜻’을 감지할 수 있는

거짓되고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방법을 고안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죄로 물든 나의 의지는 당연히 하느님 뜻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그 상황을 고치기 위해서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자발적인 욕구나

개인적인 관심사와는 반대되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항상 악에 더 이끌리게 되어 있어,

자연적인 욕구는 무엇이나 다 죄스러운 것이라는 이런 추론은 일종의 마니교도적인 가정이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 즐거움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욕구가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원죄의 교리는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였고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항상 죄로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악마도 그렇다고 해서 천사도 아니다.

사람은 순수한 존재는 못 되지만 육과 영을 모두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실수와 악의에 찬 감정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확실히 죄인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사랑과 은총에 반응한다. 또한 선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도 응답할 줄 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그리스도교적 방식은 추상적인 논리의 추론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몸의 한 일원이고,

그가 하느님의 뜻을 인식하는 정도는 그가 같은 몸을 구성하는 다른 일원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위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살아 계시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도 서로를 통해 신비롭게 전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완성한다.

하느님의 뜻은 이러한 상호 의존성에서 찾을 수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1고린 12,12-21).


그리스도교적 ‘방법’이란 전례의 준수, 고행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과 그의 형제간의 객관적인 관계가 요구하는 자발적인 사랑이라는 가치의 문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또 가시적(可視的)으로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러나 잠재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그 몸의 일원이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에 의해 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계명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명시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는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1-17).

 

 


이것이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수덕(修德) ‘방법’이다.

모든 사람은 다론 이들의 벗이 되어 줌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원수마저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진정한 벗이 된다(마태 5,43-48 참조).

불의와 폭력 앞에서도 희생과 인내와 온유함의 정신으로 처신할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좀더 관대하고 친절해야 하며,

서로를 향해 모욕하거나 악의 섞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마태 5,21-26 참조).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방법’은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뜻을

그리스도 신비체의 실질적인 구성원과 잠재적인 구성원들 간의 상호 관계 안에서 찾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협력하기를 바라신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 삶 안에서 우리가 구원의 도구가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만나게 해 준다.

 

그리고 성령 또한 우리가 준 사람에게서 받고, 받은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삶은 성령의 활동에 의한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하나가 된 그리스도 신비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인이 가장 자유롭게 ‘일치의 끈’이신 사랑의 성령과 협력하는 것이다.

 

 


이 일치는 살아 있으며 유기적이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외적인 일체감을 부여하는 조직 이상의 것이다.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각자의 존재 깊숙이 살아 활동하는 생명에 의해 구성원들을 일치시킨다.

이 생명이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신비체의 구성원들 안에서 끝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각자가 능력에 따라 자신의 역할과 신분에 맞게 자신의 모든 형제들,

특히 사랑의 질서상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구원과 봉사에 투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부모, 자녀, 친척과 친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뻗어 가야 한다.


이제 우리의 희생을 평가하고 진단할 수 있는 규범이 되는 것은 사랑의 질서라는 분명한 가치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보다 보편적인 상위의 선을 위해

우리가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한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희생이 다른 이들의 행복과 교회의 선(善)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희생의 가치는 우리가 감당한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분열의 벽을 깨는 힘, 상처를 치유하는 정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질서와 일치를 복원하는 힘으로 가늠할 수 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12-21).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3-26).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3-18).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와 그들을 섬겨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자각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이 기본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에 비로소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몸을 이루는 구성원이자

우리와 동일한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중대한 의무가 있고,

또한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