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ㅣ (4) 이상과 현실

뚜르(Tours) 2008. 10. 18. 11:36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1-4. 이상과 현실


 그리스도교적인 완덕의 정수를 몇 줄짜리 공식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가끔씩 그럴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공식이 담고 있는 의미를 금방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과,

거룩함이 단순히 공식 몇 개를 따라 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인이 된다는 것’은 적절한 조리법을 고른 다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여러 가지 재료를 내 입맛에 맞는 방법대로 요리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영성을 다루는 몇몇 서적들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영성 서적 안에는 모든 것을 종합하는 새로운 기법을 발견한

‘거룩한 영혼’들이 항상 등장하여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단순하게 처리해 주고 있다.

 

 


 모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단순한 방법을 구하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통적으로, 인간이 제기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라. 그리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너희는 성령을 받을 것이다.”(사도 2,37-38 참조)라는

그리스도교적 답변은 ‘기법’이나 ‘기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베드로 사도가 첫 성령 강림절에 청중에게 한 설교는

구원이 어떤 기법을 따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한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그 몸의 구성원으로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감정의 상태나 친밀한 내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참사랑은 교회의 고통과 문제들과 열망에 동참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세상과 사람들을

하느님 뜻에 맞갖게 쇄신시켜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도 이 과업에서 제외될 수 없다.

현대에 와서, 이 과업의 영역은 세상만큼이나 넓어졌다.

 

 


 그러나 이 과업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빛과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는 이상 다른 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줄 수 없다.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힘과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교육되어야 하고 거룩해져야 한다.

 

 


 단순하고 효과적인 공식은 복음에서만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복음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투명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요 구원의 말씀은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신비롭다.

 

우리가 ‘완전함’으로 불림받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 완전함이 ‘그리스도의 계명’, 그 중에서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킴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신비 가운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각자의 삶 안에서 자주 당혹스러운 혼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 나가면서 우리는 각자 새로운 ‘길’, 자신만의 ‘새로운 거룩함’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현하는 데 있어 다른 이들과는 구별되는

각각의 개별적인 소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며 서로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삶에 대한 공식화된 법칙과 권고만 생각한다면

숨어 계시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일은 매우 간단해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찾아 행하고 악한 일을 피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 말이다.

우리는 마음에 어느 정도 뚜렷한 이상을 지닌 채 현실 생활을 그 이상에 억지로 맞춤으로써

거룩함을 정복하려고 든다.

우리가 믿건대, 단지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이상에 관대하고 충실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자주 그 이상 자체가 불완전하다고

우리를 그릇되게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우리의 이상은 객관적인 규범을 바탕으로 설정되었지만,

우리는 그 규범들을 매우 한정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터무니없는 욕구와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것을 무의식 중에 곡해할 수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욕구와 기대들, 우리 자신과 우리 삶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욕구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할 만큼 터무니없고 환상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비록 신학적으로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지라도,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극도로 비현실적이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까지 잃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상을 갖고 있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상이 현실과 연관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삶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변증법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변증법적이지 타협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수덕적 규범에 기초를 둔 이상들,

아니면 적어도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상들은

각각의 사람들 안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실현될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은 하나의 보편적인 완전함에 대한 통일된 기준을 자기 삶 안에서 실현함으로써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들과 한계 안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부르심과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

 

사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특정 수행 방법(금욕적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부정과 기도 그리고 선행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고요하고 평정하게 질서를 이룸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찾는다기보다는,

우리를 더 간절히 찾아 헤매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국 찾아내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소유하시도록’ 해 드리는 데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총에 대한 개념 역시 모호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실상 우리가 은총을 반(半)물질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취급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실제로 우리는 은총이 어떤 신비로운 물질, 어떤 물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어떤 상품,

또는 어떤 초자연적인 엔진의 연료쯤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은총을 마치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 필요한 어떤 영적 휘발유처럼 여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은총은 매우 신비스럽고, 유추와 은유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자칫 우리를 오류로 이끌 수 있다.

분명히 은유적인 표현은 우리를 현혹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도록 만든다.

은총은 우리가 선행을 하거나 하느님께 다다르기 위해 ‘사용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완전히 분리된 ‘물건’이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이자 활동 그 자체다.

그러므로 은총은 그분에게 가기 위해 그분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필수품이 아니다.

실제로 은총이란 우리 삶 속에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성화 에너지에 의해 우리 안에 생겨나는 존재의 질적 특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특히 신약성서에서 하느님 자신이신 성령을 받는 것에 비해

은총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적게 나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되지 않은 은총(uncreated grace)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령은 우리 영혼의 반가운 손님(dulcis hospes animae)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로마 8,9).

우리가 이 사실을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그분과 우리가 맺고 있는 친밀함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끊임없는 기쁨과 힘과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생명과 평화 자체이신 성령의 은밀한 내적 인도(로마 8,6 참조)와 더욱더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더 잘 맛보고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갈라 5장 참조).

우리는 우리 안에 숨어 계시는 성령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데,

그분은 우리가 기도를 하지 못할 때라도 우리 안에서 기도를 드리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 필요성을 모르는 것까지도 우리를 대신해 요청하여 주시고

우리 자신이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즐거움을 우리를 위해 찾아 주는 분이시다.

 

 


 “완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부지런히 그리고 사심 없이 하느님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발견되고 사랑받고 소유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심으로써 우리를 완전히 관대하게 만들고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게 하며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드리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극복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약함과 고통을 성령의 힘과 순수함으로 맞바꾸도록 허용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과 성령의 탄식을 잊은 채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시켜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평정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우리의 영적 태도는 전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에 달려 있다.

만약 하느님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진정한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향한 무한하고 뜨거운 그분의 관심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한 우리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확신을 갖고 성장해 갈 수 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인간적인 약점과 실패들 때문에 결코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엄하고, 우리에게는 그다지 관심도 없는 냉혹한 입법자,

 단순한 통치자, 주인, 아버지가 아닌 심판관으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좁은 길’로 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