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홀로 있음에서 타자에게로 | ||||||||||||||||||||||||
[토마스 머튼 읽기 -2] | ||||||||||||||||||||||||
홀로있는다는 것 머튼 침묵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았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 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용서할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 졌을 때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 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입니다. 그 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 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그 분만이 내 마음을 이해하시면 족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고 그 분의 위로를 갈망할 때 십자가의 침묵처럼 잠잠히 그 분의 뜻 모든 것을 맡길 때에 침묵은기도입니다. 머튼에게 글쓰기는 거룩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한편 으론 여전히 절대 고독에 대한 갈망으로 카르 투 지오 수도원으로 옮기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접고, 글쓰기 역시 핸디캡이 아니라 참다운 침묵과 홀로 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알아듣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머튼에게 거룩함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된 것이다. 그는 "만일 성인이 되려한다면 나 자신이 무엇이되었는지 종이에 옮겨야하고 ... 완전한 단순 성과 성실 성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숨기지 말아야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머튼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생각들을 공적인 자산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수도원의 침묵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내적 삶의 리포터를 삼음으로써 이렇게 감정과 생각 마저 제 소유로 여기지 않고 비워 냈을 때 모든 것이 제게 속한 것임도 깨달았다. 공기와 나무, 전 세계가 하느님을 노래하고, 발 아래 땅에서 불과 음악을 감지할 수 있었다.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를 가난하게도하고 풍요롭게도했으며, 평화와 행복을 안겨주었다. 1951 년 5 월 학생들을 돌보는 영적 지도자 (수련장)가되면서 머튼은 새로운 사막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비'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침묵을 느끼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침묵을 얻자 마자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타자의 발견 1960 년대 들어서 미국 사회 안에서 인종 갈등이 극심 해지고, 베트남 전쟁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머튼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응답할 준비를했다. 세상과 교회, 실천과 영성 사이에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1968 년 12 월 10 일 그가 죽던 날, 방콕에서 머튼은 '마르크스주의와 수도원주의;에 대한 강연을했다. 이날 어느 프랑스 학생 혁명 지도자가 "도 역시 수도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이에 머튼은 "수도자는 본질적으로 현실 세계와 그 구성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을 뜻한다"동의했다 고. 관상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문제이며, 침묵과 고독과기도는 개인적 자산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과 돌보아야하는 이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머튼은 아우 슈비츠, 히로시마, 베트남 등의 실상이 사실은 자신의 깊은 곳에도 도사리고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먼저 내 안의 파시즘을 척결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머튼은 수도자들이 세상에 대한 경멸의 외투 아래 복음이 명령하는 요청을 거절하고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수도자로서 가진 소명은 세상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세상을 경멸하여 등을 돌리는 것도 아니었다. 수도자의 임무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포장한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이는 관상의 본질에 속한다.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것은 관상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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