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스크랩]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의 영성

뚜르(Tours) 2010. 4. 25. 15:21

 

침묵의 소중함


- 토마스머튼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때 /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 내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때 / 바로 침묵은 양선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 판단치 않고 마음속 깊이 변호해 줄 때 /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때 /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때도 /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신앙(믿음)입니다.. /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 주님의 현존에 있기위해 세상소리와 소음을 피할때 /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때 /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 "왜"하고 묻지않고 / 십자가를 포옹 할때 /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저는 모르옵니다./ 제 앞에 놓여있는 길을 도무지 알지 못하옵니다./ 그 길이 어디에서 끝나는 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또 저 자신을 진실로 알지 못하고,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갈망이 사실상 당신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러한 갈망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그러한 갈망을 저버리는 일은 그 무엇도 제가 하지 않기를 염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하면 당신께서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끄실 것임을 저는 압니다.당신의 이끄심에 대해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제가 비록 길을 잃은 듯이 보이고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하더라도 저는 언제나 당신을 믿을 것입니다.당신께서는 늘 저와함께 계실 터이므로, 그리고 당신은 제가 온갖 위험을 홀로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니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 토마스 머튼의 < 고독  속의 명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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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 Stars of the Millennium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트라피스트 수도사의  ‘침묵'과  ‘ 칠층산  

 


Thomas Merton, 1915 - 1968

 
 
영성신학의 대가이자 트라피스트 수도사인 토마스 머튼. 1948년 출간된 자서전인 베스트셀러 「칠층산」으로도 유명한 그는 시인의 열정으로 삶을 사랑한 인물로 인간의 고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왔던 인물이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전과 후로 명백히 나뉘는데 그 시점은 스물여섯살 때 켄터키주에 있는 트라피스트 겟세마네 수도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는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내면적 위기와 외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심도 깊은 자기 성찰과 영적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영국의 작가이자 예술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영혼과 사상에 사로잡혔던 그는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토마스 머튼은 방대한 영혼과 시적인 저술로 유명한데 그 저술들은 대중들에게 영성을 제시해주었다.

그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계에서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게 한 영적인 대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달라이라마와 교분을 찾는 등 동양의 불교계에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Merton and the Dalai Lama (달라이라마와 함께)

 

토머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남쪽 프라데 지방에서 태어나 무명화가였던 영국태생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석학으로서 성공회 세례를 받은 신자였었다. 그러나 대학시절에는 2차대적의 불씨를 안은 불안한 시대적 상황 안에서 당시 젊은이들이 겪어야 했던 회의와 좌절에 빠져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다.

(詩)를 쓰고 재즈에 열광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내밀한 변화를 겪으며 1938년 전격적인 회두를 하였다. 1940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여 1968년 감전사고로 죽을 때까지 45편에 달하는 작품을 저술했다. 『칠층산』은 그의 자서전적인 대표작품이다.

시를 쓰고 사랑과 재즈에 열광하던 머튼은 우여곡절 끝에 일생을 침묵과 노동으로 사는 수도자로 획기적인 변신을 했다. 문학적인 재능, 박사학위, 시인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 대학교수의 직위를 모두 던져버리고 켄터키 주의 황야로 잠적했다.

그는 그곳에서 거친 수도복에 단식재로 허리띠를 조이며, 밭에서 옥수수를 베어 들이는 소박한 노동과 기도의 생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만족감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침묵과 고행 속에서 완전한 은둔을 갈망했으나 하느님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셨다.  


 


 

그는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또 교파를 초월한 사람으로서 그가 하나님을 향해 걸은 독특한 길을 통해 성자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평화와 인권수호를 위한 행동가로도 불리는 그는 기도와 관상의 생활을 계속했으며 한번도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신은 그의 삶을 때로는 곡선으로, 때로는 직선으로 걷게 했지만 결국 20세기 마지막 영적인 지도자로서 추앙 받기에 이르렀다.

만약 켄터키주의 트라피스트 겟세마네 수도원에 여행을 갈 기회가 있다면 그의 무덤을 방문하고 그가 하나님을 찬양했던 교회당에서 기도도 해보며 그가 사랑했던 숲을 마음껏 걸어보기를 바란다.

 

www.kttown.ca/Portal/ sub_religion/witness_03.html

 

 


 

칠층산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느님은 우리를 아셨다. 하느님은 우리 중의 어떤 이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반하리라는 것, 그리고 어떤 이는 사랑할 줄 아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절대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하느님은 어떤 이의 개종 때문에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하느님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분의 사랑을 찬미하기 위하여, 어느 날엔가는 우리 모두를 이곳 게쎄마니로 데리고 오시리라는 것을 아셨다. 이 수도원에 살고 있는 각자의 삶은 신비의 부분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훨씬 초월하는 어떤 것에 첨가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깨달을 수가 없다. 다만 신학용어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라는 것, 그리고 만물이 그분을 위해 창조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의미로 우리는 항상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긴 여행이다. 다른 의미로 우리는 이미 도착하였다. 우리는 현세에서 하느님께 완전히 소유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암흑 중에 여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은총에 의해서 하느님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빛 속에 도착하여 그 안에 살고 있다.

 

지은이 : 토마스 머튼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남부 프라데 지방에서 태어남.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38년 가톨릭에서 세례받음.

1941년 미국 게쎄마니 트라피스트 수도회 입회.

1949년 5월 26일 사제서품,

1968년 12월 10일 선종.

1948년 『칠층산』 출판 이후 20년 동안 45편의 작품 발표.

펴낸곳: 바오로딸

 

 

http://sols.co.kr/dm1004.htm?mode=viewbody&code=life10&page=1&number=49&keyfield=&key=&PHPSESS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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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만남

- 주옥 같은 침묵 속에 묵상들 -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영성 저술가 토마스 머튼기도들과 그림들을 통해 그의 경건하고 관상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저명한 저술가요 행동가였던 트라피스트 수도승의 삶에서 포착된 고요한 직관적 깨달음의 정수를 모아놓은 이 책에서 평생토록 영적 삶을 탐색한 이 탐험가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머튼이 하느님과 나눈 감동적인 대화들을 그의 일기,편지,시, 저서등에서 발췌해서

그림과 함께 엮은 이 책은 우리에게 완벽한 동반자이며 동시에 훌륭한 선물이 될 것이다.

 

 

"Let there always be quiet, dark churches in which people can
take refuge....Houses of God filled with his silent presence. There,
even when they do not know how to pray, at least they
can be still and breathe easily. ------------(New Seeds of Contemplation)

 


 


(겟쎄마니 수도원)

 

 

 

우리 시대에 영성 모델을 제시하는 수도승의 고독한 행보(行步)

우리는 어디인가를 향해 가고 있다. 아침 출근 시간대의 전철역 풍경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혹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쪽 에스컬러이터를 뛰어가는 이들의 모습이 넘어질 듯 위태롭다. 그들의 고독한 뒷모습에서 자화상을 발견하곤 문득 아찔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뇌리를 스치는 외줄기 질문 앞에 멈춰보는, 휴지(休止)의 순간이다. 향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추구와 모색, 현재의 시점을 되짚어 보는 성찰의 시간이 먹고살기에도 분주한 우리에게 단지 장식품이나 사치일까?

운동과 정지, 기도와 활동, 수도원과 세상, 현재와 미래라는 양 주춧돌의 사이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실재적인 관상을 살았던 수도승 토마스 머튼이 있다.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발견하는 순간 그것을 부정하는 탄력성을 지녔던 머튼을 현대인의 영성적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머튼이 수도생활의 침묵 속에서 고독이 주는 깊은 평화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독이 세상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 하느님과 근원적인 맺었던 친교에 기인한다.


 


 

그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둥근 원처럼 순환하기에 시작에서 종점으로 이어지고, 종점은 곧 시작의 처음이 된다. 머튼은 시작이며 마침인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 안에서 자신 안에 내재한 하느님을 다시 찾아가는 수 없는 여정을 떠났다.

그는 이미 선종했으나 또 다른 의미에서 머튼은 우리들 곁에 현존한다.

이 책에 실린 기도들은 출판되었거나 출판되지 않은 머튼의 저서에서 모은 400여 편의 기도문들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한 것이다. 침묵 속에 대화하는 가운데 쓰여지고 그려진 그의 작품은 머튼의 관상이 남긴 자취들로 그의 갈망의 일부를 드러낸다.

 

 

미국 한 가운데 있는 숲 속의 수도원에 닻을 내리고

본문의 기도를 그림과 함께 묵상하고 음미하기 위해서는 머튼에 관한 사전적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엔 마튼이 쓴 자전적 소설 『칠층산』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사로 하느님 안에 자신을 감금시키기 까지 젊은 영혼의 방황과 좌절을 극복해가는 도정이 주는 감동은 책장을 덮은 뒤에 오히려 오래도록 각인된다.

그의 양친은 뉴질랜드와 미국의 국적을 가진 화가로 그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의 프라드다. 화가였던 양친에게서 물려받은 자유분방한 기질과 예술적 감성과 혼이 그를 불태웠고 또한 그는 사랑했다.


 


토마스 머튼의 어릴적 모습

 

첨예한 비판적 정신과 시인의 열정을 지니고 책, 여자, 사상, 예술, 재즈, 독주, 담배, 논쟁, 자기의견을 들려주길 좋아했다. 그런 그가 스물 셋에 가톨릭의 신자로 세례를 받고 스물 여섯에 트라피스트 수도승이 되기를 선택한 결단은 주변의 친구들을 경악케 했다고 한다.

 

무엇이 그의 영혼을 관통했을까?

머튼은 1941년 12월10일 켄터키 주의 한 시골에 있는 게쎄마니 수도원에 도착한 이후 자신이 머물렀던 수도원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세상을 떠나기 전 무질서했던 청춘을 수도원의 울타리 밖에 남겨놓고 게쎄마니에서 자신의 내면의 여정을 시작했다.

 


게쎄마니 수도원의 모습

 

맨해턴의 빌딩 숲 사이에서 한때 행복했던 세상의 흥미로운 일들로부터 몸을 숨기고, 검소하고 규칙적인 수도원의 일정에 따라 일과를 수행하며 기도하고 침묵 속에 내면의 여정을 일관되게 걸어갔다.

1940년부터 1960년대까지 30년 동안 폭풍처럼 몰아치던 정치적, 이념적, 사회적 사건들에 저술활동으로 참여했다. 이런 외적 환경과 자신의 개인적 풍랑 속을 걸어가면서도 마지막 순간 까지 전통적인 수도자로서의 길을 확고하게 유지했다.

 

 


Merton at Cambridge

 

게쎄마니에서 27년 동안의 오랜 정주생활이 머튼의 유목민적 기질을 쉽게 길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착된 수도원 생활이 그의 저술과 가르침과 미술 그리기 등 작품 활동에 몰두하게 하는 큰 요인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정주생활에서 그는 성찰과 기도로 당대의 역사와 함께 전개되어 맞물려 무르익어 가는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몰두할 수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관심사들에 대해 쓴 시, 일기, 편지, 저서 등의 활동이 이를 고백하고 증거하고 있다.

 

 


Thomas Merton as Master of the Scholastics

 

 

현재에의 응시, 포착

나무들은 당신을 알지 못하면서도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참나리들과 수레국화들은 당신의 현존을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먹빛 구를들은, 자기가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즐겁게 노는 아이들처럼, 당신에 대한 명상에 잠겨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 갑니다 (본문에서)

머튼이 타고난 문학적 감수성은 풍부했다. 그로 인해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단조로운 수도생활에도 불구하고 수도삶에 각별한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나날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나 기온의 아주 사소한 변화에서 시인으로서의 응집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모를 각별한 기쁨이 있었기에 머튼은 자기가 영위하는 삶을 사랑하고 자기가 있어야 할 참된 거처를 찾아낸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수도생활은 그에게 시간에 따라 같은 대상이 여러 가지로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보는 예리한 능력, 곧 깨어있는 감수성을 길러 주었다. 수도원 정주생활과 수도원의 봉쇄 환경은 고정된 관념이나 관점에 머물기 보다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타고난 성향을 한층 예리하게 다듬어 주었다.

 


게쎄마니 수도원의 일상

 

기도하면서 일하고, 일하며 기도했던 수도생활 속에서 머튼은 하느님께 가는 자신의 고유한 길을 점차적으로 발견해갔다. 그 비결의 일부가 현재의 포착 혹은 현재에의 응시이다.

머튼은 현재 속에서 영원을 발견했다. 자신의 손바닥 안에 놓인 영원을 들여다 보았고 이를 온 몸으로 즐겨 맞아들였다. 미래의 비젼이나 이상을 위한 디딤돌인 도구로서의 현재가 아닌 영원의 일부인 현재를 생생히 살아내었다. 본문에 실린 기도의 산실은 머튼이 살았던 당시의 오늘, 이 자리, 현재인 것이다.

 

 

그의 예술적 감성이 갖는 여성성

인용된 삽화에서 시선을 끄는 여성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머튼은 성모 마리아상을 비롯하여 각기 다른 표정을 지닌 여성을 그렸다. 여성에 관한 새로운 담론이 비교적 자유롭게 거론되는 당대에야 그다지 신선하지 않지만, 남성의 부속물로 간주했던 보수적인 여성관이 팽배했던 당대를 생각해보면 그의 진보적면 면을 볼 수 있다.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라도 그에겐 여성이라는 존재는 그리움의 대상인 하느님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떨어져 나온 존재이기에 하느님을 열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라면 하느님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아우른 대상이 아닌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머튼의 하느님에의 갈망은 출생의 순간에 거세된 여성성에 대한 그리움을 예술로 구체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여성은 또 다른 하느님의 얼굴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침묵, 고독, 어둠, 밤

현재 안에서 하느님에의 추구와 문학을 접목시켜 낭만주의적 경향과 열망의 일치점을 발견해 낸 그의 전면적인 영성을 한 마디로 얘기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해하는 바란, 소통의 도구인 언어가 지닌 한계로 인해 그의 진면목의 일부, 극히 사소한 한 갈래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때때로 말은 왜곡되며 반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어로 소통할 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으나, 그에 대한 대응책인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읽어 가노라면 일관된 특징 하나 정도는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머튼의 자전적 소설인 『칠층산』과 『가장 완전한 기도』『고독 속의 명상』『선과 맹금』『명상의 씨』외에 그의 저서에서 내용의 기저를 이루는 구심점을 독자 편에서 자신의 표현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큰 행운을 잡는 셈이다. 독자에게 육화된, 자신의 시선으로 포착해 낸 까닭에 쉽게 도망치지 않을 선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언급한다면 머튼에게 침묵과 밤, 어둠과 고독은 다른 단어이지만 동일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침묵, 밤, 어둠, 고독을 피상적으로 보면 수용하기가 꺼려지는 부정적인 코드를 띠고 있으나 하느님 안에서 사물을 발견하고, 사물 안에 깃든 하느님과 자신을 발견했기에 그가 긍정과 부정의 양가성이 지닌 모순을 뛰어넘었음을 알게 된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가는 움직임을 감지해내고, 하느님의 작품인 자신과 사물 속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읽어내는 독해력으로 머튼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던져졌다는 것은 떠나온 곳이 있음에서 전제되기에 그에겐 돌아갈 근원이 있다는 말이 되는 까닭이다.

하느님과의 분리됨을 인식할 때 엄습해오는 심연의 불안을 견디어 내고, 그 어둠 속에 침잠할 때 그 속에서 자신을 비추고 있는 희미한 빛을 머튼은 서서히 발견해갔다. 그는 애써 입술의 기도를 드리기보다 온 몸을 덮은 어둠 속에 잠겨 서서히 걷어내는 희미한 빛의 움직임에 주목하여 인도되길 원했다. 사물과 동행할 줄도 알았고 애써 사물로부터 거리감을 갖을 줄도 알았다. 머튼에게 침묵과 고독, 어둠과 밤은 농담(濃淡)이 다른 동일한 빛깔이다.


 


Thomas Merton Grave (묘)

 

집으로 가는 길

기도와 그림으로 엮여진 책갈피마다에서 존재의 시원을 묻고, 찾기 위해 떠나는 수도승 머튼의 음성을 듣고 만난다. 설명이 생략된 필선의 그림과 단순한 글 속에 녹아든 머튼의 영성에 맛 들이는 기쁨을 안겨주는 책을 대하는 기쁨이 크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으나 머튼의 영성에 끌리게 된다면 독자만의 소통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머튼이 그랬던 것처럼, 명확하지 않은 어둡고 불안한 여정을 걷다보면 거기에도 거처하시는 하느님을 뵙는 섬광처럼 찾아올 때의 희열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 누가 아는가. 머튼과 함께 집을 찾아 집으로 가는 길 우리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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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Merton by Edward Rice
 


 

 

When he painted the portrait of his friend Merton standing near the Abbey of Gethsemani in Kentucky, Ed Rice deliberately blanked out Tom's face. He confessed to being confused. Over the years, the scholars, the followers, publishers, the church itself, had drawn a portrait that was unrecognizable, that of a plastic saint, a monk interested mainly in pulling nonbelievers, and believers in other faiths, into the one true religion. This was not the Merton that his friends from younger days and later days, Jim Knight and Ed Rice, knew. Merton was eminently human. He honored, and reached out to other faiths. He loved, he laughed. In essence he was a poet, who used words to help us understand the thousands of things we need to understand. This is his portrait, as recalled by his very close friends.

 
 

토마스 머튼의 오랜 친구들은 말한다.

 

“그는 인간적이며, 잘 웃고, 진지한 학자이자 고뇌하는 수도승이었다. 또한 그는 시인이며 진정한 신앙에 봉헌하였으나 우리는 그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아마 우리는 그를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에드워드 라이스는 이 말에 따라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Music : Velvet Tear Chip Davis
/ Mannheim Steamroller

출처 : 세계를 읽어주는 나뭇잎숨결
글쓴이 : 나뭇잎숨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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