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수산(요한 크리소스토모)씨는 순교자 이성례(마리아, 1800~1840)가 순교의 피를 뿌린 서울 용산 당고개성지에 다녀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린 것들 넷을 밥 빌러 다니는 거지 고아로 남겨두고 순교한 게 옳은 것일까? 내게는 늘 의문이자 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자신은 물론 아이들 모두 하느님께 부탁하고 형장으로 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해박해 순교자 이성례.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의 두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이자 성인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부인이다. 한국 어머니들이 그렇듯, 그 역시 이름 석자가 아니라 누구누구의 어머니와 부인으로 기억된다. 피눈물로 얼룩진 순교의 삶도 남편과 아들 행적 속에서 언뜻언뜻 비칠 따름이다.
이성례는 충청도 홍성 사람이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집안 출신으로, 신심 깊은 최경환과 혼인한 뒤 신앙생활을 하기에 더 적합한 서울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박해 속에서 천주님을 모시기 위해 강원도와 경기도 부평으로 전전했다.
머리에 보따리 이고, 배 고프다고 칭얼대는 자식들 손을 잡고 이리저리 떠도는 남부여대(男負女戴)의 고단한 삶이었다. 그는 산 속에서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과 피로로 기진맥진한 것을 본 게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고난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고통은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모범과 어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구해 받는 것이다(「기해일기」)"라고 말했다.
고단한 남부여대의 피난생활
최양업 신부는 당시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행한 가르침을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주셨다."(「최양업 신부 서한」 173쪽)
이성례는 세상의 덧없음과 후세의 영원함에 대해 자주 말했다. 내세사상이 강했기에 그 궁핍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 순교자 이성례는 박해를 피해 경기도 안양 수리산 뒤뜸이로 들어가 남편을 정성으로 공양하고 열심히 수계했다고 「기해일기」는 전한다. 그림은 뒤뜸이 교우촌에서 기도를 바치는 이성례 일가족.
그 고난은 1838년께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 뒤뜸이로 들어가 교우촌을 일구면서 잠시 멈춘다. 그는 남편과 함께 수리산공소를 일궜다. 비록 협소하고 궁벽한 곳이었지만 곡식을 가꿀 수 있었기에 교우들이 모여 들어 담배농사를 지었다.
기해일기는 "남편을 정성으로 공양하고 열심히 수계하였다. 40일 봉재(封齋, 사순절의 옛말) 때면 재를 지키면서 남긴 식량과 돈을 모았다가 남편과 의논한 뒤 가난한 교우에게 주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기해년(1839) 대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서 포졸들이 내려와 공소를 급습했다. 남편 최경환은 이 날을 기다리기라도 한듯 포졸들에게 "아직 동이 트지 않았으니 식사를 해서 기운을 돋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이성례는 포졸들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가 끝나자 최경환은 오랏줄에 묶여 서울로 압송됐다. 이성례도 젖먹이를 포함해 아이들 5명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갔다. 남녀 교우 30여명이 그 뒤를 따랐다.
"곤장에도 용맹했으나 모정에는…."
최양업 신부의 3째 동생 최우정(바시리오)의 장남 최상종(빈첸시오)이 1939년에 기록한 할머니 이성례의 순교 과정은 이렇다.
포장(鋪裝)은 남편과 함께 붙잡혀 온 이성례를 다그쳤다.
"너는 여인으로서 흉악한 남편 인도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 뉘우치면 용서할 것이다."
"죄인은 남편의 인도를 받습니다. 본래 천주는 만유(萬有)의 대군대부이시니, 충심으로 공경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목숨은 바칠지언정 진주(眞主)는 배반하지 못하겠나이다."
이성례는 몸이 헤어질 정도로 매를 맞았다. 수십 명은 겁이 나서 매 한 대를 맞기도 전에 배교한다고 말하고 풀려났지만, 그는 수개월 동안 문초를 받으면서도 배교를 거부했다. 남편은 이미 장렬하게 순교했다.
그의 마음을 흔든 것은 체포될 때 업고 들어간 젖먹이에 대한 모정이었다. 굶주림과 고문 탓에 젖이 나오지 않자 젖먹이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큰아들 양업은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상태이고, 그 밑으로 의정(14)ㆍ선정(9)ㆍ우정(7)ㆍ신정(5) 등 어린 자식들은 고아 아닌 고아가 돼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어머니로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배교한다"고 말하고 풀려났다.
최양업은 훗날 어머니 순교 행적 가운데 배교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덩어리와 핏덩어리가 더럽게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성례는 큰아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형조로 압송됐다. 그는 그곳에 갇혀 있는 용감한 신자들의 격려에 힘을 얻어 배교를 취소했다. 배교를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젖먹이 막내아들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터였다.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 자청
둘째 아들 의정(야고보)은 옥사장이 눈을 감아줘 감옥에 가끔 드나들었다. 구걸한 돈으로 음식을 장만해 어머니께 갖다 드렸는데 이마저도 관노의 자식들이 중간에서 가로챘다.
이성례는 철 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없이 외롭게 버려질 것을 생각하자 육정에 다시 몸을 떨어야 했다. 아이들은 감옥에 찾아와 "어머니, 어머니"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그는 또 다시 모정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야고보를 불러 타일렀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절대 잊지 말아라. 하느님 계명을 잘 지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거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최양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 서울 용산 당고개성지. 이성례는 배교를 거부하고 이곳에서 모성과 신성이 하나된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머니한테서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야보고는 옥에서 눈물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성례는 마음이 흔들릴까봐 아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거지나 다름 없는 4형제는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떡을 망나니에게 내밀며 부탁했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주세요."
어린 자식들의 눈물겨운 부탁에 망나니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성례는 1840년 1월 31일, 나이 39살에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된 4형제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먼 발치서 바라보았다.
그의 순교는 실로 초인적이다. 끊을 수 없는 모정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 열절한 순교혼은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2코린 4, 18)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한수산씨는 융합적 사고로 그의 순교를 평가한다.
"그에게 모성(母性)과 신성(神性)은 서로 부딪히는 게 아니라 완벽한 하나였다."
[평화신문, 제938호(2007. 09. 23),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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