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성찰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하지 않았다

뚜르(Tours) 2010. 5. 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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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하지 않았다

 

영원처럼 흐르는 강물이 있다. 그것은 깊으면서도 흐름은 거세다. 거기에 한 여인이, 양 호주머니에 돌들을 집어 넣은 여인이 서있다. 짧게 그녀는 강물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녀는 강물 속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물이 배에서 가슴께로 차츰 올라간다. 이윽고 목까지 차올라 온다. 마침내 그녀는 깊은 물속에 삼켜지고 그녀의 몸뚱어리는 거꾸러 넘어진다. 신발은 한 발짝씩 벗겨져 제 멋대로 떠내려 간다. 손가락에는 유난히 하얗게 반짝이는 결혼반지가 끼여 있다. 그리고 여인의 몸뚱어리는 아래로 가라 앉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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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살한 여인이 버지니아 울프이다. 때는 1941년 3월이었고 장소는 그녀의 시골 집이 있던 서섹스 마을의 오즈강이었다. 그때 버지니아는 그녀의 마지막 작품 '세월'을 수년동안 교정작업을 거친 후 탈고한 뒤였다. 그 "세월"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만족과 절망사이를 오가던 그녀는 '다시 환청이 들려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그리고 버지니아는 그녀의 남편 레너드에게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칠 수 없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동안 김세린은 버지니아 울프의 인생을 좀 거만하다고 느꼈다.

 

버지니아는 자신에게 청혼한 남편에게 두가지를 요구하였다. 하나는 그녀에게 섹스를 요구하지 말 것과 다른 하나는 버지니아 자신을 후원하기 위해 공적인 일을 그만두라는 요구였다.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작년 경 나는 그녀가 정말 웃긴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리 잘난 지성파 여성이라 하여도 남편에게 섹스를 차단하기를 요구하다니, 저 여자 버지니아는 웃기는군 싶었다. 또한 그녀가 남편의 공직을 그만두라고 요구한 것도 참으로 '같잖게' 보였다. 남자에게 있어 '일'은 여자만큼이나 중요 할 진대, 공적인 일을 말리고 자신만을 돌보아 달라고 요구하는 저 여자의 심사를 나는 '꼬아 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건 버지니아 울프의 요구 뿐만이 아니었다. 그 부당하게 보이는 막무가내 요구를 고분고분 들어 주는 그이의 남편 레너드 울프의 처사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남자에게는 너무나 중요해 보이는 '욕정'과 '일'을 포기하게끔 요구하는 여자의 청을 들어 주며 그녀와 결혼을 한 것이다. 상식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가 어려웠는데... 나는 그 이상한 부부에게 관심도 크게 없어서 그 이유를 묻지도 알아 보지도 않고 그저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는 웃기는 여자더구먼.,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남자의 희생을 강요했군' 뭐 이런 결론을 내린 후 나는 울프에게 관심이 더 생기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버지니아를 상당히 좋아 한다.

한국에서는 버지니아 울프는 상당히 인기가 있는 여성 지식인같이 보였다. 우리가 옛날에 들었던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詩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 때 김세린은 '그렇군 버지니아는 역시 센티멘탈리즘 한국詩, 가요에도 자주 등장하는구먼' 하며 울프에게 여전히 관심이 가지 않았었다.

 

                  

 

그렇긴 하여도 나는 몇 개의 울프의 주옥같은 글구를 알고 있다. '여자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하나의 자신만의 방이 필요하다' 혹은 '사랑은 병이며, 광기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혹은 '외국어를 배우면서 가장 먼저 잃는 것은 유머이다', '세상의 여자들에게는 조국은 없다'는 칼 마르크스를 본 딴 페미니즘적인 표현등. 이렇게 버지니아 울프는 나에게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정작 관심은 없었던 그런 여성이었다.

 

2년여 전에는 나는 또 하나 '별난' 사실을 알았다, 그녀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였다는 사실을. 즉 레스비언이었다. 남편 레너드도 그 사실을 알았고 묵인하였다. 그 때 김세린은 '그렇군, 버지니아 당신은 웃기는 짓만 골라서 하는군' 하며 꼬아 보았다. 그리고 그 때도 여전히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를 사랑하여 몇 년전에는 그이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또다시 그녀를 애도 하였다. 그녀의 자살을! 세상의 흐름에 실려 가느라  나 또한 그 영화를 보았다. 제목은 <The Hours>. 이 영화에서 버지니아는 흐르는 강물도 쳐다 보다가 죽은 새도 쳐다 보다가 남편 말도 안듣고 밥도 안먹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는 어느 날 그녀는 '당신의 인생을 더 괴롭힐 수 없어요'하며 자살해 버린다. 그 때 상식적인 나는 또다시 버지니아의 '같잖은' 행위에 혀를 내둘렀다. 헌신적인 사랑을 배신하는 버지니아라는 여성을 이해하기 싫었다. '헌신을 배반한다'는 그런 인간을 나는 너그럽게 봐주지 않는다. 사랑보다 헌신은 더 값진 가치일지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 <The Hours>에서 버지니아는 미화 되었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나는 울프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여성이 얼마나 지식인인지, 어떤 사상가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관심권에 아직도 그녀는 들어오지 못했다.

 

근데 한 사흘전에 나는 어찌어찌 하다가 버지니아의 유서 '전문全文'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가 고백되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 유서 안에는 한 여성의 고통어린 과거가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이 가한 요구가 얼마나 '같잖은'지도 알고 있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그리고 그녀가 왜 그런 얼토당토 않은 요구를 하는 여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해명도 있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 눕고 말았습니다>.

 

그랬다, 버지니아는 여설살 때부터 의붓 오바로부터 성추행을 당해 왔던 것이다. 여자로서 그 고통이 얼마나 기막혔을까 충분히 이해가 되는 아픈 '진실'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그래서 버지니아는 '성에 관련 된 일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참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작가는 예민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 있는 지성파 여성이었으니 그녀의 예민함은 보통 정도를 훨씬 넘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런 성추행을 여섯 살 때부터 당하였다니...끔찍한 큰 불행이다. 거기에다 몇 년 후에는 어머니가 죽고 사랑하고 의지하던 언니마저 죽어 의지 가지 없던 그 소녀에게 이번에는 둘째 의붓 오빠가 성추행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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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인으로서 버지니아 울프의 '별난 행동거지'를 못 마땅하게 보았던 김세린은 여기 이 대목들에서 나는 참 미안 하였다, 그녀 버지니아에게. 울프에게 이토록 쓰라린 어린 시절이 있었을 줄 나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버지니아가 여섯 살 때부터 의붓 오빠들에게 성추행을 당하여 그녀가 성과 육체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수긍이 된다. 그렇구나, 그런일이 있었구나, 나는 가슴이 아렸다. 1941년 3월 흐르는 강물 위에 육신과 영혼을 던져 버리던 여인, 버지니아 울프...그녀는 너무도 '서러운 그 과거'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였구나...나는 가슴이 아렸다...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은 의사에 의하면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규정된다. 그러나 김세린이 이제 간파한 바로는 그녀는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그것도 사회악에 의한 '사회적 타살'로 규정된다.

 

여섯 살 그 어린 나이에 성추행을 당한 이 어린 여자애는 그 행위의 혐오감메 의하여 마음의 병 '우울증'을 얻는다. 게다가 한 명도 아니고 또 한명의 의붓오빠로부터 계속 성추행을 당한다. 이 여자애의 우울과 마음의 상처는 깊어간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그러나 그 우울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그녀를 괴롭힌다.

 

그렇게 '괴로웠던' 처녀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로서 남성에게 성적 욕구도 못 느끼고 남성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하는 레너드에게 별 '같잖은' 요구를 하는 것이다. 이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버지니아를 가질 수 없으므로 레너드는 그 무리한 요구를 받아 들였을 것이다. 왜냐면 레너드는 버지니아를 사랑했으니까.

 

이제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늙어 가도 어린 시절 얻었던 마음의 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수시로 그녀는 우울증으로 마음 밑바닥까지 하강 한다. 남편의 사랑이 그녀를 지켜 주어도 마음의 병은 그녀를 괴롭히고, 환청은 수시로 악마의 유혹처럼 生은 우울하다고, 가치없다고 속삭인다. 60이 넘고 그녀의 작품이 마무리 되고, 버지니아는 더 이상 그녀의 남편의 삶을 계속 파괴시킬 수 없다고 느낀다. 버지니아는 그에게 유서를 쓴다, 부끄럽고 끔찍한 과거를 고백한다. 자신의 마음의 병이 그 어린 여섯 살의 성추행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성추행이 없는, 성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물에서 생을 마감한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마지막 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유서' 고백에서 알게 되는 사실은 버지니아 울프가 '우울증'으로 자살하였으며 그 병은 어린 시절 그녀가 당한 '성추행'으로부터 기인하며, 그 병은 어른이 되고 인생의 좋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 조차 아물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자살로 이끌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은  진짜로 본인이 선택한 자살이 아니다.

성추행이라는 사회악이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사회악에 의해 타살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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