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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156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의 곤자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신심 깊은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기로 결심하였다.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산 상속의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회에 들어간다. 1591년 로마에 전염병이 번졌을 때 환자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다가 자신도 전염되어 24살의 나이에 신학생 신분으로 선종하였다.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제1독서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 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 을 것이다.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세 13,2.5-18)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6.12-14) 오늘의 묵상 혼자 사시던 시어머님이 큰 병이 드셨습니다. 온통 마음이 혼란해집니다. 아들 이 여럿 있지만 하나 둘 저마다 핑게를 대며 어머니를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굳이 막내며느리인 자신이 맡아서 어머니 병 수발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항변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어리고, 성당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기에 자신은 시어머님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그런 데도 자꾸만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제는 형제들이 야속해지고 그동안 시어머 님에게 받은 상처들도 떠오릅니다. 아들들을 저렇게 잘못 키우셨으니, 그것은 시어머님이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라며 이제 원망을 시어머님에게 돌립니다. 그동안 해 오셨던 잘못을 생각하면 저 정도 고통은 당하셔야 한다며 자신의 정당성을 시어머님 탓으로 돌립니다. 남편도 아내의 이런 주장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늙은 부모들이 어쩌면 자식들의 이런 모습 속에 혼자서 고통 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가운데 서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좁은 문 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운명처럼 져야 할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일을 말합 니다. 성지 순례 때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탄생 성당'에 가면 아주 낮고 좁은 문 이 있습니다. 그곳 안내원은 그 문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에 그 문의 영성적인 의미를 붙여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작아져야 들어갈 수 있는,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그문 을 통과해야만 성당 안의 '예수님 탄생', 그곳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멸망의 문은 넓고 편하지만, 생명의 문은 좁고 그 길 이 비좁아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어떤 길을 지금 걷고 있는지요? (매일미사에서 전재) ------------------------------------------------------------------- 연어처럼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되돌아봅니다. 때로는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닐까 두려워 연어가 되고 싶습니다. 연어가 회귀하듯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까닭일까요. 분분한 헛된 마음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 불 하나 켭니다. 불빛이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가 있어 행복합니다」中에서 오늘의 기도 "천상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알로이시오의 생애에서 놀라운 순결과 참회의 정신을 결합시키셨으니, 그의 공덕과 전구를 굽어보시고, 저희가 그의 순결은 따르지 못하여도 그의 참회만은 충실히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11.06.21. Martin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