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노래도 세상을 뜨는구나

뚜르(Tours) 2012. 2. 1. 20:44

TV를 켰는데 마침 음악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면, 요즘 한창 상종가인 서바이벌 오디션이 방영되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꽃미남 아이돌 스타나 하의실종 패션 걸 그룹의 새된 목소리와 현란한 율동이 화면을 채울 수도 있고요. 대중문화의 대표적 장르인 가요도 세태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일 테니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음악의 흐름이 한 곳으로 치우치다보니 화려한 기교나 현란한 비주얼보다 질료의 본바탕과 진정성에 도달하려는 움직임이 무대 안팎에 일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음악에 어떻게 점수를 매기나?", "가창력이 노래의 전부인 것처럼 오도한다"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가수(나는 가수다)’ 같은 경연 프로그램도 노래의 본령에 다가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물론 시청률을 고려한 방송사 측의 전략적 기획의도가 작용했겠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지난 해 추석 무렵 전파를 탄 ’세시봉 친구들’은 걸 그룹ㆍ아이돌이 장악한 가요시장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스토리텔링과 순수에 대한 열정이 잊혀져가는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을 뿐더러 그보다 노래 자체의 서정성이 감탄을 자아낸 때문일 것입니다. 소박한 통기타에 실린 갓 세수한 듯한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가 빚어내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아이돌 가수의 댄싱과 기계음의 믹싱에 식상한 대중들의 마음속 현을 건드린 것이라고나 할까요.

   세대를 망라해 신드롬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세시봉 복고 열풍이 얼마나 지속될까를 생각해봅니다. 이들에 대한 예상 밖 호응과 지지 열기가 오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스피드와 크로스 오버, 통섭의 시대입니다. 섹시 코드를 앞세운 율동과 하이브리드 이종교배, 3D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웅장한 볼거리가 득세하는 세상이기도 하죠. 오래된 서랍장을 열어보고 그 속에 담긴 소중한 물건들을 펼쳐보며 얼마간 추억에 잠길 수는 있겠지만 그렇잖아도 빛바랜 내용물들은 햇볕에 노출되면 머지않아 시들기 마련이거든요.

   얼마 전 자유칼럼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한국일보 임철순 주필이 펴낸 칼럼집 <노래도 늙는 구나>는 만만치 않은 두께의 책이지만 읽기에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노래도 늙는다는’ 카피는 책 이름이자 칼럼 제목인데 ’산울림’의 김창완이 한 말을 빌려온 것입니다. 좋은 노래가 유행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짐을 설워하는 것이죠. 세월이 흐르며 어쩔 수 없이 무뎌지는 감성을 안타까워하며 자신과 주변을 위로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흐르며 음악도 바뀌기 마련이죠. 그것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대중음악의 여러 병폐적 현상(선정적인 몸짓 위주의 공연, 지나친 립싱크와 더블링, 낯 뜨거운 노골적 가사, 정체가 불분명한 랩….)이 혼란스럽고 못내 아쉽습니다. ’노래도 늙는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는 필자에겐 엄혹한 독재시절을 견뎌내도록 위로해 준 한 편의 시가 떠오르는군요. ’노래도 세상을 뜨는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을 금할 길 없습니다.

   ’갈대숲을 이륙한 흰 새떼들이 /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 일열 이열 삼열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김창식의  <에트바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