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정말’을 안 쓰면 정말로 얘기를 못하는 정말 이상한 세상

뚜르(Tours) 2012. 6. 27. 08:46

“자기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고 말고.”

 “정말?”

 “그럼, 정말이지. 정말 사랑해.”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지 ‘정말’ 사랑한다는 건 뭘까.
오르가슴을 가장하듯이 사랑도 가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냥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걸까.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의 문제라면 두 사람의 문제로 끝날 일이지만 그 사랑이 사회적 문제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저는 우리 지역구 유권자 여러분을 정말 사랑합니다.”

 때가 되면 나타나 지저귀는 철새처럼 선거철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정치꾼들의 사랑 타령을 듣고 있으면 ‘정말’이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정말 사랑한다고 말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라면
정치인과 유권자의 관계는 허위에 기반한 가식의 관계라는 뜻 아닌가.
사랑이고 뭐고 사실은 관심도 없지만 일단 말이라도 그렇게 해야 득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공적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을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정말 빨간 옷을 입고 정말 바람둥이처럼 노래를 부르셨는데 이번에는 정말 진지한 남자의 모습으로 노래를 하셨어요.
어느 쪽이 정말 손호영씨의 모습에 가까운 거예요?”
“정말 미소천사세요.
정말 항상 웃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말을 해보면 그 목소리가 정말 진한 저음을 갖고 있어요.
지난 시간에는 정말 조금 불안정한 음정이 보였다고 한다면 오늘은 정말 멋졌어요.”

 케이블 채널 tvN에서 생방송으로 방영되는 ‘오페라 스타’에서 사회자와 심사위원, 출연자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정말’이라는 말이 없으면 정말 얘기가 안 되는 정말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끝마다 정말이 습관처럼 끼어들고 있다.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하면서 측근 비리에 대한 소회를 밝히면서 “정말 가슴이 꽉 막힌다”고 했다.
그냥 가슴이 막힌다고 하면 국민이 안 믿어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청와대까지 세간의 어법에 오염됐기 때문일까.

 정말만 문제인 게 아니다.
너무, 되게, 굉장히, 아주 같은 부사도 넘쳐난다.
시속(時俗)을 반영하는 거울이 언어라고 한다면 이미 우리는 정상적인 말로는 뜻을 전달하기 어려운 과잉 언어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신뢰가 사라진 허위의 시대 말이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 가슴이 막히면 가슴이 막힌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정말 사랑한다고, 정말 가슴이 막힌다고 해서 더 사랑하는 것도, 더 가슴이 막히는 것도 아니다.
거짓의 의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가 가장 강력한 언어다.

배명복 /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