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시’ ’분’ 전성시대

뚜르(Tours) 2012. 7. 7. 08:17

 

"7500원이시구요. 호출기 울리시면 건너편으로 오세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듣는 말이지만 실은 틀린 말이다.
가격은 7500원이지, 7500원이’시’지 않다.
호출기도 울리는 거지, 울리’시’는 게 아니다.


요즘 우리 언어는 쓸데없는 ’시’로 도배가 되고 있다.
"호출기 울리’신’다"는 말이 듣기 거북하고 장난기도 발동해
"호출하면 내가 오실게요"라고 받으면 주문을 받던 젊은 아르바이트생은 빙긋 웃는다.
그런데 그 웃음이 내 말의 진의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님은 금방 확인된다.
"음료 나오시는 대로 호출해 드리겠습니다."
이쯤 되면 잠자코 ’위대한 음료’가 몸소 나오’시’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 정도는 보통이다.
더 터무니없고 섬뜩하기까지 한 ’시’의 오용(誤用) 사례는 넘쳐난다.
최근까지 케이블 TV에서 여러 차례 반복 방송된 한 보험회사 광고는 "벌금이 나오셨다구요?"라는 말로 시작된다.
운전자가 과태료를 부과받게 되면 그 과태료를 보험료로 물어주겠다는 걸 광고하기 위한 것이지만
벌금 부과를 받으’신’ 고객이 아닌 벌금 자체에까지 무조건 존대를 하고 본다.
그래야 마음이 편한 모양이다.


’시’는 행위하는 사람을 존대하는 ’주체 존대’에 쓰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나 음료, 심지어 벌금을 높여 표현하는 데 써서는 안 된다는 문법 강의를 하려는 게 아니다.
헷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정도가 좀 심하다.
왜 그렇게 심하게, 사회 전체가 헷갈리고 있을까.


’시’에 못지않게 ’분’도 전성시대다.
"고객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하 직원분이 왔었는데…"
"부인분은 이해하시나요?"
굳이 문법적으로 따지자면 의존명사인 ’분’도 ’어떤 분’ ’그분’처럼 꾸미는 말 다음에 쓰는 것이지
명사 다음에 갖다 붙여 쓰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마구 ’분’을 갖다 붙이고, 아무 데나 ’시’를 붙여 존대하는 사회가 상대방을 진짜로 존중하는 사회일 수 없다.


이처럼 과도하게 존대하는 사회에서 역설적이게도 욕도 역사상 가장 많이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교총이 중·고생 각 2명에게 소형 녹음기를 지참시켜 주고받는 대화를 녹음한 결과 1명당 평균 75초에 한 번꼴로 1시간에 49회의 욕설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욕 불감증’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 정도 횟수로 욕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 없이 ’시’ ’분’을 갖다 붙이는 것과 똑같이 욕도 아무 생각 없이 한다.


학생들뿐 아니다.
젊은 층에 인기있는 ’나꼼수’ 같은 팟캐스트 방송은 마치 욕 경연대회를 벌이는 것 같다.
’졸라’ ’조낸’ 같은 말이 심한 성적(性的)인 욕설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습관처럼 쓴다.
"벌금이 나오셨다"는 식의 마구잡이 존대를 하다가 돌아서면 마구 욕설을 퍼붓는 ’극(極)과 극’의 언어생활이다.


최근 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은 한 탈북자에게 "대한민국 국회의원에게 개기냐"고 했다.
이런 언어 사용은 탈북이 변절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이념성 이전의 문제다.
무조건 존대하고, 습관처럼 욕하고, 상대방이 어떤 상처를 받을지 아랑곳 않는 언어가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천박한 언어는 천박한 사고(思考)에서 나온다.

 

 


김덕한 조선일보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