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에는 결혼 청첩장, 환갑 초대장, 그리고 불안해 하면서도 아직 답장 못한 편지들이 있다.
나는 힘에 겹게 친교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칵테일 파티에서 안면이 좀 있는 사람이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나에게 소개한다.
"미스..."하고 머뭇거리면, 그 여자는 눈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하면서 "김이에요" 하고 웃는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나하고 조금 이야기하다가 다른 사람을 알은체하러 가 버린다.
나는 뉴욕 미술관에서 수백이 넘는 그림을 하루에 본 일이 있다.
그런데 지금 회상할 수 있는 그림은 하나도 없다.
그중에 몇폭만을 오래오래 감상하였더라면 그것들은 내 기억 속에 귀한 재산으로 남았을 것을.........
애석한 일이다.
이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전문 분야의 책만 해도 바로 억압을 느낄 지경이요,
참고 문헌만 보아도 곧 숨이 막힐 것 같다.
수많은 명저(名著), 거기다가 다달이 쏟아져 나오는 시시한 책들, 그리고 잡지와 신문이 홍수같이 밀려온다.
책들의 이름과 저자를 많이 아는 것만을 뽐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문과 학생들에게 고전만 읽으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그 고전이 너무 많다.
이대로 내려가면 고전에 파묻힐 것이다.
영문학사를 강의하다가 내가 읽지 못한 책들을 읽은 듯이 이야기할 때는 무슨 죄를 짓는 것 같다.
그리고 읽어야 될 책을 못 읽어, 늘 빚에 쪼들리는 사람과 같다.
사서 삼경四書三經이나 읽고 《두시언해》나 들여다보며, 학자님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시대가 그립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후손이 삼십억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들 하나하나를 돌보아주실 수 없게 되었다.
하나하나를 끔찍이 생각하고 거두어 주시기에는 우리의 수가 너무 많다.
피천득 교수의 수필집 <인연因緣>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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