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회색인의 멸종

뚜르(Tours) 2012. 12. 3. 06:46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던 국민교육헌장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내서 그런지 허례허식(虛禮虛飾)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편이다.
어디 그런 사람이 나뿐일까.
일제 억압과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앞만 보고 달린 기성세대 대부분이 그러리라 믿는다. 어릴 때 들은 옛이야기 중에 새우젓 장수로 나선 몰락한 양반의 일화가 있었다.
굶주리다 못해 새우젓 통을 지고 거리에 나서기는 했지만 “새우젓 사려!” 소리가 도대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마침 저 앞에 굴비 장수가 가고 있었다.
얼른 뒤쫓아갔다.
굴비 장수가 “굴비 사려!”라고 외치면 몰락한 양반은 모기 소리만 하게 “새우젓도”라고 입을 떼었단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거나 물만 먹고도 이 쑤신다는 속담도 모두 쓸데없는 가식을 비판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가 급한 대로 배운 개헤엄으로라도 열심히 허우적거리지 않았다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덕분에 이제는 멋진 크롤이나 배영도 구사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 조상들이 모두 허례허식에 젖어 있던 것도 아니다.
발가벗겨 놓아도 개성상인은 십 리를 거뜬히 뛰고, 수원 깍쟁이는 무려 팔십 리를 달린다고 했던가.
치열한 상혼(商魂)과 실용주의로 무장한 조상님들도 분명히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요즘 들어 ‘양반 새우젓 장수’의 답답하고 꽉 막힌 체면치레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지막 생계수단인데도 결연하게 입장을 바꾸지 못해 주저하고, 망설이고, 말조차 어눌한 그런 태도가 귀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결인지 한국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개성상인, 수원 깍쟁이가 되어 벌거벗고 달리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편 갈라 양쪽으로 달리니, 중간에서 옷이라도 걸치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회색인’들은 어느 편에게든 치이고 밟혀 죽어간다.
막무가내인 데다 그악스럽고 몰염치한 극단주의 앞에 중간지대는 없다.
자기 편 논리만 앵무새처럼 되뇌면서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다짐하는 말이 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거다’
‘남을 속이려면 먼저 나 자신부터 속여라’.
체면이고 규칙이고 싹 무시하고 달리자는 얘기다.


한신대 철학과 윤평중 교수는 과도한 자기 확신과 상대에 대한 증오가 일상화된 오늘의 세태를 ‘진리 정치(politics of truth)’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정치행위 자체를 진리의 실현으로 보는 탓에 자기만 진리이고 상대는 허위라고 본다는 것이다(본지 7월 21일자 8면).
윤 교수는 또 “우리 사회에는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분열의 DNA 같은 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울한 얘기지만 분열된 두 세력 사이에 중도파가 설 땅이 없는 것이 전통이라는 진단은 설득력이 있다.
가령 조선 인조 때의 유명한 원종추숭(元宗追崇) 논쟁을 보자.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 칭호를 주는 일)하고자 했다.
조정 대신들은 된다, 안 된다 두 패로 갈려 맹렬하게 싸웠다.
배경에는 왕권과 신권(臣權) 간 힘겨루기가 깔려 있었다.
이 논쟁에서 조선의 4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대유학자 장유(張維)는 “정원군을 종묘에 모실 수는 없지만 따로 사묘(私廟)에 모실 수는 있다”는 절충론을 폈다.
결과는?
추숭 찬성파·반대파 양쪽의 거센 공격에 시달리기만 했다(이경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그래서 나는 초보 새우젓 장수의 우유부단하고 순진한 체면치레가 그립다.
‘허례허식’에 들어 있는 두 ‘허(虛)’자가 점점 소중하게 느껴진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자기 주장만으로 꽉꽉 채워 도대체 절충할 여지가 없는 지금의 분열상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양쪽 말에 다 귀 기울이고, 염치와 절차를 소중히 여기는 중간지대 회색인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대로 간다면 절망이다.
회색인들은 머지않아 멸종되고 말 것이 분명하다.


노재현 /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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