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레이놀즈라는 작가가 쓰고 그림까지 그린 『점(The Dot)』이란 책이 있다. 본래 아이들 보라고 만든 아동서지만 오히려 어른이 읽어야 더 소용 있는 책이다. 내용은 이렇다. 베티라는 아이는 미술시간에 아무것도 그리질 못했다. 뭘 그려야 할지, 어떻게 그려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미술시간이 끝나가지만 아무것도 그리질 못한 베티를 보고 선생님이 다가와 빙그레 웃으며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며 기다렸다. 그러자 베티는 자기는 안 된다는 체념의 뜻에서인지 쥐고 있던 연필을 거칠게 도화지 위에 내리 꽂았다. 그러곤 선생님께 점 하나 찍힌 도화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시 베티에게 도화지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네 이름을 쓰렴.”
# 일주일이 지났다. 베티는 선생님 방에 걸린 액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액자 안에 든 것은 점 하나 찍고 베티라는 이름을 적었던 바로 그 도화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본 베티는 자기도 모르게 “저것보다 훨씬 멋진 점을 그릴 수 있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 후 베티는 연필만이 아니라 물감까지 써가며 온갖 색깔의 점들을 다양한 크기로 그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큰 도화지의 가장자리부터 둥글게 칠해 가운데에 하얀 여백이 남아 커다란 점이 되게 만들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학교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베티가 그린 크고 작은 다양한 색깔의 점 그림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베티는 졸지에 교내 스타가 됐다. 베티보다 더 나이 어린 후배가 찾아와 어떻게 하면 자기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베티는 그 동생에게 도화지를 내주고 뭐든 그려 보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연필을 쥐고 낑낑거리더니 도화지를 베티에게 돌려줬다. 그 도화지 위에는 삐뚤삐뚤한 선만 가로로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던 베티가 다시 도화지를 어린 후배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 그렇다. 누구에게나 숨은 잠재력이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잠재력을 깨우는 데는 조급함이 아니라 기다림이 필요하다. 또 꾸짖음이 아니라 격려가 절실하다. 그리고 그 잠재력은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때 비로소 발동이 걸린다. 그것은 누군가의 존재 의미를 호출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잠재력이 있고 가능성의 금광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기다리고 격려하며 믿어주고 호명할 때 비로소 사람은 자기 안의 잠재력을 펼치고 가능성의 금광에서 노다지를 캐낼 수 있다.
# 태어날 때부터 후두부 두개골이 없어 뇌의 90%가 밖으로 흘러나와 수술을 해도 말하고 듣고 보는 것은 물론 생존 가능성마저 없다며 의사 스스로 포기를 권했던 이가 2013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개막식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올해 21세이지만 티없이 맑고 앳돼 보이는 박모세씨가 애국가 부르는 것을 듣고 또 보면서 포기해 버려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결코 포기하고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어떤 상태, 그 어떤 조건일지라도 사람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다.
# 지적발달장애인들이 펼치는 2013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가 ‘베티’다. 그들 역시 도화지에 점 하나 찍고 줄 하나 긋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조차도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와 선생님은 기다려줬다. 그리고 격려해줬다. 마침내 그 아이가 점 하나 찍고 삐뚤삐뚤한 줄 하나 긋자 거기에 자기 이름을 적게 만들었다. 이제 그들은 자기 이름을 불러주고 환호하는 이들 앞에 섰다. 그들은 경기의 승패와 관계없이 이미 이겼다. 그들의 승패는 진작에 났던 것! 그들이 점 하나 찍는 그 순간, 줄 하나 긋는 그 순간에 그들은 이미 이긴 것이다.
정진홍 /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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