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찬호와 세리가 미국으로 간 까닭은?

뚜르(Tours) 2013. 3. 8. 23:13

한국에서 가장 신성불가침의 마력을 지닌 단어가 무엇일까?
’민족’ 혹은 ’민족주의’라는 단어가 아닐까?
민족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선’이요. 우리에게 있어서 어쩌면 궁극의 목적이기까지 한 단어다.
사실 한국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들추어보면 민족이라는 말이 이처럼 신성불가침의 얼굴을 하게된 까닭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IMF를 ’자본종속’ 운운으로 해석하는 민족적 울분에서 그 뒤에 숨어 있는 허탈과 두려움,
그리고 부끄러움의 콤프렉스를 읽는다.
분노는 수치심과 연결된, 감정이라던가?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미리 펄펄 뛰는 것이 분노라면, 우리의 민족주의적 구호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들의 부끄러움도 점점 더 짙은 색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민족주의, 그 속을 뒤집어 보자.
우리 시대 저층에 깔려 있는 폐쇠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정서가 오늘 이 사회에 공헌한 것은 무엇인가?
척화비의 주인공 대원군이 승리했는가?
해방을 우리 손으로 만들었는가?
남북을 이어놓았는가?
전쟁을 막았는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가?
투명하고 건강한 경제구조를 만들어놓았는가?
무엇하나 바꾸어본 일도 없고 올바른 예측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 민족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귀 막고, 눈을 가린 채 ’우리끼리 만세’를 부르면서 미래 사회를 운운해도 되는 것일까?
정말 우리들은 도도하게 변하며 흐르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바뀐 것이 무엇이 있는가?

정치인들은 선거 벽보에 붙어 그 앞을 오가는 우리들을 여전히 비웃고 있다.
그들의 개인적 성취감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주민등록증을 내보이고
화장지보다 조금 빳빳한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소로 들어가 한 표를 던지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인가?
선거 참가는 민주주의 권리행사라는 알량한 입발림보다는 차라리 그건 바로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방법, 바로 권력과 힘에 대한 복종과 예의라고 솔직히 고백이라도 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이 땅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은 한통속이 되어, 민족주의 속에 마련된 기득권과 권위의 달콤한 꿀을 나누어 먹고 있다.
정치인들, 당연히 그들은 믿지 말라, 그들은 본질적으로 유전자가 왜곡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아무런 혀 물림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요괴 인간들이다.

기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진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청국장처럼 냄새가 풀풀나는 현장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없이 채팅하듯 기사를 뱉어내는 고급 룸펜들이다.
권력의 해바라기들이 되어 있는 편집 데스크의 심중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만들어낸 원고들을 기사랍시고 만들어낸다.

학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가면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방충이들이다.
그들이 논문에 써대고, 강의실에서 뱉어내는 말들은 아무 곳에서도 써먹을 수 없는 그들만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끼리 끼리 만나서 자리를 나누고, 적당히 등록금과 세금을 연구비나 학술보조비 따위로 나누어 먹으며 히히덕거리지만 돌아서기가 무섭게 서로를 물고 뜯고 비방하는 저열한 인간들이다.

정치인, 기자, 학자들처럼 민족과 민주주의를 열심히 외치는 집단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찾아낸 우리들의 대안이 찬호와 세리, 그리고 릭 윤이지만, 이것이 해답이 될까?

찬호의 스트라이크와 세리의 버디 퍼팅, 릭 윤의 미소에 일희, 일비하면서 손에 땀을 쥐어야
비로소 한국인인가?
그것이 나의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들의 개인적 선택에 대해 왜 우리가 ’애국적’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이 사실은 돈 때문에 나간 것이 아니고 국위선양을 위해서라고 자위를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등한 대리만족 때문일까?

21세기 미래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유목민 시대의 한복판에 서있다.
정보와 돈과 문화적 가치는 이제 한가하게 국경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뚫고 지구 어디로든지 치닫고 있다.
유목민들이 풀을 ?아 양때를 몰았듯이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담보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야 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런 지금, 한가하게 그들을 향해 박수를 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정치적 우울과 경제적 실연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3S(sports, sex, screen)의 구호품을 받아 정신적 삶의 한끼를 때워야 할 정도로 우리가 가치 없는 존재들일까?

나는 나로 살고 싶다.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10대는 문화적 고아들이다.
한국이라는 문화적 공간속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한국 싫어’을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서구의 자식이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들의 20대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세대들이다.
시대를 예측하지 못했던 지식인들의 피난처인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세월을 죽인 결과는 졸업장과 동시에 수여된 실업 면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나이 제한에 걸려 입사 원서조차 쓰지 못하게 생겼다.

30대는 1회용 반창고다.
어설픈 지식을 다 써먹는 5년 후쯤이면 미국, 유럽, 일본에서 밀려들어온 실력자들에게 밀려날 신세들이다.
이미 이들은 물 좋은 카페에서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미련을 갖고 있다.
그래봐야 후회의 시간이 조금 늦어질 뿐이다.

지금의 40대는 이미 용도 폐기를 언도 받았다.
뛸 만한 힘도 없고 감각도 없다.
그렇다고 권위도 없다.
이들의 곁에는 정력이 최고조에 달한 마누라와 한창 등록금과 용돈을 퍼주어야 할 아이들이 펄펄 뛰고 있다.

그옆에는 엉거주춤한 50대가 있다.
어차피 이제 운명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임을 경험으로, 직감으로 알아버린 이들의 마음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눈치나 보면서 연명하는 것이 최고다.

이에 비해 나름의 퇴직금이라도 건진 60대는 노여워해 볼 수도 있다.
’괘씸한 것들’ 하면서 차라리 행복한 분노다.

70대를 포함한 그 이상의 세대들은 가뜩이나 졸린 눈을 더욱 껌벅거린다.
"도대체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볼때,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화적 폐쇠성에 있었다.
그것이 우월의식에서 비롯되었건, 자격지심에서 비롯되었건 간에, 결과적으로 우리들 삶을 망가뜨리고, 새로운 미래를 담보할 수 없게 만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원군이 닫았던 문은 결국 포연과 함께 깨졌다.
이제 범세계화 시대(Global Age)로 들어서고 있는 오늘, 우리가 다시 폐쇄적 민족주의로 해답을 적어낸다면, ? 장의 개량 한복과 김치 ? 포기는 더 팔 수 있을지 몰라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헤어나기 힘든 함정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21세기의 열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다.
한번 탈락하면 다시는 올라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개방이 없으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죽어버리고 만다.
영국이 영어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겨주고 만 이유 역시 거만한 우월의식과 폐쇄성 때문이었다.

이제는 문화적 공존을 위한 자세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
이미 지났는지도 모른다.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폐쇄적 ’민족적 아이덴티티’는 그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더 우리를 불행하게 할지 모른다.
오히려 열린 마음과 유연한 태도로 나의 문을 열고 타인의 문화와 공존할 수 있을 때, ’우리 것’이 나름의 생존 공간을 얻게 될 것이다.


 

김경일 지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