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여유’, ’행복’이 부재하는 한국형 성공 내러티브

뚜르(Tours) 2013. 9. 13. 11:17

"참새가 새입니까?"라고 물으면 모두 쉽게 대답한다.
"예"
반면에 "오리가 새입니까?"라고 물으면 한 박자 주춤하게 된다.
"타조가 새입니까?"라고 물으면 좀 더 시간이 걸린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오리나 타조를 새라고 대답하기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퇴화한 날개에 관한 논리적 추론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전형성typicality"효과라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에 관해서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전형성이 존재한다.

다음과 같은 외국 정치가에 대한 설명이 각각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추측해 보자.

가) 부패한 정치인과 결탁한 적이 있으며 점성술로 결정을 내리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매일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9~10병의 마티니를 마셨다.

나) 회사에서 두 번 ?겨난 적이 있으며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때 마약을 복용했고
매일 한 번씩 위스키 1/4병을 마셨다.

다) 전쟁 영웅으로 채식만 하고 담배도 안 피고 필요할 때만 맥주를 조금 마실 뿐이다.
불륜한 적도 없고 죽을 때까지 단 한명의 애인만 사귀었다.

조금 받아들이기 껄끄럽겠지만 (가)는 루즈벨트, (나)는 처칠, (다)는 히틀러의 순서이다.
루즈벨트나 처칠의 음주 습관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생활 태도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반면 히틀러 개인의 생활 습관은 거의 청교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루즈벨트와 처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반면 왠지 훌륭한 사람일 것 같았던 (다)의 주인공이 히틀러라고 할 때는 밥을 잘 먹다가 돌을 씹은 느낌이다.
위대한 정치가에 대한 사회적 전형성에 그야말로 ’느닷없이’ 히틀러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정치가는 술과 담배, 마약에 가까워서는 안된다.
성실과 근면은 기본이며 여자 문제 또한 알려진 바 없어야 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함’의 전형성에 어긋나면 많은 사람들이 상처 받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전형적인 서술 방식이 있다.
마치 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한 학생이
"과외는 한 적이 없고 잠은 충분히 잤으며 학교 공부에 충실했다"고 하는 것 처럼.
한국 사회에서의 ’성공 내러티브’ 또한 지극히 단순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사람들은 젊은 시절 엄청나게 고생한다.
대개는 부모가 일찍 죽거나 찢어지게 가난하여 혈혈단신으로 무작정 상경한다.
처음에는 의욕만 가지고 무모하게 달려들다가 몇 번의 처절한 실패를 맛본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사람이 돈을 떼먹고 도망간다.
좌절한 주인공은 자살을 생각하며 한강다리 주변을 기웃거린다.
그러다 죽을 용기로 한 번만 더 노력해보자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시도한다.
남은 것은 몸뚱이 뿐이다.
남 잠잘 때 안자고 근면과 성실로 일관한다.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일이 잘 풀려나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동분서주’ ’일취월장’ ’승승장구’ 하여 그 분야의 최고가 된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성공 내러티브’에서 벗어난 재벌 2세는 절대 성공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부동산 투자로 부자가 된 사람들 또한 성공한 사람의 부류에 포함되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야 하며 근면과 성실로 오직 일에만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유’ ’한가함’과 같은 단어는 ’성공 내러티브’에 절대로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에겐 일이 인생의 전부이며 한가하게 가족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
이들 대부분은 언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입지전적인 그들의 자수성가를 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왜 모두들 이러한 성공 시대형 ’성공 내러티브’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성공한 사람은 한결같이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자지 않으며
재미라고는 전혀 없는 성직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면
’성공 시대’의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포기하거나 나태한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공시대’형 성공의 대부분은 아주 우연적이다.
아주 적당한 시기에 더욱 적당한 기회가 우연히 주어졌을 뿐이다.
하루 4시간밖에 안자는 ’아침형 인간’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산 약수터에 새벽에 모이는 사람들이 모두 성공했어야 한다.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이들이 게을러서 성공하지못했다고 가슴에 못 박는다면 정말 이들을 ’두 번 죽이는’잔인한 짓이다.
이들에겐 그 우연한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기회는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형 ’성공 내러티브’는 모든 사람들을 ’’성공 중독’으로 몰아간다.
아내를 희생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할 일을 하면서 얻어지는 성공이 과연 진정한 성공일까?
평생 한 번도 쉬어보지 못하고 성공을 얻었다면 과연 성공 이후에는 쉴 수 있을까?
성공한 이후에도 제대로 쉴 수 없고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공인가?
’성공 중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성공 중독’은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김정운 지음 <노는 만큼 성공한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