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며 그냥 넘기기에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까발리기 증후군’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너도나도 ‘알 권리’와 ‘알려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떠들어대는 듯합니다.
근래 언론에서 ‘프라이카우프’란 ‘새로운’ 시사용어를 심심치 않게 접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생소하기만 한 단어였는데, 기사를 읽다 보니 독일어의 ‘freikaufen’이라는 단어를 원용한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테러 조직에 감금된 인질을 돈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것, 즉 ‘자유(frei)를 사들이는(kaufen)’이라는 뜻의 새로운 시사용어임을 알았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통일부장관이 “이산가족 해법 ‘프라이카우프’ 검토”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필자는 또다시 ‘까발리기 증후군’이 도졌구나 생각했습니다. 장관의 말인즉슨 북한에 머물고 있는 국군 포로, 납북자들을 프라이카우프 방식으로 데려오겠다며 동•서독의 예를 들어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처럼 장담했답니다. 이곳 이산가족은 솔깃해서 싫다 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나 정부 기관이 너무 ‘까발려서’ 일을 그르치면 안 될 텐데 하는 무거운 마음이 들면서 독일 ‘프라이카우프’의 한 실화가 떠오릅니다.
1965년 필자가 뮌헨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시절입니다. 어느 날 기숙사 분위기가 무겁게 술렁거렸습니다. 기숙사 동료 하나가 자기 고향, 동독 지역 라이프치히(Leipzig)에 사시는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는 소식 때문에 우리 모두는 마치 자기가 당한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복도에서 삼삼오오 모여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복 경찰 서너 명이 기숙사에 왔습니다. 그러고는 모든 학생을 소강당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다들 긴장한 마음으로 강당에 갔더니 경찰은 동료의 일을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독에서 붙잡혀 감금된 그 동료는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1960년에 서독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동독이 사전 여행허가 없이 서독방문 금지를 공표한 1955년 이후 동독을 나왔기 때문에 동독에서는 그를 공화국도피자 (Republikflchtling)’, 즉 국가 배신자로 간주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동독 정권에 의해 ‘적법’하게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다시 데려오려면 우리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우리가 협조해야 할 일이라니…? 경찰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동료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조용하지만 아주 강하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침묵하며 모른 체하는 것이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그를 위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을 뿐입니다. 그 어떤 다른 설명은 없었습 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그 친구의 행방은 당시 언론 매체에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 니다.
몇 달이 지나 그 친구의 일이 서서히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갈 때 그는 웃는 모습으로 다시 우리 곁에 나타났습니다. 그때 필자는 조용한 freikaufen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가 돌아와서도 우리는 일체 입을 다문 것을 기억합니다.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얼마만큼의 재정적 대가를 지불했는지는 짐작만 할 뿐 결코 정부 차원의 공식 발표는 없었습니다. 서독 정부가 ‘프라이카우프’를 위해 얼마만큼 지불 했다는 수치는 아마 통일 이후에 밝혀진 것으로 압니다. 즉 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안 되게끔 정부에서 ‘까발리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부정한 것도 파헤치지 말고, 덮어버리자는 것과는 아주 별개의 일입니다. 그런데 ‘까발리기’ 정서가 우리 생활권을 무차별적으로 파헤치기에 심히 걱정이 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명한 사회에서 ‘국민의 알 권리’라는 미명 아래 마구 ‘까발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습니다.
선진국 의과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에 ‘어려운 진단을 환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암과 같은 진단명을 의사가 환자에게 어떻게 설명하며 접근해야 환자가 받을 마음의 충격을 덜어주는가는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그런데도 근래 ‘환자도 알 권리가 있다’는 ‘까발리기 증후군’ 현상에 힘입어 거칠게 접근하는 동료 의사들의 행동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까발리기’는 결코 ‘투명 지향적’이지도 않고, 용기 있는 정직한 행동도 아니며, 그저 지켜보기 민망한 언행의 한 아류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가 저질 ‘까발리기 증후군’에서 얼른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낙의 <이런생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