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은 ‘자비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시고, 전선하시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가 되면 굳이 ‘자비’를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각자에게 속한 것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역시 굳이 자비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법적인 정의가 실현되고,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고, 상벌적인 정의가 실현된다고 해도 굳이 자비를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몸 닮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신분, 이념, 혈연, 계층, 학연, 지연, 국가’에 따른 불의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들도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한 자비가 드러나는 모습을 ‘산상설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 굶주린 이들, 슬퍼하는 이들, 고난 중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요청하시는 대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에서 ‘자비’를 역설하십니다. ‘돌아온 탕자, 잃어버린 양,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가난한 과부, 죄를 지은 여인’의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징벌과 심판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하셨고, 용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교회와 인류의 역사에서 ‘자비’는 몇 번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는 ‘마르틴 루터’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로 인간은 ‘의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기존의 교회는 인간은 진실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의화’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잘못된 삶을 살았을 때는 보속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자비에 대한 이해가 달랐고, 교회는 나눠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교회는 마르틴 루터의 ‘의화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표용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입니다. 마르크스는 교회가 이야기하는 자비는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가 이야기하는 자비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폭력에 의한 정의의 실현은 또 다른 폭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종교를 통해서 현실의 삶에 드리운 어두움을 벗어나고 있으며, 위로와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기득권에 안주하고, 하느님이 자비를 독점하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주지 않으면 또 다른 마르크스는 생겨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니체’입니다. 니체는 하느님의 나약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강력한 ‘군주’가 등장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는 동정과 자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강력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나치와 같은 우월주의를 잉태하였습니다. 세계는 커다란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습니다. 다른 민족과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과 아집을 가져왔습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의 토대가 된 것입니다.
네 번째는 ‘진화론적인 방법론’입니다. 진화론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화의 틀에서는 자비와 동정이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오직 생존과 번식이 삶의 이유와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자유주의와 손을 잡았고, 인류는 ‘이윤’이라는 절대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곳 역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함께하기 어렵습니다.
이 시대에 교황님은 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고 있을까요? 왜 ‘자비’의 새로운 국면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물질주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워낙 거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무관심이 생겨나고 있고, 이는 곧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복음화’로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들이 쌓아올린 물질의 바벨탑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50억년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지구별이 인류의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푸르름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희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들이 그 죄의 대가를 치루기 전에 그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도 소중하게 여기시지만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길을 찾기를 더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2016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미운 사람이 있다면,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곳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독일의 종교 화가이자 사제인 ‘지거 쾨더(Sieger Koeder)’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그림의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발 씻은 물에 비친 모습에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는 봉사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겸허한 봉사를 통해서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육화(강생)의 신비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와 손에서 가장 멀리 있는 부분인 발을 씻어주는 행위야말로 상대방의 가장 부족한 부분을 감싸는 행위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굴복의 자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습을 바로 더럽다고 여겨지는 발 씻은 물에서 그분의 모습을 찾아보게 되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바로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진정으로 찾을 수 있는 곳은 발 씻은 물에서였던 것처럼 구차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봉사의 삶에서 오히려 그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자비의 희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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