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기도

비 오는 날의 일기 / 이해인 수녀

뚜르(Tours) 2016. 2. 17. 09:30

 

 

 

비 오는 날의 일기

                                    /이해인 수녀

 

 

1

비 오는 날은

촛불을 밝히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습관적으로 내리면서도

습관적인 것을 거부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쓰고 싶던

사랑의 말도

부드럽고 영롱한 빗방울로

내 가슴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네

 

2

빨랫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 하나

사라지며 내게 속삭이네

 

혼자만의 기쁨

혼자만의 아픔은

소리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고

늘 잠잠히 있는 것이 제일 좋으니

건성으로 듣지 말고 명심하라고

떠나면서 일러주네

 

3

너무 목이 말라 죽어가던

우리의 산하

부스럼난 논바닥에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어떠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산에 들에

가슴에 꽂히는 비

 

얇디얇은 옷을 입어

부끄러워하는 단비

차갑지만 사랑스런 그 뺨에

입맞추고 싶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눈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 비, 고운 비

맑은 비가 되자

 

4

집도

몸도

마음도

물에 젖어 무겁다

 

무거울수록

힘든 삶

죽어서도 젖고 싶진 않다고

나의 뼈는

처음으로 외친다

 

함께 있을 땐

무심히 보아 넘긴

한 줄기 햇볕을

이토록 어여쁜 그리움으로

노래하게 될 줄이야

 

내 몸과 마음을

퉁퉁 붓게 한 물기를 빼고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뽀송뽀송 빛나는 마른 노래를

해 아래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