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꽃 진 자리 / 류인서

뚜르(Tours) 2024. 10. 9. 10:20

 

 

꽃 진 자리   / 류인서

 

꽃잎 지고 난 가을 뜨락에서

한 중심을 향해 둘러앉은 시간의 고분군을 만납니다

불붙어 싸우던 허공마다

깜깜하게 깊어진 그늘 하나씩 봉분처럼 돋아올라

가만가만 빛을 삼키며 침묵의 블랙홀로 가고 있네요

가벼이 날아오르고 싶은 바람홀씨들

기억 저 끝과 이 끝은 유물로 가라앉아 있을까요

벽화 속의 채운(彩雲) 하늘과

하늘을 기울여도 쏟아지지 않는 붉은 해

해의 동공에 사는 세발까마귀 눈뜨고, 웅얼웅얼

오음 음계 오랜 노랫소리 꽃물처럼 번져나와

바람 깨워 흔들며 내게로 스밉니다

그 노래를 배음으로 이울었다가 다시 부풀기도 하는

먼바다의 더 먼 별자리까지 궁상각치우, 익고 익어 따스합니다

- 류인서,『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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