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든 무 / 김승희
무, 내가 롯데마트에서 사 온 겨울무 두개,
산처럼 쌓인 무 더미에서 몸통이 단단하고 무청이 싱싱한 것으로
내가 고르고 골라 두개를 사 왔네,
'내가' 라는 말은 참 위험한 말
곱게 씻어서 가운데를 잘랐더니 바람 든 무
가슴에 거뭇거뭇 구멍이 숭숭 뚫린 무
내면의 조소(彫塑), 조각이나 소조,
바람의 악기 한 소절이 남아
무무 무무 무우무우 무무 무우무우
무영탑, 다보탑, 그런 돌탑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아니 지나가는 길손이 산길에서 돌 하나를 주위 와 탁 놓고 간
막 쌓은 막탑 같은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더 추운 것 같아, 이렇게 말하던 친구가
있었지, 이런 친구 저런 친구
말의 울림통이 막힌 지점에서
바람이 들어간 무를 보면서 생각하네
바람난 무 말고 바람 든 무
가슴속에 바람이 그린 무영탑, 다보탑, 또 여러 막탑의 형상,
조소, 조각이나 소조,
뒷면에 수은이 벗겨져서 반영이 일그러진 거울처럼
독일에 간호사로 갔던 친구와 집 안에 에스컬레이터까지 있다는
다른 친구 모두 지금은 소식이 끊겼지만
바람이 들어간 무 속에서 젊은 그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해
바람이 숭숭 지나가는 가슴을 안고 어떻게든 살아왔을지
바람의 악기 한 소절이 남아
무무 무무 무우무우 무무 무우무우
남몰래 가슴속에 돌탑을 가르며 바람 든 무 그렇게 살아왔겠지
-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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