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바람 든 무 / 김승희

뚜르(Tours) 2024. 11. 22. 10:17

 

 

바람 든 무  / 김승희

 

 

무, 내가 롯데마트에서 사 온 겨울무 두개,

산처럼 쌓인 무 더미에서 몸통이 단단하고 무청이 싱싱한 것으로

내가 고르고 골라 두개를 사 왔네,

'내가' 라는 말은 참 위험한 말

곱게 씻어서 가운데를 잘랐더니 바람 든 무

가슴에 거뭇거뭇 구멍이 숭숭 뚫린 무

내면의 조소(彫塑), 조각이나 소조,

바람의 악기 한 소절이 남아

무무 무무 무우무우 무무 무우무우

무영탑, 다보탑, 그런 돌탑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아니 지나가는 길손이 산길에서 돌 하나를 주위 와 탁 놓고 간

막 쌓은 막탑 같은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더 추운 것 같아, 이렇게 말하던 친구가

있었지, 이런 친구 저런 친구

말의 울림통이 막힌 지점에서

바람이 들어간 무를 보면서 생각하네

바람난 무 말고 바람 든 무

가슴속에 바람이 그린 무영탑, 다보탑, 또 여러 막탑의 형상,

조소, 조각이나 소조,

뒷면에 수은이 벗겨져서 반영이 일그러진 거울처럼

독일에 간호사로 갔던 친구와 집 안에 에스컬레이터까지 있다는

다른 친구 모두 지금은 소식이 끊겼지만

바람이 들어간 무 속에서 젊은 그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해

바람이 숭숭 지나가는 가슴을 안고 어떻게든 살아왔을지

바람의 악기 한 소절이 남아

무무 무무 무우무우 무무 무우무우

남몰래 가슴속에 돌탑을 가르며 바람 든 무 그렇게 살아왔겠지

-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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