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의 몽회록, 1777년 정약종 저
정약종이 지은 '이벽선생 몽회록'은 고전소설로 그 내용은 이벽과 정학술과의 대화체로 되어 있다. 천지가 혼미해진 가운데 서기가 비치더니 홀연히 옥안선풍의 선비인 이벽이 나타나 정학술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벽은 천상선인(天上仙人)으로 이 세상에 내려와 학술에게 △우주창조의 원리 △낙원추방과 예수의 구원 △유불도의 허망함 △조상제사와 우상숭배 △신유옥사와 진리의 승리 △하느님의 최후심판 등을 이야기해주고 천주밀험기(天主密驗記)를 전하고는 다시 승천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벽이 죽은 뒤 60년만에 다시 현세에 재현한다는 내용으로 이벽의 공덕과 그의 죽음이 작자에 의해 신성화되어 박해를 통한 신앙의 강화를 당부하는 주인공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이 소설은 초기 서학의 대표적 인물로 이벽이 중시되었음을 드러내는 중대한 실례이다
이벽 성교요지
이벽, 성교요지
성교요지
한국 천주교 창설에 공이 많았던 이벽(李檗)이 서구 천주교 교리를 한국적인 정서에 맞춰 읊은 장대한 사시(史詩)이다. 신약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죄와 구원의 의미, 복을 누리기 위한 신앙인의 자세, 믿음의 생활화 등 천주교의 참된 진리에 관한 내용으로 이뤄졌다. 이 서적은 《주교요지》와 더불어 한국 천주교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이며, 당시 우리 나라의 자발적인 천주교 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주교요지(Substance of Catholicism), 1797년 정약종 저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 편
1. 인심이 스스로 천주님 계신 줄을 아느니라.
2. 만물이 스스로 나지 못하느니라.
3. 만물이 저절로 되지 못하느니라.
4. 하늘이 움직여 돌아감을 보고 천주가 계신 줄을 알지니라.
5. 사람은 반드시 천주로 말미암아 생겼느니라.
6. 천주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7. 천주는 본디부터 계시고, 스스로 계시니라.
8. 천주는 시작이 없으시고, 마침이 없으시니라
9. 천주는 지극히 신령하시어, 그 형상이 없으시니라.
10. 천주께서는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니라.
11. 천주는 무궁히 능하시니라.
12. 천주는 온전히 아시느니라.
13. 천주는 무궁히 아름다우시고, 좋으시니라.
14. 천주는 세 위(位)이시고 한 체(體)이시니라.
15. 푸른 하늘이 천주가 아니니라.
16. 천지가 스스로 만물을 능히 내지 못하느니라.
17-27
28. 천주는 반드시 착한 이를 상주시고 악한 이를 벌주시니라.
29. 사람은 죽은 뒤에 영혼이 있어 상과 벌을 받느니라.
30. 영혼은 반드시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느니라.
31. 천주께서 천당과 지옥을 두사, 세상 사람의 선악을 시험하여 갚으시느니라.
32. 지옥은 천당과 맞은 짝이 되느니라.
33. 천주께서 엿새만에 천지 만물을 내시니라.
34. 세상이 본디 좋더니 사람의 처음 조상이 천주께 죄를 지으매, 좋던 세상이 괴로워지고, 착한 사람이 다 그릇되었느니라
(35-38)
39. 세상이 끝날 때에 천주 예수께서 다시 내려오시어 천하고금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느니라.
40. 천주께서 강생하신 의심을 밝힘이라
41-42
43. 사람이 천주교를 들으면, 즉시 믿어 받들어 행할지니라.
주교요지, 카톨릭대박물관
주교요지 필사본, 절두산
주교요지 판목, 절두산
정약종초상화, 숭실대
정약종(1760- 1801)
정약종은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학자로, 한글 교리서(敎理書)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해 조선 초기 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이다. 정약종은 조선 후기 조정의 천주교 금교령(禁敎令)을 어겨 숭고한 죽음을 맞은 순교자이다. 정약종은 경기도 양근(현재의 양평군)에서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정약전은 훗날 '자산어보'를 지었고, 그의 아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지은 실학자(實學者)로 유명하다.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뒤늦게 천주교에 입교했다. 성격이 곧고 탐구욕이 강한 정약종은 입교 후 여러 해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한문 서학서와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교리 연구에 몰두했다. 철저한 교리 연구가 있었기에 그는 부친이나 주위 사람들, 그리고 조정의 배교(背敎)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1791년 집안이 천주교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강 건너 마을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집안의 박해로 인한 이주였지만, 오히려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교우들을 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로 날이 새는 줄 몰랐다. 천주교에 대한 그의 박식함은 점점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약종은 1795년 한양에 온 청나라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직접 배운 후, 그 내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자주 토론을 펼쳤다. 이 무렵 주문모 신부는, 교리에 밝고 신자들의 존경을 받던 정약종을 전교 활동 조직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으로 선임했다. 정약종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주문모 신부 입국 당시 4000여 명이었던 교우가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1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 하층민 출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알기 쉬운 교리서의 필요성을 느낀 정약종은 명도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주교요지'를 저술했다. 두 권으로 된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는 한문의 혜택을 받지 못한 신자들에게 널리 읽혀졌으며, 초기 조선 교회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던 1801년 유생들의 천주교 배척 상소가 빗발치자, 결국 조정에서는 천주교 금교령을 내리고 신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정약종은 박해가 시작되자 하인을 시켜 집 안에 있던 천주교 서적과 일기 및 주문모 신부의 서한 등을 농짝에 넣고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운반 도중 포졸에게 발각돼 물품을 압수당하고 정약종도 그 해 2월 11일 체포되었다. 이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그는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특히 책롱 속에서 발견된 그의 일기 가운데 "나라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군주(君主)이며.."라는 글귀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심문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정약종은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밝혔다. 결국 정약종은 국가가 금하는 사교를 믿은 죄, 국왕에 대한 불경과 국가에 대한 모반죄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민중에게 천주교의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정약종의 당시 나이는 42 세였다.
정약종의 영세증서, 1790년 6월
류선님 영세증서
천주 성교 공과 일권 (필사본), 1864년, 앵베르(L.M.J.Imbert) 역
1862년 목판으로 인쇄되어 1869년 가톨릭 기도서가 나오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기도서로서 사용되던 책. 일반적으로 성교공과, 또는 공과로 불렸는데 공과란 광의로운 매일의 기도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주일과 축일 및 기타의 기도문을 수록한 기도서를 의미한다. 천주성교공과의 간행은 1862년이지만 번역은 조선교구 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로부터 시작된다. 그뒤 천주성교공과는 1963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과로 1969년 새로운 기도서인 '가톨릭 기도서'가 나올 때까지 수없이 재판되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으나 근본적으로는 큰 변화없이 100여 년 이상을 한국교회의 공식 기도로 사용되었다.
천주성교공과 필사본, 언양 신앙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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