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해일기 ◆ | ||
한자 | 己亥日記 | |
현석문(玄錫文)이 지은 1839년 기해년(己亥年) 박해 때의 순교자전(殉敎者傳).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곧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교 자신도 조만간에 체포될 것을 우려하여, 정하상(丁夏祥), 현석문 등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과연 주교는 그해 7월 5일에 잡히는 몸이 되었고, 9월 21일에는 모방(Mau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등 두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였으므로, 현석문은 주교의 뜻을 받들어, 관헌의 눈을 피해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순교자의 거룩한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3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기해일기》를 완성하였다. 그 후 한때 귀국한 김대건(金大建) 신부는 기해년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모아 이를 보충하였고, 페레올(Ferreol, 高) 주교도 입국하자마자 현석문과 함께 이 《기해일기》를 재검토하여 더욱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순교자의 자료를 열심히 모으던 중 우연히도 한글로 된 《긔해일긔》한 벌을 1904년 전후에 입수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과연 현석문이 지은 원본인지는 알 길이 없고, 더구나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던 탓으로 첫 장과 끝의 몇 장이 다 썩어 버려 알아 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 외에 다른 완전한 것을 얻을 수 없게 되자, 1905년에 이 책을 그대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246페이지에 달하는 큰 책으로 뮈텔 주교의 서문에 이어, 원문대로의 내용을 그래도 실렸는데, 총론과 순교자의 일기와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현석문이 조사한 순교자의 수는 사형으로 순교한자가 54명, 옥중에서 죽은 자가 60여명으로 도합 114명이 넘었으나, 그의 《기해일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들어 있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기해년에 순교한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 남자가 28명, 여자가 50명으로 그들은 거의 전부가 서울에서 치명(致命)한 것으로 되어있다. 《기해일기》에 올라 있는 78명의 순교자 중 1925년 7월 5일 복자위에 오른 순교자의 수가 69명에 이르고 있음으로 보아, 《기해일기》가 순교자의 사적을 기록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정확을 기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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