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 |
그런데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독신제는 성서 어긋나는 것 같아요. 성서 말씀을 보세요.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창세 1, 28)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
박신부 |
예,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인류 번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초대 인류와 조상이었던 아담에게 한 말씀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가톨릭에서 독신 제도를 인정한다고 해서 결코 결혼을 경멸한다든지 등한시하진 않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없는 결혼 성사를 통해서 결혼의 신성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송양! 성당에서 하는 결혼 성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
송양 |
전연 없습니다. |
박신부 |
밖의 미 신자들도 가톨릭 교회에서 하는 결혼 성사를 보고는 모두 결혼의 신성성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송양이 성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신약 성서에 독신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나머지 독신 생활을 권고하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파 사제들이 이혼 문제를 들고 나와서 예수님의 의견을 들으려고 했던 장면과 더불어 독신의 의미를 설파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예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 8-12) 이 말씀을 하나하나 분석해 봅시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첫째로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 이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성의 불구자로 태어난 고자를 뜻합니다. 둘째로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은 개인적으로 성의 불구자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여건 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셋째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결혼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마는 더 높은 하늘 나라를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을 받아들인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다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늘 나라를 위해서 아름다운 순결을 바칠 뜻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일종의 권고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독신 생활은 어디까지나 자유 선택의 문제입니다. |
송양 |
그런데 천주교 신부님들은 모두가 독신 생활을 하잖아요? |
박신부 |
그렇습니다. 가톨릭의 독신 생활은 복음 성서의 권고 말씀을 따라 교회에서 교회 법령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톨릭 신부들의 독신 생활의 교회법은 오늘이라도 얼마든지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송양 |
그렇다면 예컨대 로마의 교황님이 신부들의 독신 제도를 폐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
박신부 |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 교회법상에는 스스로가 독신을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성품 성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서 신부들의 독신 제도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우리 교회 안에서의 독신 생활 그 자체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볼 것 같으면 독신 생활의 고귀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린다면 초대 교회에서는 가톨릭의 성직자들도 결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일반 평신도들이 성서에서 말씀하신 독신의 고귀성을 깨닫고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사막으로 들어가서 독신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 자신을 깡그리 바치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은수자(隱修者)'라고 했으며 이들이 모여서 결국 가톨릭의 수도회(修道會)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독신이었고 그가 간택한 세자 요한도 독신이었으며 열두 제자 중에서 독신이었던 사도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신 것이라든지 또는 요한의 묵시록에서 볼 수 있는 독신자의 특은을 봅시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구출된 십 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닙니다.'(묵시 14, 3-4) 독신자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표시하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마태 19, 27) 이 고백을 보아서 그는 처음에는 결혼을 했던 사람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다음부터는 하늘 나라를 위해 부인과 별거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들입니다. 그가 부부 향락과 자녀들과의 가정의 단락을 누리면서 어찌 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까? 독신 생활은 인간 자연적인 욕망의 부정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긍정하기 위해 그것들을 버린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독신이었던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1고린 7, 8-9) 바오로의 말대로 독신이 더욱 좋지만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독신 생활의 근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나 처녀는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1고린 7, 32-34) 진정 하느님만을 위해 모든 생을 바치겠다는 성직자라면 예수님의 복음 정신에 철두철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양! 우리 한번 솔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두 성직자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한 사람은 부인과 다섯 아들을 가진 성직자요, 다른 하나는 오로지 하느님 사업만을 위해 사는 독신자라고 생각합시다. 주일 연보를 앞에 놓고 우선 처자가 있는 성직자는 그 돈으로 아들 미국 유학시킬 생각을 먼저 할 것이고 50평 짜리 맨션 아파트를 사고 싶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처자가 없는 독신 성직자는 그 돈으로 교회 신축, 복음화를 위한 자금, 불우 이웃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아 봅시다. 처자가 있는 서울 모모 큰 교회 목사님에게 저기 섬나라 거제도나 완도 교회로 가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같은 교직자로서 자기만은 꼭 서울 중심가의 부자 교회의 목사님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가톨릭의 성직자는 예컨대 서울 명동성당 주임 신부로 있다가 저기 산골 미리내 정당으로 가라면 아무런 반응없이 주님의 뜻을 따라 떠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주님의 진정한 복음 사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 정신보다 십일조에 눈이 어두운 목회자가 있다면 그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되겠습니 까? 예수님이 독신 제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성직자는 성품 성사를 받은 사제(司祭)들입니다. 개신교에는 '사제'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신부들을 목사님들처럼 생각하려고 합니다 구약 성서에 비친 사제들의 모습을 잠깐 봅시다. '거룩한 떡밖에 없소이다. 한데 장군의 부하들은 여인을 가까이한 일이 없는지요?'하고 묻자, 다윗이 대답하였다. '나는 이번 길을 떠날 즈음해서 며칠 동안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만은 절대로 깨끗합니다.' 그제야 사제는 거룩한 떡을 그에게 주었다.'(1사무 21, 4-6) 이와 같이 거룩한 빵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몸이 깨끗해야 했다면 더구나 제단에서 성제(聖祭)를 집행하는 성직자의 독신은 당연한 결론일 것입니다. |
송양 |
신부님 말씀에는 다 일리가 있긴 있는데요, 실제로 보면 가끔 여자 관계로 신부직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결과적으로 독신 제도가 주는 악한 평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
박신부 |
사실대로 말씀드려서 가톨릭 신부로 살다가 독신 생활에 자신을 잃고 환속하는 사제들도 있습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그 첫 공식 케이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
송양 |
신부가 환속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
박신부 |
현 교회법상으로는 공식적인 성직 생활을 할 수 없고 이런 경우에 교황청의 허락을 받으면 결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평신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
송양 |
이상 독신 제도에 대해서 말씀이 나왔으니 가톨릭의 수도 생활에 대해서도 좀 알고 싶어요. |
박신부 |
수도 생활의 기원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가톨릭 신자들이 초대 교회에서 더욱 완전한 자 되기 위해서, 더욱더 복음대로 살기 위해서, 예컨대 마태오 복음 19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을 따라 살아 보겠다는 데서 수도 생활이 출발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이런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더욱 완전한 자 되기 위해서 모여 사는 사람들이 곧 수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밖에서는 수도 생활의 참된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현실 도피주의자들' 또는 '염세주의자들' 또는 '사랑에 실패한 군상들'이라고도 합니다. 참된 수도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저는 저의 가슴에 타고 있는 값진 사랑을 잠시 지나가는 인간에게 바치고 싶지 않고 영원한 그분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에서는 수도자들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가치스러운 영원한 하늘 나라의 보화가 있다는 절대적인 가치를 생활을 통해서 증명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복음의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
송양 |
그런데 가톨릭에서 보면 메리놀파니 바오로파니, 또 무어라든가, 살레시오파니 하면서 많은 파가 있는 것 같아요. |
박신부 |
역시 가톨릭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씀이지요. 개신교에서 장로 교파니 침례 교파니 하면서 종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말씀입니다. 메리놀회니 가르멜회니 하는 것은 수도회의 이름들입니다. 가톨릭에는 여러 가지의 수도회가 있습니다. 사회 봉사의 성격에 따라 또는 복음화의 방법에 따라 그리고 수도원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다양한 수도회가 있습니다. 송양 그 많은 수도회를 다 알 수는 없을 것 같으니 근본적인 수도 정신이 무엇인지만 알고 싶습니다. 박신부 예. 금방 말씀드린 대로 교육 사업만을 하는 수도회, 사회 복지 사업, 또는 매스컴을 통한 복음과 사업 등등의 그 봉사 방법만 다를 뿐 수도회의 기본 정신은 다음 세 가지고 모두 공통됩니다. 즉 청빈, 정결, 순종입니다. 청빈 정신은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개인 소유권 없이 사는 생활, 즉 물질 속에 살지마는 물질을 초월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정결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 있는 독신 생활을 통한 전인격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생활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의 정신, 즉 하느님의 복음 정신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동시에 수도원 장상들에게 순종하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하느님의 어떠한 말씀에도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순종의 생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즉 수도 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싶으시면 '결혼 성소와 수도 성소'(가톨릭출판사 간)라는 책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끝으로 하나 참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프랑스 '테제'란 곳이 있어요. 거기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교회 일치의 광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놀란 것은 거기에는 거의 많은 기독교 종파들이 모여 있는데 개신교 청년들이 독신 생활을 하면서 수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