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스크랩] 가톨릭과개신교 - 8. 성서 해석 문제

뚜르(Tours) 2007. 7. 18. 12:25
가톨릭과개신교 - 8. 성서 해석 문제  
박신부 사실은 성서 문제가 맨 먼저 이야기되었어야 했을 텐데 순서가 뒤바뀐 기분입니다.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송양, 개신교의 성서가 모두 몇 권이나 되지요?
송양 신구약 다 합해서 66권입니다.
박신부 그런데 가톨릭은 73권의 성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송양 어마!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박신부 또 하나,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66권의 성서를 어디서 가지고 온 것입니까?
송양 그거야 따지고 올라가면 가톨릭에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신부 옳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첫 주인으로서 성서를 간직해 온 가톨릭은 73권이고 여기서 떨어져 나간 개신교에서는 66권이니 여기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다고 보아야 옳지 않겠습니까?
저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어찌하여 73권의 성서 중 7권은 버려 두고 66권만 가지고 나갔는지 말이에요.
송양 그건 전연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다 같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박신부 송양, 개신교에서 혹시 '성 베드로 복음'이니 '성 야고보 복음'이니 하는 성서 본 일이 있습니까?
송양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신부 옛날에는 그런 가짜 성서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를 보더라도 예수님이 직접 성서를 저술한 사실은 없고 처음부터 성서 목록이 만들어져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서 목록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우선 성서 목록 경로를 보기로 합시다.
금방 말씀드린대로 구약에서 내려오는 책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쓰여진 책들 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성서인지를 판명하여 성서 목록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크게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누구도 의심없이 처음부터 성서라고 인정이 되어 온 성전 중심에서 나타나는 책들을 모은 것이 소위 제1 경전(第一經典)이고, 제1 경전 목록이 생긴 다음 얼마 후에 다시 지방에 따라 의심스러웠던 책들이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성서로 밝혀진 성서를 제2 경전이라 해서 두 차례에 걸쳐 73권의 성서 목록이 완성된 것입니다.
신앙의 유일한 규범은 성서뿐이라고 주장하는 개신교에서는 어찌하여 부분적인 성서만으로 만족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송양 가톨릭 교회가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성서의 목록을 정확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보관해 온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성서보다도 교권이 앞서고 교회의식이 더 중요하고 전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박신부 그 말씀도 지나친 편견적인 생각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서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이지요. 송양! 여기 그 옛날 공자님의 어려운 문장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의 어려운 영어 문장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문장이 있다는 것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권위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서만이 유일한 신앙의 규범이라고 하고 그것을 자유 해석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려운 문장을 앞에 놓고 이것을 각자 마음대로 해석하시오, 한다면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해석은 하지마는 그것이 얼마만큼 그 문장이 뜻하는 진리에 가까울 수 있는가는 문제입니다. 개신교에서 성서 자유 해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정확한 신앙의 기준이 없고 그러니까 분열의 결과만을 가지고 오고 있지 않습니까? 성서가 중요하지마는 그것을 올바로 가르치는 교회의 권위가 없다면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종교 의식은 교회에서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성서와 성전(聖傳)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송양 성전은 가톨릭의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까?
박신부 그것은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해석을 위해서는 권위가 있는 교회의 가르침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성서 자유 해석을 주장하고 성서만이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한다면 개신교에서 어찌하여 주일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합니까? 어찌하여 주일 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칩니까? 어찌하여 신도들은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까? 성서 자유 해석이란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교회 분열을 가지고 왔습니까? 그 종파가 모두 하느님의 진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2베드 1, 20) '필립보가 달려갔을 때 그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내시는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자 ..'(사도 8, 30-31)
성서 자유 해석은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성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처음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성서 책만 내민다면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겠습니까? 성서는 그것이 쓰여진 때가 벌써 수천 년 전의 일이요. 그것을 쓴 성서 기자는 사고 방식이나 문화권이 우리와 전혀 다른 데서 그리고 우리의 표현 방법이 아닌 고대어로 썼습니다. 그것을, 그것도 우리말로 번역된 그 성서를 20세기에 사는 우리 한국인이 아무런 기존 지식도 없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처음 예비 신자들에게 성서를 주지 않고 성서에 나타나는 교리를 간추려서 만들어진 교리서를 먼저 줍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송양이 질문한 가톨릭의 성전(聖傳)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송양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전부 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송양 글쎄요?
박신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깡그리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예수님은 성서의 기록을 통해서 가르칠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오늘날 신문 기자들처럼 따라다니면서 속기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4복음서의 마지막 성서인 요한 복음사가가 그의 복음을 무슨 말씀으로 결론을 했습니까? 요한 복음 제일 끝 부분을 한번 펴 봅시다.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요한복음 마지막 절)
이 얼마나 명백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기록되지 않은 것도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기록되지 않고 전해 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전(聖傳)'이라고 합니다.
기록되지 않고 말씀으로만 전해진 구원의 말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얻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생활 원칙으로 삼으시오.'(2디모 2, 13)
'나에게 들은 건전한 말씀'으로 보아서도 글보다 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쓰여진 성서가 오늘날 분실된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 편지를 읽고 나서는 라오디게이아 교회도 읽게 해주시고 또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거쳐서 가는 내 편지도 꼭 읽어 주십시오.'(골로 4, 16)
여기서 보면 라오디게이아 서간도 있었음이 드러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서간이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분실되어 없어졌습니다. 그 뿐만도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1고린 5, 9)
여기서 우리는 고린토 서간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마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송양 저는 그렇게까지 세밀히 성서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서 이외에 또 내려오는 구원의 진리를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하나 말씀해 보시면 좋겠어요.
박신부 예, 먼저 하나 물어 보겠어요. 개신교에서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고 있지요? 성서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성서에는 분명히 안식일을 주장했고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어찌하여 성서에도 전연 없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까?
송양 ?
박신부 성서에는 그런 말이 전연 없습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신약 시대의 중심일로 생각하고 사도들이 정한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가톨릭에서가 아니면 어느 종파에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연옥설이라든지 성령께 대한 기도라든지 유아 세례의 전통 등등 한마디로 성서에 불투명하게 되어 있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은 곧 성전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전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전의 요람은 가톨릭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 신약 성서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이 마태오 복음 혹은 마르코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 복음은 적어도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 약 10년 후에야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전에는 신약 성서가 없었고 오로지 성전뿐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입으로만 전해 오던 것을 후에 기록한 것이 성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기원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부정하면 자연 성서도 부정되는 결론입니다.
송양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는 성서대로 하지 않는 것이 많다고 하던데요?
박신부 예컨대 어떤 것입니까?
송양 글쎄요? 구체적으로는 예를 들면 교회의 의식이라든지?
박신부 우리는 하느님의 진실 앞에 어떤 편견이나 고집은 겸손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내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서 이외의 것도 가톨릭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성전에 의한 것입니다. 문제는 성서와 위배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 야겠지요.
송양 예, 예컨대 가톨릭의 독신 제도 아닙니까?
박신부 좋습니다. 가톨릭의 독신 제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고요. 실제로 개신교에서 성서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송양 뭔데요? 구체적으로.
박신부 고린토 서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를 깎아 버려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니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가리우십시오.'(1고린 11, 5-6)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당 안에서의 공식 기도 때는 여자들은 꼭 미사포를 쓰지요. 개신교에서는 저는 이런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송양 ?
박신부 저번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야고보서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야고 5, 14)
여기서 앓는 사람에게 바르는 기름이 개신교에 있습니까?
이왕 말이 나왔으니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날 대구 신부님 한 분이 기차를 타고 서울서 대구로 오는데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옆자리에는 개신교 여집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집사님은 물었습니다.
'신부님! 성서의 어디에 담배를 피우라는 구절이 있습니까?'
신부님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답변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차가 대전역에 멈추었습니다.
신부님은 집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사모님, 여기서 내리시지요.'
'아니, 저는 부산까지 갑니다.'
신부님은 말했습니다.
'성서 어디에 기차를 타고 다니라는 구절이 있습니까7'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르쳐 주신 계시의 원천입니다. 성서 말씀을 잘못 알아듣는다면 우리 구원에 직접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이 배의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면 배 안의 승객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에로 가야 하는 인간 구원 경륜을 앞에 놓고 성서 해석이 제멋대로 구구하다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 교회에서 이렇게 저 교회에서 또 저렇게 말을 한다면 우리의 구원 문제는 진정 불안을 안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절대 진리 앞에는 어떤 편견도 고집도 체면도 다 끊어야 합니다. 진리 앞에는 겸손해야 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약 성서가 생기기 이전에 벌써 교회는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송양은 어떻게 생각해요? 교회가 먼저입니까, 성서가 먼저입니까?
송양 모든 것이 성서 중심이니까 성서가 앞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신부 큰 착각입니다. 교회가 먼저냐, 성서가 먼저냐에 대한 문제인데, 우선 교회라는 개념부터 시작해야겠지만 성서보다 교회가 먼저입니다. 구약 시대로 올라가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기겠지만 신약의 역사를 본다면 분명히 교회가 먼저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의 출범일을 성령 강림일로 봅니다. 제자들과 성모 마리아가 예수 승천 후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10일 후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제자들에게 선교의 힘을 주시면서 교회는 출범했습니다. 그 때는 신 약 성서가 한 권도 없었습니다. 전번에 말씀드렸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입으로 입으로 가르치다가 기록된 것이 신약 성서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구약의 성서와 신약의 성서 목록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었더라면 성서도 보존될 수 없었습니다. 성서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권위 있게 가르쳐 온 교회가 어느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송양 그거야 역사적으로 보아서 가톨릭 교회 아니겠습니까?
박신부 송양! 인간 구원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어느 교회를 찾아야 하겠습니까? 루터가 만든 교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입니까? 인간은 언제나 깊은 통찰을 통해서 자기의 편견을 씻을 수 있어야 진리에 접근합니다.
성서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성서의 관리자, 성서 목록 제정자, 그것을 보관한 교회가 없었더라면 성서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조물자가 있었기에 이 우주가 존재하듯이 성서 관리자가 있었기에 우리 구원의 진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뿌리는 곧 권위 있는 교회입니다.
출처 : 소중한 당신!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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