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19 14:53:44
최근 우리 사회에 중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그래서 우리 사회도 중년 남녀를 다룬 '위기의 남자', '고백'과 같은 TV드라마와 영화뿐 아니라 일반 서적들이 시청자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중년이 되면서 사람들은 몇 가지 잃어버리는 것과 얻는 것이 있는데, 잃어버림을 아쉬워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 대한 향수와 조금씩 상실되어 가는 건강의 문제, 그리고 경제력에 관한 문제는 중년이 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실제적인 것들이다. 중년기는 인생의 고갯마루에서 내리막길을 걸어가야 할 시점이므로, 중년기의 위기란 실존적인 문제이다.
'인생의 오후를 살아가면서 내가 누구이며, 이제 중년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더 의미 있게 살아가고, 또 가족과 이웃들에게 어떻게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들은 중년들이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해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사항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실존적인 질문들은 중년들이 성장하는 세대들에게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중년들의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기보다는 인생의 나머지 절반을 시작하면서 가정과 사회에 책임 있고 신뢰할만하며,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야 할 모델로서의 중년의 모습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1. 중년기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신세계로의 초대이다.
신형 차나 출고된 지 2-3년 된 차는 고장이 거의 없지만 그 이상 된 차들은 기본적인 부품부터 서서히 새것으로 교환하기 시작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중년기에 우리는 특히 건강에 대한 많은 도전을 받는다. 중년기는 육체의 노화와 생활에 대한 정신적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기이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노화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긍정적 의미에서 중년기는 이제껏 살아온 세월과 앞으로 남은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서서히 인간의 한계와 죽음에 대한 실감도 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성을 실감하면서 중년들이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은 인생의 봄과 여름을 다 보내고 인생의 가을에 서 있는 시점에서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기이다.
중년의 위기에서 죽음에 대한 불가피한 체험들은 중년들에게 찾아오는 가장 중심적이고 결정적인 특징이다. 청년기에 느끼는 인생의 한계라는 것이 피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이라면 중년기부터 지각되는 인간의 한계는 매우 실제적인 느낌을 가지게 한다.
죽음이 중년들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죽음을 바르게 인식하는 사람은 죽음이 주는 제한성 속에서 불사성을 현실적으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이 현실적 승화로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끼치고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삶에서 죽음이라는 사실이 배제된다면 삶이란 무미건조하다. 그래서 죽음은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신세계로의 초대이다.
인생 후반의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 중년들이 생각하고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밟아야 하는 죽음의 길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가지고 있지 않으면 때로는 우리의 삶은 무절제하고 향응에 굴복해 버리는, 본능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고 만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중년으로서, 사회와 후손들에게 올바른 가치들이 전수되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가지는 불멸성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제한성을 아는 중년은 삶의 진실과 가치를 자손에게 교육하고 훈련함으로써 후손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나타나는 인간의 유한성에 겸허히 반응하여 불멸성에 대한 유산적 작업을 하나씩 수행해 나가는 중년이 바로 회복의 자리에 서 있는 중년이다.
따라서 중년에 느끼기 시작하는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더 차근차근, 그리고 신중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벗이라 할 수 있다.
2. 중년기는 창조적인 경험과 사랑을 전수하는 때이다.
에릭슨(Erikson)은 중년기에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발달의 결과를 생산성(generativity)으로, 부정적인 결과는 침체성(self-absorption)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생산성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돌봄(care)으로 정의했다.
생산성이란 인생의 경험을 어느 정도 한 중년의 세대가 유무형의 가치 있는 것들을 자손과 사회에 전수하며, 어떻게 하면 후손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본능적 관심을 의미한다. 에릭슨은 이 생산성이 가지는 특성을 생식성(procreativity), 생산력(productivity),창의성(creativity)으로 정의하였다.
이 세 가지의 특성들은 이제는 이 땅에서 마지막 정리를 준비해야하는 부모 세대들에 대한 돌봄과 성장하는 세대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운명과 제한성에 대한 숙연한 용납이며, 짧은 후반의 삶을 어떻게 가치 있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러한 생산성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 중년들이 있을 때 그 생산성과 창의성을 통해 나타난 장인정신과 창조정신은 개인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생산성의 세 가지 특징은 모든 중년들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은 아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발달 단계의 결과로서 성숙하고 책임 있는 중년에게 나타나는 것이며, 자신이 더 확고하고 분명한 정체성을 가질 때 가능한 것이다.
중년기는 마치 두 개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앞서 지나간 부모세대와 성장하는 자녀들의 세대에서 중년기들은 바로 역할 모델(role model)로서의 요청을 직간접적으로 받는다. 에릭슨은 중년기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누미너스 모델'(a numinous model)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신앙 체험과 함께 변화된 삶의 모습을 가지는 것과 같은 우리 삶의 극적인 순간들을 말한다.
즉 중년은 이러한 모델로서 우리 사회의 정신적인 중추적 역할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에릭슨은 생산성을 가진 중년들이 형성하는 몇 가지의 모델에 대하여 지적한다.
첫째로 중년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악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악에 대한 통제는 기성세대들의 명확한 가치관과 공동의 선을 이루려는 열망에 의해서 규정된다. 자라나는 세대들의 가치관과 삶은 가장 활동이 많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많은 중장년층들이 형성해 놓은 규정과 삶을 통해 영향을 받는데, 이것은 자라나는 세대들이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가치관의 판단을 스스로 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중년은 후손들에게 살아 있는 가치를 전수해 주어야 한다. 중년들은 고대로부터 이러한 전수자로서 참여하며 이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요청 받았다. 인류학자 마이클 엘더스(Michael Elders)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중장년기의 사랑과 삶의 가치와 기술이 후세들에게 전수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르게 전수 받은 부족은 그 부족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지만, 사랑과 경험이 전수되지 못한 부족의 후손들은 성장하면서 기존문화를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년으로서 청소년들에게 삶의 모델이 되고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중년기는 영혼을 위한 순례의 길이다.
생산성은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우주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심연에 뿌리내린 본능의 힘이다. 이 본능적인 에너지가 창의적으로 방출될 때만이 중년기 사람들은 존재론적인 삶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킨다. 중년기는 이러한 생산성을 자신들에게 실천함으로써 불사성(immortality)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릭슨은 '생산성'을 '비이기적인 돌봄의 다양한 형태로 배후에 있는 본능적인 힘'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비로소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헌신함으로 창조주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생산성은 직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미덕으로 소위 인간성과 연관되어 있다. 생산성의 뿌리는 일터에서 돌봄(care)을 가지고 일하는 '장인정신'으로 나타난다.
에릭슨이 말하는 생산성은 우리 인간 폐부에 깊숙이 뿌리내린 존재론적 가치와 희망에서 나오는 인간의 선한 본능적 힘의 발산이다.
시카고대학의 단 부라우닝(Don Browning)은 생산성에 대해 '인간 정신구조에 있는 진정한 고대의 기초'라고 표현했다. 즉 인간에게 있는 이러한 정신 구조는 고대로부터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뿌리내린 기초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천부적이라는 의미이다.
생산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구조에 근본을 이루도록 되어 있고, 인간은 이것에 의해 자극 받고 살아갈 때에야 그의 본연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갈 때에 삶에 대한 의욕과 보람을 가지게 되며, 삶의 폭과 깊이가 심오해질 수 있다.
이 본능적인 힘은 어떠한 내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사라질 수 없다. 이 감정과 힘은 우리가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어떠한 사회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청사진처럼 인간이 가진 원형이다. 인간이 가진 원형이라는 말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며, 어떠한 외부적 영향에 의해서도 그 의도성이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생산성은 인간의 심연에 뿌리내린 본능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원시안적(teleological) 희망과 관점을 가지게 된다. 원시안적이란 말은 인간의 미래에 대하여 참다운 목적론적인 존재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산성의 인간을 에릭슨은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us)으로 비유하였다.
다시 말해 생산성을 가진 사람이란 종교성에서 우러나오는 성자성(sainthood)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있든 간에 그들의 중심에는 이러한 성자성이 있으므로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과 사람들을 창조주의 의도 가운데 인도하고 변형시킨다.
종교성을 가진 생산성의 중년들은 실존론적인 문제에 민감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미를 제공하고, 모든 세대들에게 새롭게 변화된 정체성(a new converted identity)을 제공해 준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고 선한 사회구조적 틀을 조성해 주며, 부모 세대에는 인생에 대한 보람과 감사를 가질 수 있는 여건 조성에 힘쓴다.
생산성을 가진 개인이란 현실적인 참여와 관심 가운데, 인간의 문제들이 공정하게 다루어지도록 바른 법, 윤리, 그리고 상식의 도를 실행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중년기에 생산성을 가지는 사람들은 자기 위주의 생활방식을 뛰어 넘어 창조주의 품성에 참여하는 자들이며, 이 생산성의 사람들은 바로 공감의 영(the spirit of empathy)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중년기의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us)이란, 공감성을 가지고 남의 입장에 서서 함께 고통에 참여하며,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중년기의 위기는 '회복을 위한 영적 위기'이다. 왜냐하면 이 영적 위기는 중년기에 새로운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하여 눈뜰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년기 위기의 과제는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us)이 되는 것이다. 종교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위한 순례의 길이다.
**임경수/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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