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 예 수 의 기 적
1.예수기적의 문제점
예수는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셨는데,예수의 행적에 관해 말할때 우리는 기적보도를 도외시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 기적을 바라보는 비판적 주체성-과학비판적 입장 (뭐든지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전부설명 가능하다 라는 현대인의 특징) -은 기적을 기적이라고 보고 놀라기 보다는 언젠가는 설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근세에 들어와 시작된 이런 관점은 예수의 기적에 관해 2가지 문제점을 가져다 준다.
1) 과연 기적이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연구, 검토 해야할 역사학적 문제
2) 기적은 과연 가능한가? , 근본적으로 기적이 뭐냐? 라는 자연과학적 문제
역사비판적 연구
① 문학비판 : 기적은 양적으로 과장되어 있다. 마르꼬와 마태오를 비교해 볼 때,‘많은’ 병자 ⇒ ‘모든’ 병자, 야이로의 딸이 ‘거의 죽어’가고 있다 ⇒ ‘이미죽어있는’
② 랍비, 헬레니즘과 복음서 기적사화와 비교
랍비,헬레니즘에서도 악마추방, 죽은 자의 부활등이 있는 것으로 볼떄 신약은 그리스도교 이외 모티브를 예수의 위대함과 전권을 강조하기 위해 썼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랍비, 헬레니즘 계통의 기적사화는 비역사적인 거짓이며, 신약의 기적만 역사적이라고 할 수 없다.
③ 양식사적으로 보아 어떤 기적사화는 부활체험후, 예수의 지상생애에서 소급하여 투영한것 같이 보인다. 이른바, 자연기적들은 교육과 신심을 위해 첨가 보충된것으로 판명된다.
결론적으로 복음서 기적중 상당수는 전설적으로 봐야하는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서술적 내용의 진위를 따질게 아니라 신학적 언표내용을 알아봐야 한다. 왜냐면, 역사서술이 아닌 기적보도들은 예수의 인격과 그 메시지가 띠고 있는 구원의 의미에 대한 신앙의 언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서 예수의 기적이 하나도 없다고 보면 않된다. 여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1) 예수의 생애에서 어떤 확실한 근거없이 기적 전승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기적 전승은 역사의 예수를 확인하는데 있어서 통용되는 기준을 똑같이 이용해 검토할 수 있다.
안식일 치유와 이로 인한 논쟁에서, 악마추방으로 인해 마귀와 결탁했다는 비난을 반박하는 가운에서도 예수의 반박자들은 예수의 기적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3) 어떤기적 사화에는 특별한 세부 묘사가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어떤 특별한 의도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것은 본래적 사실로 판명된다.
그래서 복음서 기적전승을 비판적으로, 역사학적으로 상세히 검토해 볼때 어떤 역사적 핵심이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걸수 없다는 결론이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질병치유, 마귀추방등 치유기적이다. 반면, 자연기적- 풍랑, 라자로 부활등- 들은 역사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적 으로는 기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과연 기적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제기.
전통적인 기적 이해(호교론적)에서 기적은 지각되는 사건으로서 자연적인 가능성을 초과하여,하느님이 자연계의 인과율을 묵살, 정지, 우회 함으로써 이뤄지는 사건이며, 이로써 기적은 말씀의 계시를 확인하는데 이바지 한다.
이런 의미의 기적은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볼때, 우리가 자연계의 모든 법칙을 다 알고 있을 때 확인될 수 있다.그러나 이런 완벽한 인식이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 또한, 신학적 관점에서도 하느님은 세계내적 인과율을 대신할 수 없는데, 만일 대신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세계내적 원인과 동일한 수준으로 격하되는데 이런 하느님은 우상일것이다.
* * 기적이 본래 갖고 있는 성서적 의미
성서는 위업과 표징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예수의 기적을 가리키는‘이상하고, 야릇하며,신기하다’라는 뜻인 τερατα 를 해석한다. 여기서 표징은 이례적인 사건으로써,이사건은 경악과 감탄을 일으키며, 기적은 시선을 하느님께 향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신앙과 하느님의 영광이다. 예를 들어 ‘저기압은 동풍을 일으킨다’와 ‘하느님이 동풍을 일게 하셨다’에서 전자는 인과관계 영역이요, 후자는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의 초월적 기원과 종교적 의의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 위치하는 종교적 맥락과 신론적 ‘말놀이’에 유의 해야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확대된 기적개념으로 종교적 대상의 모든 일을 기적 개념화 했고,다른 어떤 이들은 기적개념을 내면적, 심령적으로 해석하여 기적에는 신앙과 용서만이 있다고 한다. 전자에서는 성서에 의한 표징으로서 기적측면이 사라지는데, 여기서는 자연기적과 인간의 모든 재앙도 하느님 탓으로 돌려지게 된다. 후자는 성서에 의한 기적에 따르는 육체적 차원이 없어짐으로써 성서적 기적관은 하나의 근거없는 주장이 되며, 기적이 인간 실재에 부딪혀 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면 기적 신앙은 이데올로기의 표방에 불과 하게 된다.
요컨데, 문제는 기적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하느님의 작용이 주는 특별 말씀이나, 의미를 인간이 느낄 수 있느냐의 여부인데, 느낀다면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가? 이 근거는 신앙에 의해서 인가 , 아니면 신앙이 겪는 실재의 ‘무엇’에 상응하는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같은 2가지 상호관련성은 자연과학적인 근대적 실재 이해와의 대립이라는 과제를 안겨준다.
자연과학에서 모든 사건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법칙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데, 이로 보면 어떻다고 규정할 수 없는 사건의 기적을 위한 여백은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반적 조건연관( 條件聯關) 을 그자체로 묻고 알아보아야 하는데, 이 질문은 자연과학적 질문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의미에 관한 철학적이며 신학적 질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안에서 기적의 질문은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답변할 수 없다. 기적의 질문은 사건의미가 아닌 실재 그 자체 의미가 사건 안에 어떻게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나타나느냐를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과 신학이 만나는 곳은 초월적 질문이 제기되는 곳, 실재 전체와 그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곳이다.
기적의 실재 양태에 관한 질문에 있어서, 만일 실재와 그 의미에 관한 종교적 해석을 한다면, 기적의 질문은 다시 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 까지 연장 된다.
하느님은 세상 운행법칙을 영구화 하시고, 이에 따라 차례로 움직이게 하셨을까? 아니면 살아계신 역사의 하느님으로 세상 사건 안에서 그때마다 사랑을 베푸시고 자연법칙을 통하여 표징적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가? 이중에서 후자로 볼때, 하느님은 어떤 사건을 구원역사의 특별 표징으로 삼는 그때에 사건의 세속적 자립성을 그대로 살려 주시게 된다. 이는 신과 세계의 일치가 피조물의 자립에 반대되지 않는 성서적 원칙으로 통용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① 현상적 차원에서 기적은 놀아움을 자아내는 이례적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요소는 애매하고 多義的 인데 이것이 一義的으로 되려면 설교의 말씀이 동반되어야 하고, 이 말씀이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② 종교적 차원-말씀에 의해 펼쳐지는- 의 기적에서는 히느님이 직접적인 주도 하심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이 그 요소로 속한다. 그분의 말씀과 요구가 기적의 표징을 통해 구체화 된다는 사실로 실증된다.
③ 이 구체화는 피조물들의 제 2원인들(간접방법) 에 의해 매개된다. 즉, 히느님이 사람 눈에 볼 수 있을만큼 직접 행동하는 식의 개입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이 다스리러 오면,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이 계시되고, 이 계시는 인간과 세계를 참인간과 참세계이게 한다. 피조물의 자립성은 그 농도에 있어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정비례로 증대한다.
④ 기적사건은 언제나 다의적 이지만, 이는 신앙 결단을 위한 자유의 여백이다. 하느님 업적으로서 기적은 신앙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지만 신앙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자극하고 신앙을 근거있는 것으로 확인해 준다.
2. 예수 기적들의 신학적 의의
예수 기적은 하느님 다스림의 표징들이며, 악마의 지배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과 친교가 회복되는- 하느님의 다스림으로- 곳에서 ‘사물은 다시 제대로’되고 세상은 다시 온전하게 된다. 이런 구원은 심령적일뿐 아니라 인간전체에 관련되기에 그의 육체성이라는 차원에도 직접 관련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은 하느님이 지금 벌써 시작한 구원의 표징이며, 하느님 다스림이 가지는 육체적이며 현세적 차원의 표현이다.
하느님 다스림의 종말론적인 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미래의 先取(선취) 이기에 예수의 기적들은 인간과 세계가 파멸이라는 질곡에서 해방되리라는 보증이다. 기적은 이에 희망을 두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오는 것이며, 일찌기 들어본적도 없는 것에 대한 새 희망이고, 이것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전세계 실재가 하느님의 역사적 경륜에 편입되어 있다는 표현으로서, ‘희망을 지향하면서’ 달려가는 생성세계로 특징지어 준다.
결국 하느님 다스림이 도래하기 시작 했음을 보여주는 예수의 기적들은 예수의 사명과 전권을 가리키는 표징들이다.
* * 예수 기적의 의미
1. 예수 기적은 구약의 완성이다. 즉, 절름발이와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는 것은 구약에 언약된 하느님 법과 義가 실현된 것이다.
2. 예수의 기적에서 하느님 권능이 인간적 비천성, 은폐성, 모호성을 띠고 나타난다.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비참성을 가리키는 표징이다. 이같이 인간 예수의 구체적 역사는 하느님의 권능을 은밀하게 현시하는 장소가 된다.
3. 예수의 기적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여 그분을 뒤따르게 한다. 이런 추종은 동시에, ?캅像? 의미하며 하느님 백성을 종말론적으로 소집하는데 이바지 한다. 이 소집통고는 특히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로 하여금 지금부터 벌써 하느님 구원과 사랑을 몸소 체험할 수 있어야 하고 계속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3번째 관점은 중요하다. 예수 기적들은 신앙을 위한 표징이며 기적과 신앙은 밀접하게 연결된다.기적은 신앙으로 이끌어주는 길잡이인 동시에, 기적은 신앙을 전제로한다. (바로 이 의미로 볼 때 기적은 나를 넘어서면서 하느님께 신뢰케 한다. 예수는 그래서 요나의 기적 밖에 없다고 한다.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요나의 기적은 곧, 십자가의 희생죽음 이요, 그 희생적 죽음이 우리 시대가 찾는 기적이다.-정의 위해 몸바치는, 이웃위해 투신하는-) 왜냐면,예수는 신앙을 발견치 못하는데서 아무 기적도 행할 수 없었다.
* * 신앙과 기적 사이에 2가지 연관
1. 기적은 신앙으로 인도한다. 즉, 기적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개방하게 하지만, 인간을 압도하여 거꾸러 뜨리지는 않는 것이며, 하느님은 이 안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신다.
2. 기적을 기적으로 보고 그를 하느님 업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신앙을 전제로 한다.
또한, 기적은 신앙을 위한 표징이며, 이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할 권능이 있다는 신뢰이다. 이같이 기적은 당신께 간청하는 의지와 기도에 대한 예수의 응답이다.
그러나 간청의 의지와 기도가 기적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니고, 오히려,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걸 하느님께 기대하는 자기 비움안에 개방이 있는 신앙일때 기적은 하느님으로부터 하사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인은 하느님의 전능에 참여하며, 하느님 전능과 섭리에 대한 신뢰를 갖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은 어떤 이례적 현상이 아닌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몸소 등장하셨음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세계 구원을 위해 역사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 4 장 예수의 전권 주장
1.예수의 잠재적 권리주장 = 그의 메세지와 기적 안에 내재되어 있다.
예수의 메시지와 기적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었다. 이제는 메세지와 기적의 문제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다스림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우리에게 보여줄 수도 지적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루가의 말대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도 찾아낼 수 없는 방식으로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비유를 통해서만 알려질 뿐이다. 그렇다면 비유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카스퍼는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신비로서 성사에 비유한다. 성사는 가시적인 모습으로 비 가시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비의 열쇠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하느님의 원성사이며 원형으로서, 예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시화된다. 그러나 이 신비는 신앙을 통해 실현되는 실재이다. 하느님의 신비를 아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아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뜻한다. 그리고 그는 인격 자체로서 하나의 신비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예수를 통해 현실로 펼쳐지며 예수 안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하고 우리에게 펼쳐진다. 예수는 가장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세상에 오신다. 이 모습 안에 하느님이 숨어 계신다. 여기에 하느님과 인간의 본질이 예수 안에서 해결되고 설명되어진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의 교차점으로서 하느님 나라는 곧 예수 자신이었으며, 그 나라의 도래는 예수의 인격자체였다.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이 나타나고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지금 여기에 이뤄지는 것이다.
** 예수의 공적 활동과 말씀과 업적에 잠재하는 그리스도론
그는 인격과 소신을 일치시킨다. 그렇기에 그의 표징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며 그의 활동은 간접적 그리스도론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론은 부활 후에야 집적적으로 고백된다. 그리고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게 되는 데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회당에 가서 기도드리고 지켜야 할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였다. 반면에 그는 당시 사회에서 분쟁과 문제를 야기시켰다.(안식일법의 폐기, 세리와의 식사)
① 예수의 새로운 처신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맥락에서 참 의미가 드러난다. 당시의 근동지방에서의 공동식사는 공동운명을 의미하며 특히 하느님 앞에서의 친교를 의미한다.(성인들의 친교)
② 하느님 나라와 관계하여 당시 멸시받던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죄인들을 구원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구원의 손길로서 하느님의 사랑의 메시지인 것이다. 또 한번 그는 당시 사회에 충격을 던진다. 바로 이 죄인들에 대한 죄의 용서이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권리주장은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한 위치에 서서 행동하는 분으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죄의 용서는 하느님 사랑의 현실화였던 것이다.
③ 예수의 선포 역시 하나의 그리스도론을 포함한다. 예수는 당시 사회 기반이었던 유다 율법마저 능가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서 예수의 말씀은 완성에로 이끌어준다.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의 말을 한정짓는 예언자들과도 달리 예수는 당신의 말씀과 하느님의 말씀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전권에 입각하여 말한다. 이렇게 그는 기존의 도식을 능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것을 끝없이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그의 위대함의 근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삶에로의 투신과 과거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움직임들은 오늘날 정지되고 기계화된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다시 되물을 것을 요구한다.
2. 예수의 지존 칭호에 관한 문제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 했는가”하는 질문은 예ㅓ수 당시 사도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었다. 마르코6,14이하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대화와 8,27 이하 베드로의 고백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는 물음이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론적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상 생애의 예수와 관련지어 볼 때 예수 자신이 메시아임을 인지했었느냐는 것을 표현한다.
예수 당시 메시아관 : 메시아 대망 사상은 획일적이 아니고 다양한 메시아관이었다.
① 구약적 맥락에서는 즉 구세주적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나 하느님 나라의 임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인격적 구세주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② 여기에 교량역할을 해 준 것이 군주관, 즉 왕정제도이며 다윗왕권으로 대표되는 왕은 기름 부음받은 자이며 성유로 축성된 자이다. 그는 야훼의 지상대리자이며 통치권을 지님을 말한다. 2사무7,12에서 나타난대로 다윗가문에 대한 언약은 나단의 축복으로 나타나며 우리에게는 막연한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사상으로 이해된다.
③ 보다 세부적으로 이해되면서 야훼의 수난받는 종(제2이사야), 사람의 아들(다니엘서), 군주, 대사제(즈가리야), 정치적 임족주의적 메시아(열성당원), 율법교사의 메시아(랍비) 등으로 여러 유형의 메시아 대망 사상이 있었다.
이렇게 예수 당시에는 메시아관이 뚜렷하지 않고 다양하여 그 의미에서 혼동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예수는 메시아에 대한 칭호를 피했다. 예수는 생전에 결코 메시아 칭호를 단 한번도 그 자신의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칭호가 당위적이고 애매모호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의 신원을 지칭하기에는 그 단어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메시아 칭호는 제3자가 예수에게 부여한 칭호인데 예수는 여기에 수정을 가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예로 베드로의 고백에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애매모호한 메시아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에 예수를 메시아로 일러주면 백성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신원이 애매모호하고 오해되게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시아의 특징에 덧붙여 “사람의 아들은 백성들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붙들려가서 수난을 받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예수는 여기에 수난상을 덧붙였다. 유다의 메시아관은 “야훼의 종”이 한 부류있었지만 이해하기 힘들었고 때가 되어야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유보시켜 두었었다. 예수가 수난에 대해 예고했을 때 베드로의 반응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사탄아 물러가라”였다. 이것은 예수의 수난성을 배제한 메시아관은 사탄일 수밖에 없다는 초기교회의 이해를 드러낸다.
라이마루스 : 예수는 유대교의 전통적 이해 지평안에 머물러 있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정치적 단위로 이해했고, 제자들도 거기에 희망을 두었다. 결과저그로 예수가 죽음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을 인류 전세계를 위한 죽음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즉 나중에 정신적 메시아, 전 인류의 구세주로 들어올렸다.
자유주의 신학파 : 유다교의 정치적 외면적 메시아 대망 사상을 예수가 내면화시키면서 정신적 메시아 이념으로 재해석했다. 예수는 자기 민족의 정신적 도덕적 해방자였는데 정신적 쇄신을 시도하여 정신적 왕국을 세우려다가 이 사상을 위해 죽음을 자청하게 되었다. 애매모호한 외적 정치적 메시아 사상을 내면화시키면서 도덕적으로 심화시키기 위해 자청한 것이 죽음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마저 왕국의 일부분이었고 죽음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룩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문제점으로 예수는 결국 일반적 관념이나 도덕적 원칙을 상징하는 암호밖에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슈바이처는 비유로 대답했다. “이는 세 복음서를 심리적으로 해석해서 요한 복음이 아닌 제4복음을 만들어 내는 ?叩? 같다.”
브레데 : 복음서의 메시아관은 유다교가 아닌 그리스도교의 결정적 내용이며,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교리적 견해의 반영이다. 메시아관은 신앙고백의 결실이다. 메시아 고백은 역사적 기술이 아니라 신앙적 기술이다. 예수의 생애는 메시아 생애가 아니었는데 부활 후 신앙의 빛을 받아 메시아로서 각색이 되었으며 마르코는 함구령이라는 수법으로 이 긴장을 극복하였다.
이런 브레데의 이론을 불트만이 채택하여 현대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슈바이쳐 : 브레데와 불트만의 이론에 비판
1.예수의 생애가 메시아로서의 생애가 아니었다면 예수의 죽음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예수의 처형이유를 “유다인의 왕”으로 전하고 있는데 여기에 역사적인 신빙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가 유다인의 왕이라는 누명을 쓸 수 밖에 없는 타당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고 이런 역사적 실재를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에 대해서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해 정치적 선동자로 처형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죽음이 우발적인 오판은 아니었으며 예수는 죽을 수 있는 계기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정치가는 아니었더라도 예수의 새로운 사상은 기존의 종교질서를 엎을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기했던 것이다.
2.만일 예수 생애에 메시아적 종말론적 암시가 전혀 없었다면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겠는가? 예수가 메시아라불릴 어떤 가능성은 지상 생활의 예수에게서 감지되었었다. 부활체험을 메시아적-종말론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상 생애의 예수에게 그런 암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페쉬 : 예수의 메시아 주장 == 마르코8.27 이하 대화 내용에서 알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여기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함구령을 내린다. 당시 유포되었던 정치적 메시아나 민족주의적 메시아와는 달리 제자들은 스승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언자적 전통을 따르고있으며 이는 성령에 의해 축별(祝別)받은 세말의 예언자로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사자이며 파견자로 하느님의 삶을 나타내주고 있다. 고난받는 예수는 그 자체로 신비이며 메시아의 비밀을 드러내 주는 것이 된다. 예수는 자신이 오해될 까봐 메시아 이해에 대한 유포를 금했으며 이것을 뛰어넘는 십자가상, 수난의 메시아상을 사도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정치적 해석이 악화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던 것이다.
여성신학 : 카스퍼가 사용하는 원칙인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며 수난과 십자가의 메시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예수에 의해 기억되리라고 했던 향유를 부은 익명의 여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세번이나 에수를 부인하고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길 때, 한 여인은 이분이 그리스도이시라고 향유를 발랐다. 즉 그리스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다.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기존 종교에 도전하는 이러한 고백을 사도들은 숨길 수 빆에 없었다. 예수의 죽음 이유에 대해서도 로마인들에게가 아니라 유다인들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은 당시 유다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에 대해 그 이유를 묻게 되었을 때의 결과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예수의 정치적 죽음을 비정치화시키면서 종교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마르코14,62 이하에 나타나는 유다 최고 회의의 예수의 법정 진술에서 메시아와 사람의 아들이 혼용되고 있다. 재판시 예수는 자백을 강요받는데 그렇다면 그만한 흔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재판받는 상황을 추정해 볼 때 전혀 근거 없이 유다인의 왕이라고 할 수가 있었겠는가?
메시아, 그리스도 칭호는 수난 전승에 직결되고 있다. 신앙고백의 원자료인 고린토 전서 15장의 부활 고백에서 최초의 복음선포에서 예수는 십자가의 메시아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 수난과 부활은 복음의 핵이다.
하느님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분을 메시아로 삼으셨다는 것을 사도행전도 주장하며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이 칭호를 일단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했다. 즉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유대교화 하지 않고 수난을 통한 메시아성을 재창출해냈다. 예수는 새로운 것을 제기하는 분이며 하느님의 다스림을 봉사로써 이해하였던 것이다.
*** 사람의 아들에 대한 칭호 ***
메시아가 제3자에 의해 부여된 반면에 이 칭호는 사도7,56을 제외하면 전부 예수 자신의 발설로 나오게 되는데 이것으로 보아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특징에 더욱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생긴다.
1) 인자(人子)
꠆ꠏ 인간 일반, 또는 인간에 대한 고상항 표현(셈족 개념)
ꠌꠏ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천상의 인자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대리하는 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자들, 곧 참된 이스라엘의 대표자를 의미 한다.(다니엘 7,13 이하)
2) 예수는 당시 널리 퍼져있지 않던 인자 개념을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면서 동시에 은폐할 수 있었다. 예수는 ‘비하에서 현양’이라는 도식을 여기에 숨기고 있었다. 이 인자개념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대리자요, 사람들의 대표자로 형용되며 이것이 수난 및 현양의 그리스도론, 재림대망, 예수의 개인적이며 보편적인 의의 등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론으로 발전한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론을 발전시켜 가면서 예수께 물려받은 이 명칭을 통해 신앙의 주님과 그분 재림 사이의 연대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인자이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재림 시 구원될 것이라는 확신을 인자라는 표현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아들, 하느님의 아들 ***
예수가 말한 것은 하느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소개함이다. 예수는 부자 관계 그 자체보다는 하느님의 부성(父性)에 중점을 두어 이야기 하신 것이다. 즉 사랑 안에서의 상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론 : 예수는 하느님을 근본으로 하고 하느님을 위할 때 모든 것이 되었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모소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맞아들이기위한 비 터요 빈 자리이다. 우리가 예수에관해 말할 때 그것은 예수가 부활 이전에 존재적으로(ontisch)으로산 것을 부활 후에 존재론적으로(ontologisch)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 방식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전히 충만하시고 하느님의 전능에 참여하신다. 그리고 그 전능은 사랑에 있다.
제 5 장 예 수 의 죽 음
1. 사건의 줄거리
예수의 죽음은 복음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복음에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기록은 양적으로나 비중으로나 복음의 진수를 이루고 있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로 그리고 신앙 고백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십자가 처형>
기원전 519년 바빌로니아에서 반란인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십자가형은 페르시아인들이 창안한 형벌로 로마에서는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우리는 십자가를 종교화 이전에 끔찍한 형틀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에선 노예들, 이방인들에게만 적용되었고, 유대 민족 해방 운동가(자유 투사)들도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예수도 정치적 반란자로 처형당했다. 그러나 예수는 열성당원과 같은 叛徒들의 두령은 아니었다.
<예수의 유죄 선고 사유>
예수는 문제의 인물이다. 예수의 죽음 또한 문제의 죽음이다. 예수는 신성모독죄, 안식일 준수 문제, 성전 정화에서의 마찰, 정결례 문제, 정치적 이유 등 여러가지로 로마와 유대교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예수는 두 측면에서 조롱을 받았다.
① 로마의 군인들로부터 유다인의 왕이라는 조롱과 가시관을 받았다.그러나 예수는 그의 행적을 보면 왕으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왕이라는 누명을 쓸 행동을 했다.
② 유대교 최고의회는 메시아 문제 (거짓 예언자)와 성전을 헐겠다는 예수의 말씀(하느님 모독죄)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이러한 조롱, 이러한 선고는 그가 이미 생전에 예언자나 신적 능력의 모습을 보였기에 가능하다는 반증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이다.
<보프의 예수 이해>
예수가 누구인가 보프는 좀더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보프에 의하면 예수는 첫째, 하느님께 방향지워진 자이다.
둘째, 위타적인 존재자,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이를 십계명으로 요약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된다. 예수의 죽음도 이런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해방신학은 이 도식을 좀더 명확히 드러내 준다. 해방신학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라고 요구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위타적인 존재적 삶을 통해서만 확인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확인된다. 오늘날의 해방신학의 핵심은 이웃 사랑이 더욱 더 큰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확인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하느님께 방향을 지으면서 타인을 위해 산 사람,즉 위타적인 존재였다.
<예수의 죽음 이해>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 차원의 오해나, 자유인. 율법 위반자. 비타협주의자로서 반대자들에게 제거된 것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이 이루신 구원업적이요, 예수의 자발적인 자기희생, 자기헌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자신은 그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2. 종말론적인 전망
예언자들의 공통된 운명은 수난과 죽음, 즉 고통이다. 예수께서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런데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분명한 추종과 결단, 집까지 끊을 것을 요구하셨다. 이는 예언자들의 종말이 엄청나므로 그리고 예수 자신에게 닥쳐올 고난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에 그런 죽음의 추종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 예수 자신의 죽음 이해 *
예수의 어록 자료의 수난사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흔적이나 암시가 없다. 또한 폭력의 희생이나 예언자와 같은 운명 암시 등의 대목에서도 예수의 죽음에 어떤 본격적인 구원 의미를 명확하게 시인하고 있지는 않다.
<예수의 수난 예고>
그러면 복음의 수난 예고는 구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가? 예수는 수난을 얼마나 인지했으며, 그 죽음은 자발적인 죽음인가?
그런데 수난 예고는 사후 예고로 부활 후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수난 예고는 신앙 고백 형태로서 부활의 빛 안에서 기술한 부분이 많다. 이는 역사 서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난 예언들은 예수가 당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로써 죽음의 운명을 감수하는 예수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수난예고들은 예수의 고난을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필연성으로 이해함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이 수난 예고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부활 이후의 해석이지 예수의 참된 말씀이 아니라는 게 통설이다.
<4복음서의 수난 기사>
네 복음서의 수난 기록은 일치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호교론적 의미와 교화적인 의미, 교육적인 의미와 동기가 있다. 이는 교부 시대의 외경이나 순교자들, 시문학의 형성처럼 부활 후에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의미 부여와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메시아의 수난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수난 기사들은 매우 오래된 전승으로 역사적인 사건의 경위를 상당히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수난 전승은 몇몇 신학적 관심 안에 규정되었는데 즉, 호교론적, 교의적, 교화적 동기들이 그것이다. 수난 보도는 사실 보도이며, 복음 선포 의도에서 쓰여졌다. 이 기사는 예수의 수난을 부활에 비춘 해석으로 메시아의 수난, 의인의 수난, 구약의 완성, 하느님의 뜻의 실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기사 이면에는 구약 성서의 배경, 즉 야훼 종의 노래와 시편 22장, 69장의 진한 암시와 영향이 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해석>
- Wrede : 예수의 지상 생애는 전혀 비메시아적이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예수가 왜 ‘유대인의 왕’, 메시아의 참칭자로 처형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 Bultmann : 예수의 십자가상 처형은 그저 하나의 정치적 오해였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정치적 오해였다면 예수가 지닌 가르침,종말론적 교훈, 예수의 죽음 등의 이해가 어려워진다.
- Marxen : 예수는 당신의 죽음을 하나의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였다면 예수의 현재 지향적 활동과 행적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0 C초 근대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 역시 예수는 당신의 죽음을 구원의 죽음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예수의 죽음의 구원론적 이해는 사도 바울로의 조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9세는 비메시아적, 비구원적 주장을 단죄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
인간의 고통에는 영광을 향하는 의미, 속죄적인, 구원적인 의미가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고난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담겨진 구원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에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구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원리들이 있다. 당시에는 ‘고난받는 의인’이란 관념과 의인의 죽음에는 속죄의 힘이 있다는 표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실제로 구원의 죽음으로 이해하였느냐이다.
- Schuweizer의 종말론적인 견해 -
하느님의 다스림 도래와 종말론적 재난,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적 고난의 시대는 분리될 수 없다. 종말론적 재난의 표현으로서의 수난 소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종말론적 재난은 한 짝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즉 영광의 도래와 그 과정에서 수난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의 수난은 분리될 수 없다. 주의 기도 중 유혹의 위험에 관한 언급은 종말론적 재난을 뜻하며 예수는 처음부터 이를 예고하고 있다. 고난과 박해라는 재난은 하느님 나라의 두 모습, 즉 비하와 은폐에 속하며 예수의 설교에 시종 일관하고 있다. 이 은폐성의 극치가 십자가의 죽음이고, 마지막 극치에서 하느님의 영광의 실현이 극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부활의 꽃을 피우기 위한 죽음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부활은 십자가의 긍정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종말론적 사신은 고난의 신비에 귀결되어 있다.
*** 죽음을 예견한 예수의 생애 ***
예수는 어떤 폭력의 희생이 되어 횡사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했고, 또 예상했다.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비난, 마귀와 결탁했거나 마술을 부린다는 비난, 안식일 계명을 위반했다는 비난, 그리고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죽여 없앨 모사와 실제의 제거 등 예수는 늘 생명의 위험을 당해 왔다. 예수의 공생활은 마찰과 갈등의 삶이었다.
요한 세자의 비극적인 최후 또한 자신도 폭력에 희생되어 횡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예수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예언자들의 운명에 미리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언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의 판가름도 예루살렘에서 나야 했다. 예수는 죽음과 위험을 예견한 채 예루살렘 상경을 결단하였다.그러므로예루살렘에서의 판가름은 최종적이요, 종말론적 위기였고, 은총과 심판을 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성전에서의 충돌 사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지지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환호하는 시위를 벌이고, 큰 민중 집회가 이루어진 것 같다. 성전에서 충돌은 분명히 발생했다.
성전 정화는 혁명적인 행동이라기보다 차라리 예언자적인 상징 동작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구약성서의 기대에 관련지어 볼 때 이 동작은 세말의 때가 시작했다는 것, 묵은 성전이 끝나고 새로운 성전이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처럼 메시아적 희망을 일단은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며 묵은 성전의 파괴와 새로운 성전의 건축을 예언했다.
성전에서 벌어진 일은 유대교 교권 당국에게는 틀림없는 도전 행위였다. 따라서 이 일은 예수의 재판의 발단이 되었고, 유죄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와 그 반대자들과의 충돌은 종말론적인 맥락 안에 서 있는 것이다.
<최후 만찬>
최후 만찬은 종말론적 전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본문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하는 말씀이 적어도 하나는 들어 있다. 즉, “나는 그대들에게 진실히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 더 마시지 않겠다.”
제자들과 나눈 예수의 최후 만찬은 하나의 종말론적 상징동작이었다. 예수는 최후만찬 때에 임박한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이 죽음과 함께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미리 내다본다. 예수의 죽음은 Basileia의 도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자신의 설교 및 공적 활동의 종말론적 성격을 견지하였다.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말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성서의 전승 안에서조차 예수가 하느님께 버림을 받고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루가나 요한은 각각 “아버지, 당신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 는 승리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고난과 죽음의 시련 한가운데서도 하느님은 처음부터 주님이시며 자기를 구원하여 새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편 22는 이 체험을 묵시문학의 언어를 빌어 하나의 전형적이며 모험적인 운명으로 고정시켰다.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기도는 실망과 좌절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시편 22 전체에 나타난 복음작가의 신앙의 해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편 22 끝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확신,감사의 기도로 끝맺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시편 22편의 전체 메시지로 이해하면 이 기도는 예수의 하느님께 대한 종말론적 확신을 토로한 예수의 마지막 신앙 고백이었다. 이 차원에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가 선명하게 펼쳐진다.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한다는 것, 그것은 곧 하느님의 종말론적 다스림이 뚫고 들어오는 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의 말씀은 절망의 외마디가 아니라 하나의 기도이다. 청허를 확신하는 기도요,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를 희망하는 기도이다.
<요약>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와 신기원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종말론적 시련의 대기를 내포한다. 그의 메세지는 현세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극단적 결과로서 죽음까지도 수락해야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과감했던 그분의 공적 활동에서 빚어진 결과일 뿐 아니라 그의 메세지의 총괄이요 요약이기도 하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은,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밝혀준 사건이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종말론적 다스림의 도래이다. 이 죽음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현세대의 조건들 한가운데서 실현된 모습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무력 가운데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난 가운데에 富가, 버림받은 가운데에 사랑이, 공허 가운데에 충만이, 그리고 죽음 가운데에 생명이 실현된 모습이다.
3. 구원론적 의의
<예수의 죽음 = 보편적인 구원>의 근거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을 야훼의 종에 관한 넷째 노래에 비추어서 이해하였다. 여기에는 구원적 ?퓜?, 대속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야훼의 수난하는 종에 관한 노래는 1고린 15,3-5에 전해진 오랜 신앙 고백 정식과 성만찬 전승에서 벌써 예수의 죽음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대리 속죄의 죽음으로 해석하는 데 원용되고 있다.
역사-비판적 성서주석학은 이 해석의 정당성을 문제시하였다. 왜냐하면 ipsissima verba에서는 pro multis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만인을 위한 속
죄의 헌신이었던 예수의 죽음에 관한 해석이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신화나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 것이다.
결국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의미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언행, 예수의 기적 등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현장이나 최후의 만찬 때 발설한 단편적인 말씀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의 총괄적인 내용 안에서 즉, 종말론적인 언행 안에서 구원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구원론은 종말론의 결과로서 설명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구원론적 의의를 부여했다는 실증>
1)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에 관한 그의 사신과 연관지어 이해하였다. 그런데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원의 총괄개념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 죽음을 구원론적으로 해석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따라서 예수의 잠재적 그리스도론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예수의 잠재적 구원론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2) 하느님의 다스림은 예수 안에서 봉사라는 모습을 띠고 인격적으로 실현되었다.이 봉사의 개념은 위타적인 존재와 연결된다.이 봉사는 어떤 박애주의적 개념의 봉사가 아니라, 당시의 종교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봉사의 가치를 드러내는 그런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서 마치 시중드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예수는 죄인들, 말단 인생들과 친교를 나눈다. 예수는 이 봉사와 친교를 통해 인간들의 소외를 뿌리로부터 고쳐준다. 예수가 가져다 준 이러한 본연의 해방은 하느님 앞에서의 죄책의 사면이고, 예수가 세워준 새로운 친교는 하느님과의 친교이다. 예수의 이러한 구속적 봉사는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생명의 위험을 무릎써야 하는 것이었다.
과연 예수는 그 삶과 죽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인간이다. 이 위타존재야말로 그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룬다. 그는 이 위타존재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인격적 화신이기 때문이다. 이 위타존재에서 구원론이 결론된다.
이런 배경에서 Mk 10.45의 “대속물”도 ‘예수의 생애 안에 한자리’(Sitz im leben Jesu)를 차지하게 되고, 많은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최후만찬의 말씀도 예수 자신에게까지 소급시킬 수 있는 개연성이 커진다. 그러므로 후대에 형성된 “υπερ-정식”(예수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일련의 표현들)은 그 기본 골격에 관한 한 예수의 지상 생애 자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결론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겼던 순종안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때 예수의 순종적 죽음은 예수의 행적 전체의 수렴이요, 총괄 개념이며 모든 것을 능가하는 마지막 절정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의 구원 의의는 그의 죽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이 구원 의의는 예수의 죽음에서 가장 확실히 드러나고 결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프는 예수의 죽음에서 “넘겨진다”는 의미를 계속 설명한다. 즉 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를 넘겨 주었다, 베드로가 배반했다, 군인에게 넘겨졌다, 빌라도 법정에 넘겨졌다 등등 보프는 넘겨주었다는 의미에서 내어주는 존재가 지니는 위타성과 구원적 의미를 본다.
한편 우리는 예수의 숙명적인 죽음, 순종적인 죽음, 운명의 죽음에서 일의성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의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타종교, 타인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이 일의성 안에 타인의 삶을 함축해야 한다. 함축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십자가, 십자가의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모든 인간 고통의 총체를 예수의 십자가로 읽어낼 때 예수가 우리 고통의 전표이고 수렴이고 우리 고통이 십자가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의 일의성을 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죽음에서 예수의 메시지,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전적인 권한, 전권 요구, 하느님 나라의 은폐성 등이 밝혀진다. 하느님의 비하의 극치인 죽음을 통해서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신다.
십자가는 미완성의 삶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종말론적 의미에서 미완성의 삶이다. 미완성의 실패가 안고 있는 부활의 가능성, 종말론적인 희망, 즉 부활을 내포할 때 한 짝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삶은 미완성이다. 그 미완성의 의미를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고, 미완성을 넘어 선 완성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해주는 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제 6 장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의 증거
( Schema )
예수- 지상, 역사 / 그리스도 - 신앙 exultatus
이 두 부분의 연결이 부활한 그리스도이고 주제이다.
Catholic 의 부활의 입장 :꠆ꠏ부활의 주제가 핵심이 아닌 호교론적으로 논의함
ꠐ 그리스도의 신성 증명 ; 기적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ꠐ 논의함
받아 극복하려고 함. ꠐ 부활 사건 역사내적인 사건이 아닌데 역사내적인
ꠌꠏ 사건으로 격하시킴
결론 ꠆ꠏ 부활의 기록 (두가지 전승을 나타냄 )
ꠐ 1. Kerygma (복음선포)- 신앙의 대상
ꠌꠏ 2. Legendaria (부활 사화)
부활의 교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다.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라는 복음선포와 신앙 고백이 가장 중요한 맥락이다.
+ 빈무덤 사건, 발현사화 (빈무덤 이야기와 부활 케리그마)
두 가지 전승이 결합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마르꼬 16,1-8 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케리그마의 핵심이고 나머지 빈무덤 사건과 발현사화는 부차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문제점은 부활의 첫체험(사도체험)을 기초로해서 교회공동체가 형성된 것이고 사도 체험이 사실이냐 중간적 체험이냐가 논란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카스퍼나 보프는 부활사건을 역사내적 사건이 아니라 초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따라서 이는 완성적인 것을 선취시킴이다. 이 부활사건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이다. 부활사건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 하느님 절대권에 대한 승복을 통해 즉 종말론적인 희망, 우리 삶에 대한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점은 사도 원체험이다.
1) 보았다. 일어섰다. -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2) 부활사건 - 사도들 자신들도 고민함 ( 믿음으로의 과정이 있다. 우리와의 고민
과 같다.)
3) 영지주의, 이원론 배격을 위해 - 부활 후 사도들과의 만남을 사실적으로 서술
함- 이것은 legendaria 이다.
4) 투신의 의미로써 부활이 확인됨 - 부활에 대한 개념 정화시킬 수 있음
5) 메시지가 전달될 때 - 눈뜸, 새로운 깨달음 ☞ 새로운 세계가 펼쳐짐
1. 전승의 실태
① 예수의 죽음은 철저한 실패인데 여기에는 의인의 죽음을 대속의 가치가 있다라는 유다이즘이 깔려있다.
② 예수의 메시지, 가르침을 예수의 인격과 동일시한다. 또한 비참을 겪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을 증언함 - 새로운 눈뜸
③ 교회의 근거와 신앙의 근거를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즉 하느님께서 죽은자 예수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④ 복음을 통해서 사도들이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듣고 불신하고 거부하는 행위는 부활의 신비를 더욱 진하게 해준다. 즉 사도들의 고민이 부활의 신비를 더욱 진하게 해준다.
* 부활증언의 難点
(1) 수난 4 복음은 일치점이 많다. 그러나 부활 체험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ㄱ. 케리그마의 전통 ꠆ꠏ 전례를 통한 신앙고백과 전례의 정식
ꠉꠏ 간결하고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오래된
ꠌꠏ 신앙의 정식이므로 구속력을 지님
cf) 엠마오스의 제자 - 식탁의 자리에서 감지하고 체험된 주님이시다.
초대 교회의 긴장감 고민 표현
1.Cor.15,3 - 8 (원천적인 신앙 고백 형태) ; 이 전승은 40-30년 말로 소급됨
( 케리그마 전승의 핵심,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 발현에 대한 내용 없는 신앙의 고백의 형태 : 로마 1,3 ; 필립 2,6
- 그리스도가 주인이라고 고백함
ㄴ. 레젠다리아 - 마르꼬 16,18( 합쳐야 하는 과정 주목 필요 )
cf) 카스퍼는 케리그마 중심; 베드로, 1고린토 15,3 ; 사도행전의 증언
여성 신학에서는 케리그마에 이의제기가 레젠다리아이다. 케리그마는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적 복음 선포라면서 4 복음서 작가들을 반발하면 부활 증언은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변증론적으로 여성이 제기함
① 여인을 언급함
② 발현 장소 ; 마태오, 마르꼬 = 갈릴레아
루까 , 요한 = 예루살렘
루까와 마르꼬의 신학의 차이일 수 있다.
③ 사도 바울의 교계제도의 반대하는 세족례를 제시, 봉사하는 예수제시
④ 빈무덤 사건 - 역사적 사건의 진위성
ㄱ. Camperhausen ( 역사 비판적인 방법 )
- 빈무덤이 부활신앙을 가져 왔고 부활신앙이 천사들의 발현을 가져 왔다라고 이야기함,즉 빈무덤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므로 부활 사건이라 개진함
ㄴ. 반대되는 의미는 부활에 대한 레젠다리아는 케리그마에 대해 2차적이다. 즉 레젠다리아라는 것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현실성, 역사성, 육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발현사화가 만들어졌다. - 교의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발현사화가 생성됨
ㄷ. 레젠다리아를 강조할 때 부활 사건을 역사내적 사건으로 격하시킴
ㄹ. 캄페르하우센은 역사적 사건을 강조했으나 결과적으로 초자연적인 사건이 자연 사건으로 격하되는 실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ㅁ. 무덤 사화 결과( P.222 참조 )
-. 4 복음서 상호 일치하지 않음 -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님을 증명
-. 마르꼬 16,1-8 가장 오래된 전승(마태,루까가 마르꼬와 일치할때만상호일치)
마르꼬 복음의 초반부가 가장 중요한 전승이다.(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님 - 문학적으로 긴장을 보여주기 위해 서술했다. )
-. 마르꼬 전승이전에로 소급가능
마르꼬 이후 베드로 외경 ; 유치하다. 그러므로 역으로 소급하여 생각하면 부활에 대한 핵심요소가 발견될 수 있다. - 마르꼬 이전으로 소급해야 한다.
양식사적으로 볼 때, 케리그마의 핵심 즉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표현이 그 다음에 징표로서 빈무덤으로 이어짐 ; 빈무덤이 부활의 증거는 아니다. 그러므로 빈무덤은 의식속에 담겨진 원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마르꼬 16,1-8 ( 의식 원인담 )
역사 혹은 비역사적인 사화가 아님 -초월하는 것이다.
① 개연성을 보여 줌 ( 어떤 변화가 있었다라는 것을 일깨워줌)
② 빈무덤이 역사적 사실과 부활 사건 속에 어떤 관계가 있다. 하나의 징표로서 제시해야 한다. 즉 빈무덤 때문에 예수께서 부활했다라는 논증은 아니다. 호교론에서 빈무덤과 여성증언이라는 이유로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활에 대한 진의를 흐리게 한다.
결론적으로 카스퍼는 두개의 전승이 마르꼬에 의해 연결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베드로에게 전해준 것에서 루까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변하게 되고, 요한에서는 아예 예루살렘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무덤사화는 부활신앙을 갖기 위한 징표로 씌여진 것이다.
공통점은 어떤 특정한 사람한테 나타났다는 것. 즉 그분이 살아 있는 분으로 보여 주셨고 부활하신 분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인의 고백이다. ( 표현== 내용)
2. 해석학적인 전제들
-. 부활 사건은 초역사적 사건인데 이의 신학적 논증이 가능한가 ? 초역사적 사건의 진위성의 문제는 과거 가톨릭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그러나,강생의 끝으로서 부활로 이해한 것은 하느님의 하강의 재상승으로서 부활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① 소극적 그리스도 - 사기설 주장, 예수의 죽음은 거짓이다.
* 라이마르스 - 제거설, 착오설 , 가사설, 진화설 등이 있다.
당시 종교에 대한 압축으로서 구약의 약속이든지 그리스 신화와 미래 종교의가르침이든지 후기 묵시문학의 하늘의 승천이라는 것과 연결되면서 예수가 확인해 주었다.
* 환시설 ; 제자들의 주관적인 착각이거나 환시이다. 주관적인 체험이었다.
* 가설들의 공통점 - 좁은 의미로서 사실성에 대한 증명이다.
사학적, 논리학적인 학적 논의는 되지 않았다.
② 적극적 그리스도론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빈무덤 강조함 - 부활논증의 핵심이 뒤바뀌어 지엽적 이차적인 문화하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빈무덤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활신앙이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신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빈무덤의 의미 )
K. Barth 변증법적인 신학 ( 종말론적 신학 )
-. “이루어졌지만 아직 아니”라는 형식, 즉 종말론은 역사의 끝이 아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말씀과 다스림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역사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하다. 상징, 유비이다. 빈무덤은 그저 부수적 현상이다.
⇒가현설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Bultmann
-. 바르트와 같이 부활을 객관화하지 않았다. 슐라이허마허와 딜테이의 학설을 발전시킴. 정신의학적 용어적 이해라는 매개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고 이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활은 이해의 대상이지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조직신학이 슐라이허마허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신앙론- 주관 신앙 체험의 해석이며 하이덱거의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부활신앙은 십자가의 구원사건으로서, 종말론적 의미가 나에게 주는 의미의 본질 때문에 복음선포가 가능하다. 교회가 복음선포를 하고 있으므로 부활 신앙은 교회의 시비에 의해서 확인된다. 이때 그리스도는 없고 케리그마의 당담자인 교회만이 남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는 케리그마 속에서 드러난다.결과적으로 사건 전승과 교회 안에서만 부활신앙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역사적인 질문이 무의미하고, 실존적 종말론적인 해석만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사건과 부활신앙이 동일시 되면 교회론적으로 설명한다. ⇒ 그리스도의 초월성이 훼손당한다.
* 에베린 , 마르크센 - ‘보았다’는 체험이 ‘부활했다’는 신앙으로 확신되어갔다.
* 마르크센 -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지상생활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즉 불트만은 부활은 십자가의 종말론적 의미로 설명하는 반면 마르크샌은 모든 설명의 중심을 지상 예수의 업적의 연장으로 설명한다.
* 페쉬 - 진화설의 영향을 받아 바르트, 불트만을 넘어선다.
* 판넨베르그 - 역사 현장의 계시이므로 모든 것이 역사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빈무덤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설명하다 보니 종말론적 관점에서 설명이 빈약하다.
결론 :
가톨릭 학자들의 시도 ( p.240)
역사적 사건은 다의적이기 때문에 징표라는 범주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노력함. 즉 의미만 담겨진 말이 사건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징표적 의미를 인정한 과학적인 증명은 아닐지라도 빈무덤은 가현설 배제의미가 담겨져 있다.
칼 바르트의 종말론적 해석 -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중요하지 역사적 사실 필요하지 않다.
가톨릭 - 이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설명 가능해야 한다.
죽음으로 생명의 지속성이 인간에 근거하지 못하게 되는데, 하느님만이 이것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부활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 인간학적 견해 -------------------
* 칼 라너 , 보로스 ; 자유를 통해서 궁극적인 것으로 향해 나가고 있다.
* 라씽어 ; 사랑의 완성으로 부활 이해
* 판넨베르그 ; 희망의 현상학으로 부활 이해
* 몰트만 ; 정의의 구현실현에 대한 희망에 대한 확인이 부활이다.
-> 인간의 의미는 역사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종말론적으로 귀결되고 궁극적 의미가 인간에게 있다.
3. 신학적 근거 제시 - 부활과 발현 설명
* 하르낙 ; 예수께서 베드로 다음 야곱, 열두 사도, 바울 순으로의 발현은 초기 교회의 지도체계를 이해해간 변화과정이다. 부활은 역사적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교회의 핵심적 주체의 위치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부활 신앙을 전하는 주체 권한을 가지고 있다. 즉 발전과 사명이 연관을 가지고 있다. 부활하신 다음에 파견소명을 주신다.
⇒ 파견을 따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이며 기능적으로 초기 교회의 지도권의 변화되는 과정으로 설명할 때, 인격적인 해석과 반립하게 된다.
-. 결정적인 용어; ꡔ 보다 ꡕ 라는 용어가 가지는 의미
① 보였다 : 이 경우는 제자들이 주인공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졌다.
②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서 예수님을 보여 주셨다.
③ 중간동태 : 예수자신이 자신을 보여 주셨다.
여기서, ②,③의 의미 : 하느님 신현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은폐성과 신비성이 구약의 하느님의 신현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부활을 하느님의 신현으로 이해할 때 모든 문제 해결된다. 사실이면서도 역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신현으로 이해한다.
* 마르크센 : 보다 라는 체험은 부활하신 분이 아닌 예수님을 보았던 것. ‘보다’ 라는 체험의 틀이 바뀌어서 부활로 이해됨. 예수의 부활은 보았다라는 체험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보다’는 ‘그분을 일으켜 세우셨다’라는 말과 함께 이해할 때 의미가 확인된다.
출발점은 제자들이 예수를 보았다라고 한 것에서 시작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1 장에서 나타난 바울의 자기의 개인의 현실(묵시문학) 부활이 종말론적 사건의 일환으로 하느님의 업적, 종말론의 앞지른 사건, 묵시문학을 체험한 사건으로 이해할 때 부활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즉, 하느님께서 영광으로서의 십자가의 예수를 확인시켜주었고 하느님께서 예수를 높이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셨다는 의미를 묵시문학으로 이해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가능하다. (p.248)
복음에 발현기사에서 예수께서는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있다.
결론 :
① 부활 발현은 결국 물적 증거의 대상이 아니다. 선택해야할 입장의 메시지이다.
② 부활하신 주님과의 체험은 하느님과의 만남( 신체험 )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종말론적 계시이기도 하다.하느님만이 우리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의 마지막 근거이며, 구체적으로 예수가 그 근거가 되고 있고 종말론의 선취자로서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③ 첫제자들의 부활체험이 우리 신앙의 기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첫 증언자들의 체험과 그 전승을 통해서만이 매개된다. 그래서 복음선포의 증언자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구별되어 있다. 도식적인 설명인데 왜냐하면 첫 증언자들과 우리들을 동일선상에 놓아야지 구별된 쪽으로 본다면 우리의 각자의 비약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매개시키면서 살아지는 의미이다. 즉 증언자들이 증언해 주면서 증언의 의미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카스퍼는 소홀히 하고 있다. 교회론적 설명 속에 즉 케리그마로 남지만 교회안에서 예수는 부활하고 있다. 그래서, 예배와 전례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것이 객관적이냐 그렇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나 예수를 만날 ?育품? 있느냐 없냐라는 것이 마지막 문제이다.
(7장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의 내용) 부분은 따로 정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뒷부분은 중요하니 꼭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간단명료한 정리가 되지 못한점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음부터는 우리 모두가 강의록 정리에 좀 성실히 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 3 부 그리스도의 신비
제 1장 하느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
1.자기비허의 하느님의 아들(필립 2,5-8)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신약성서는 여러가지 이름으로 답하고 있다. 메시아, 예언자, 구세주,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그것이다. 그중 가장 적절하다고 판명된 칭호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 아드님에 관한 하느님의 복음’(로마1,3.9; 2고린1,19; 갈라1,16) 이라는 신앙고백 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견해가 종교사학파와 비신화화를 주장하는 그룹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이면에 아직 미개하고 미숙한 원시사회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구약의 비신화화를 바탕으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카스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장에서 자신의 논리로 전개하고 있다. 이것의 핵심적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미 구약에서 부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왕, 예언자, 사제에게 주어진 칭호였다. 그러나 이렇게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 문화권에서 말하는 개념 즉,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神子의 개념 표현과는 다르다.
스토아, 그리스 철학계의 신화적 표현은 실제 출산의 과정을 통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
성서는 아들의 의미가 출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파견의 사명, 봉사의 임무를 줌으로써 형성되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카스퍼는 주장하고 있다. 구약에서 부여한 특수 사명이란 선택에 의한 파견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봉사의 의미로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Fillus Dei --kenosis
출발 : 기능적인 그리스도론
Kenosis로서의 하느님의 아들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능적인 그리스도론이 항상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의 기능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카스퍼는 기능적인 그리스도론이라고 한다. 우선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해하고 고백하게 되는 첫번째 단계는 그분의 기능을 볼 때 시작되는데 이것이 이 章을 해독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그리스도론을 상기하면된다. 유스티누스의 그리스도론은 Logos가 그 자체로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관련될 때만 그 위격성을 갖는다고 본다. 이러한 전개는 본의아니게 종속론에 빠지게 된다.
다음 단계는 카스퍼에 의하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본질을 똑같이 한다는 본질적 그리스도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의 철학사상, 관념론과 연결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점차 관념화 철학화 하게 된다.
따라서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것을 문제화하여 Substantia개념에 대치되는 Persona개념을 형성하면서 본질적 그리스도론에 제동을 걸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능적으로 출발한 그리스도론이 본질에 귀의하면서 우리와 무관한 본체적인것으로 사변화되고 헬레니즘화 될 때, 초기의 교부들은 예수의 역사적 삶과 죽음이 우리를 구원한 측면을 고려하여 비판적으로 그분의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Persona개념을 도입하여 위격적인 그리스도론으로 다시 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카스퍼는 이러한 일련의 진전과정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첫째,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기능에 주목하는 기능적인 그리스도론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뽑히었고 사명을 받아 봉사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도록 파견된 의미로서 이해하는 그리스도론인 것이다.
둘째, 하느님의 속성에 주목하면서 현실과 무관한 철학적 사변적인 본질적 그리스도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주치는 것이 유스티누스의 로고스론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의 싹이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볼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유일회성)이 항상 확인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기능적 그리스도론과 마찰을 빚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스토아 철학적 요소를 흡수하면서 그리스도를 원초적 로고스로 보게된다. 그러다보니 그 자체가 본질적인 것으로 설명되면서 헬레니즘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에 제동을 거는 것이 바로 니체아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그 이후의 공의회의 선택인데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세째, 이러한 결과로 위격적 그리스도론이 펼쳐지게 되었다.
여기서 예수의 독특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으로 대두되게 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전권요구는 타종교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칭호도 이러한 전권요구에 합당한 것은 없다. 카스퍼는 예수의 구체적인 역사, 삶과 죽음, 존재자체를 하느님께 대한 설명으로 본다. 다른 말로 예수는 하느님의 성사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수 있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원성사이며 바로 하느님을 해석해주는 언어인 것이다. 여기서 카스퍼는 요한복음 14장 9절 ‘나를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를 제시한다. 이런 식의 내용은 칼 라너의 표현과 연결시키면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성서의 점진적 설명
1)공관복음을 볼 때 다소 진전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론적 반성이라고 할수 있는 부분이다. 요르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암시되고 있다.
2)마르코 복음에서 전체적인 복음의 서두에 신앙고백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미 예수를 정의할 때 Filius Dei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마르코 복음 첫머리는 복음 전체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총체적인 언명을 보여준다.
3)루가복음에서 마리아의 잉태 대목이 바로 성령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성서의 구성상으로 볼 때 마지막 결론인데 이것으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신한 부활이후의 신앙고백을 잘 요약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초기교회의 이의제기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단으로 단죄된 에비온파, 양자설, 도체티즘이 그것이다.
에비온파는 유다교 문화권에서 형성된 이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종교분파이다. 이에 의하면 예수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나 도덕적 시련을 이겨낸 다음에야 하느님의 양자로서 확인되었다고 주장한다.
카스퍼는 그러나 부활 이전의 예수의 전권 요구에 대해서 이 에비온파의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반박한다. 부활 이후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입양되었다면 부활 이전의 예수의 지상생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모든 이의 학설에는 일리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 이유는 성서의 종말론적인 실재이해는 초역사적인 본질 개념을 잘 모르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즉 존재를 본질로 이해하지 않고 실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입양은 예수의 존재 자체를 하느님의 실재로 이해할 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고 카스퍼는 설명한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기능적인 그리스도론이 본질적인 그리스도론으로 전이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신약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 성변용(聖變容)의 예수, 성신에 의한 잉태 등의 내용은 기능에서 본질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접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본질적 그리스도론 다음 단계에서 는 파견된 그리스도론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본질적 그리스도론만 이야기하다 보면 사변이나 관념에 불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예를 카스퍼는 요한복음을 들어 설명해 나가고 있다. 요한은 본질적이라기 보다는 인간과 연결된 구원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하며 파견된 그리스도론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 예수의 본질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며, 또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여백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뜻에 대한 순종의 의미로서 구원론적인 그리스도론을 요한 사도가 펼치면서 나름대로 종합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울로는 모든 것을 십자가로 풀려고 한다. 결국 십자가가 그리스도교 핵심, 신학의 기본열쇠가 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결의, 선택, 결단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말씀, 계시의 총괄적인 수렴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여기서의 ‘반드시’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묵시문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달리말하자면, 주어진 현실을 수렴하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다음에 사도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헌신정식’, 즉 Christus Traditus, 넘겨진, 전달된 그리스도, 헌신적인 위타적인 의미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기능적 그리스도론 - 본질적 그리스도론 - 파견적,구원적 그리스도론 - 십자가의 그리스도론으로 진전되어 감을 알 수 있다. Christus Traditus(넘겨진,전달된,팔려진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해석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있어서 십자가의 죽음?? 주역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말해서 역사의 주관자가 하느님이라는 뜻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역설(paradox)드러난다. ‘죽어야만 살리라’,‘죽음을 통해서만 부활하리라’는 역설을 통한 설명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역설은 그리스적 신관, 또는 평범한 신관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치욕, 부끄러움, 좌절, 실패의 표현인데 이것을 통해 부활이 이뤄지며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것은 Kenosis의 신비로 이해해야만 수용 가능할 것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의지가 꼭 관철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이다. 이 말을 현실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앞에 주어진 고통, 좌절, 비참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뛰어넘는 결단으로 십자가를 이해할 때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는 것이 카스퍼의 성서적 이해라고 하겠다.
때문에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단순한 해석의 차원이 아니며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내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구체적인 체험과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지 단순하게 어떤 의미만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이해가 역사 전체, 두주관 젃체를 바꾸어 놓았다는데 십자가의 혁명원리가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카스퍼의 견해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결국 신관에 대한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은 신관의 위기를 초래했다. 혁명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해되는 하느님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모험, 도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카스퍼는 암시하고 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자신의 전존재를 건 결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전체로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며, 실제로 오늘날의 무신적 성향은 이런 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이것의 수용은 역사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모험의 결단으로서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카스퍼의 묵상결과인 것이다.
그의 결론은
1)십자가와 부활에 입각한 그리스도론적 해석은 하느님 이해에 대한 위기와 함께 전우주와 역사를 새롭게 하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2)무력(無力)가운데 위력(威力), 무능함 가운데 전능성, 시간안에 초월성, 불변성안에 가변성을 드러내는 하느님은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라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수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3)따라서 하느님은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내재하시는 그분을 나자렛의 예수라는 구체적인 인물의 역사와 운명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뿐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라고 일컫는다. 하느님의 초월성이 예수 안에 내재되어 있고 그 예수가 바로 교회 안에, 역사 안에 늘 현존하고 있다는 도식이 설명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아들이라는 논리가 이어서 계속되게 된다.
카스퍼는 요한복음 1장과 8장을 주석하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논점이 기능언명에서 본질언명으로 전이되고 있다. 예수의 기능을 언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에 따라 기능적 그리스도론은 필연적으로 본질적 그리스도론으로 옮아가야 한다는 시각으로 이 부분을 주석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카스퍼는 심위일체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기능적인 설명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엮어가고 있다. 그의 설명은 순차적인,시간적인,종속적인 설명을 넘어서서 병렬적으로 언급하면서 창조하신 하느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우리들 안에 사랑으로 현존하시는 성신의 역할을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대내적인 심위일체가 아니라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칼 라너의 견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카스퍼도 성삼론을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구원사적인 의미에서 인간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위와같은 내용이 Kenosis, 비움을 통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설명이다. 즉 그분의 기능을 통하여 본질로 향하고자하는 움직임을 카스퍼가 요약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십자가의 역설이 하느님의 구원계획, 결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 하겠다.
** 본 章 정리 **
Kasper의 Filius Dei로서의 신앙고백은 과거 그리스도론보다 진취적인 면을 갖는다.
그는 3가지 관점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가, 자기 비허(Kenosis)로서의 그리스도인데 이는 과거 본질적 그리스도론을 넘어서면서 기능적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위격적 그리스도론까지 이끌며 현대신학에서의 새 신학 방향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또한 유럽신학의 한계를 드러내므로, Boff의 해방론적 그리스도론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둘째는,Aeternitas(영원으로부터의 하느님의 아들)
세째는,Pleroma(시간의 충만으로서의 하느님의 아들)
이러한 세 관점들은 과거 스콜라 신학의 관념적 그리스도론을 극복하면서 우리 시대에 맞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론을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역사,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보완하고 특별히 십자가 신학, 나아가 신비(Mysterium)가 중재 된다. 그러면서 열쇠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즉, 삼위 일체의 대내적 관계의 의미가 역사내의 진입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간 관계로 볼 때 삼위 일체적 의미가 있지만 성삼 내적인 관계에서 볼 때는 세 위격(tres persone)의 구별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라고 라너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그 한계를 말한다. 그래서 그 해결 방법을 역동적 관계속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선재성에서 위격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첫번째 항목에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근거를 그분의 케노시스에 둔것은, 인간 삶의 근원인 것과 맥을 같이한다.
2. 영원으로부터의 하느님 아들 (aeternitas)
두번째 항목에서, 영원성을 지님은 시간의 연장선, 완성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고 카스퍼는 말한다. 나름대로 先在性, 즉 하느님의 본질에 기원을 둔 거기에서 귀납적으로 얻어진 결론이 아니라 우리가 알기전에 시작된 무한성을 강조한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인간의 이성, 언어로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가 고민이 된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고 이러한 호칭과 하느님께 대한 관계 설정은 하느님 본질에 속했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종말론적 의미, 종말론적 성격 때문에 예수의 본질과 선재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그의 先在性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성격, 그분의 부활 또는 역으로 세례, 지상생활에서의 가르침의 결론으로서의 선재성이 아닌, 신앙에서 소급되는 영원성.선재성이 아닌, 바로 이미 전제된 (필립 2,6-8) 주님이라는 고백과 선재성은 같은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카스퍼는 성서를 인용하면서 제시한다. 즉, 도미누스,퀴리오스는 선재적인 주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단어 의미는 존재 의미와 함께 본질을 언명하는것일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과 형상을 같이함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선언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선재성이 우리의 구원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재성이라는 것이 예수의 지상 생활에서의 결론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에게서 연유된 것에서 이해해야 한다.
카스퍼는 또한 선재란 의미와 함께 파견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의 인격과 운명은 오히려 세계내적 역사의 연관에 그 기원이 있다기 보다 세계내적으로 연역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느님은 몸소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 아들의 선재에 관한 언명의 의도는 우리 자신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와 우리의 구원에 그 궁극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주님으로 고백한 그분이 어째서 선재적인 분일 수 있겠는가 ?
예수의 운명, 인격이 지상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내적 역사와 연결된 또는 파악된 것만은 아니다. 예수의 존재 양식, 삶 자체가 바로 하느님 설명의 표현 방식이다. 그래서 선재라는 주제-그리스도의 선재성은 다만 표상을 채택했다해도 영지주의나 동방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일회적인 사건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서 자신을 건네주셨고 인간과 중재하셨다. 따라서 예수를 파악하는 것은 하느님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즉 예수가 하느님의 본질을 정의해 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선재적인 언명은 하느님 개념의 포괄적 해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다.
성서는 사실상 하느님과 역사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특별히 그리스 철학에서 나타나고 있던 초월적, 관념적 신개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신학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신관이 지금까지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에 영향을 주어왔다는 바로 여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다.
그런데 성서의 하느님은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영원성, 선재성의 의미는 그리스 철학 개념과 전혀 다르다. 즉 성서적 의미의 영원성은 영원이 시간안에 잠입했다는 의미이다. 반면 그리스 철학에서는 시간을 넘는 무관한 무한의미로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를 제거해야 한다.
성서적 하느님은 바로 출애급 사건에서 처럼 울부짖고 있는 백성과 함께하는 역사내적 시간안에 개입하는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원성이라는 것은 시간안에서 인간에게 신의를 지키시는 하느님이다. 여기서 그분께 대한 희망이 싹틀수 있다.
그러면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consubstantia)
1) 그것은 전례적 고백으로서 추상적 의미가 아니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구세사적 고백의 교회 전승이었다.
2) 따라서 이것은 빈말이 아니고 하느님과 직결된 설명이었으며 사변적 설명에 국한되지 않은 우리에게 필요한 응답으로서-구원론적 의미로 본질을 같이 했다는 의미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Persona개념은 substantia개념을 보완시켜 주었다. 즉 본질적 신론이 위격적 신론에 의해 보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본성이 아니라 인격 내지 위격이야말로 궁극의 것이요 최고의 것이라는 사유의 방향전환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형이상학적 본질사유가 신학안으로 들어와서는 마침내 성서의 종말론적이요 구세사적 사고를 멀리 내쫓게 되었다.
이렇게 초기 교회의 형이상학이 지배적이던 신학을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다시 정립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톨릭은 너무 쉽게 전례등을 통해 매개하였다. 그는 이러한 형식성을 배제하면서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믿음,신앙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에서는 이것이 다시 형식화되었다. 한편 루터는 믿음은 예수의 죽음,십자가를 통한 무한한 심연과 연결되었다고 하면서 새 전기를 마련한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속성에 참여하는 한 몫을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와,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시 되며,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와 같은 역사상의 예수상과 조화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근세 이후 헤겔의 변증론적 설명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큰 변화를 주었다. 즉 그의 제3자 통합윈리에 의해 성서원리가 재해석된다. 달리 말해 절대정신이 타자안에서 또한 그 타자를 위하여 자신을 내놓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을 객체화시킨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대정신의 본질에 속한다. 헤겔에게서 이것-절대정신-이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서 말씀의 철학적 해석이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의 고백이 삼위일체와 영원성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십자가가 걸림돌이 된다. 즉 십자가는 사변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리고 변증법적으로 지양되고 화해되어 버리고 만다.
따라서 카스퍼는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함께 자유의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격성은 헤겔의 변증론적 설명에 의해 한계를 지니면서 동시에 초월성을 지닌다고 본다. 또한 이것은 스콜라 철학에서 무시되었던 사랑의 관계 즉 사변적 접근에서 하느님을 역동적 관계로 이해할때 보완될 수 있다. 이것은 영원이 인간 세계에 개입한 의미, 선재적 그리스도가 시간안의 예수로 다가온 시간을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영원으로부터의 하느님의 아들, 선재적 그리스도가 풍요롭게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사랑의 역동적 관계를 바로 본질적 그리스도론에서 위격적 그리스도론, 현실안에 다가온 영원의 찬미로 이해할때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참된 영원성, 역사 개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시간의 충만으로서의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
여기서는 중개 사상이 핵심이 된다. 우주적 창조, 우주적 중개 사상이 성서 전반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중개 사상은 구속적 의미를 통해서만 확인되며 선재적 사상과 근원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구약의 지혜 사상에서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 . 그리고 신약 성서 Q자료에서도 지혜적 그리스도론을 펼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지혜사상은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도움되었다. 그러나 Sophia가 그리스 철학에 근거를 두기에 세속적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여기에서 해방신학자에 의한 해방론적 그리스도론이 보완되어야한다. 하지만 현실 개혁과 그리스도의 삶을 동일시 할 때 그리스도가 본래 추구했던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서 중개 사상이 흐려질수 있다. 결국 그리스도의 구원이 현실해방과 단순히 동일시 될수 있는가 하며 카스퍼는 염려한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합(Intigratio)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그 통합사상이 어떤 분명한 선택없이 가능한가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결국 카스퍼는 통합을 이야기 하면서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는 하느님 사랑의 초과 실현 신앙,은총으로 이해할수 있는 열매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든 것을 푸는 열쇠라고 한다.
결국 현실의 비참한 상황에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떻게 관계될 수 있는가,여전히 해방으로 다가오는가가 우리의 물음이다. 카스퍼를 통해 이러한 물음-구조적 불의-에 대해 도외시하고 있는 유럽 신학의 한계를 볼수 있다 (2,3항이 결국 관념에 머무름)
( *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근거가 무었인가? 참된 뜻은 무엇인가? )
제 2 장 인간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
(Fillus homnis)
* 카스퍼는 오늘의 그리스도론에서부터 문제 제기.
먼저 성서의 예수님 -> 죽음과 부활
초기 교회의 고백 신조 -> “Deus - Homo 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역사적, 철학적, 사변적으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주로 다룸
1)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Filius Dei)
2)인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Filius hominis)
3)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Mediator)
* 과거에는 스콜라 신학적인 그리스도론이었다.
신앙고백 ; 예수 그리스도 = Deus - Homo
성서, 공의회의 신조(니체아,콘스탄티노플, 칼체톤); 2-5세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 정의!
문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깊이 다루지 않았다. -> 제2차 바티칸 이후 개혁
** 오늘의 주제 = 1960년대 그리스도론의 핵심 주제;Deus - Homo 로서의 그리스도
그러나 너무 관념적, 그리스 철학적 사변적이었다. 또 개신교에서는 깊이있게 다루었으나 가톨릭은 등한시하였다. 2차 바티칸에 와서야 이 문제를 다룬다.
## 사람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 ##
1)참인간 그리스도와 우리 구원의 구체성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2)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우리 구원의 인간성 ꠐ
3)위타인간 그리스도와 구원에 있어서의 연대성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 을 다루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해방성이 배제되어 있다. 카스퍼는 연대성 안에서의 구원성에만 머물렀다. ( 연대성에는 해방성이 필연적인 것이다.)
1. 참 인간 그리스도와 우리 구원의 구체성
-- 강생, 육화의 역사성 강조
구체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강생, 즉 Incarnatio의 역사성, 구체성이다. 이 자체가 신비이고 이 자체가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타종교, 특히 불교와의 대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그렇다면 강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과 인간이 결합하였다는 이 문제에 대한 이해에는 답이 다양한데, 영지주의가 가장 큰 도전 자료를 제시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Docetism(가현론)이다.
## 가현론 :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왔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의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럴때 인간의 신성이 나타난다는 것.
** 우리는 영-육의 2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여기서 카스퍼는 육체성의 두드러진 의미를 철학,사변, 심리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강생의 몰이해를 지적한다. 즉 육체를 Excarnatio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육체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 표출은 불가하다. 육체와 정신은 불가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Incarnatio를 통해서 즉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 구체적,육체, 역사성의 가치를 하느님은 껴안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성의 부정적인 면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죄(罪)론
죄는 인간과 하느님, 인간 상호, 자연과의 관계를 깨뜨려 인간을 소외시킨다.
구원이란 이런 소외된 관계를 정리하여 해방시키는 것이다.
2.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우리 구원의 연대성
** 사도 바오로의 인간성 설명 ** 보프의 설명
- 순종(obedentia) 강조 - 기계적으로 이해한 순종 거부
-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예수는 법과 - 예수는 그런 순종을 한 것이 아
전통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니고 순전히 자유스러웠던 것이
-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완전한 삶 다. 철저한 자유의 삶-하느님의
뜻 안에서.
진리에 대한 순종은 바로 불의에 대한 거부와 싸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의 인간성이 보여주고 있다.
카스퍼는 아담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는 데 특히 이레네우스의 수렴사상(Recapitulati)으로 설명.
이레네우스는 인간에 있어 모든 것은 잘못 된 것에 역관계를 이루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수렴한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가 부활해내고, 하와가 실패한 것을 마리아가 보완한다는 철저한 대속사상, 수렴사상, 보속사상이 이레네우스 신학이 중추 내용이다.
가현설에서는 로고스의 강생을 강조했는데 영육의 일치 즉 구약과 신약 이전의 영육 일치 사상이 강생과 연결될 때 영육의 도식이 “로고스 + 육”의 일치라는 개념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냐시오와 이레네우스는 예수의 강생을 통하여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고백에 이른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신앙고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 도식을 떼르뚤리아누스는 “신성 + 인성”의 조화로 종합한다. 즉 육의 개념의 부정을 ?曼므歐? 위해 강생을 divinitas + huminitas 결합이라 설명. 여기서 육의 개념을 huminitas라 함으로써 조금 더 넓은 개념으로 확산된다. 이는 라틴교회의 정의가 된다. 동방교회 역시 하느님이 육체를 취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가 문제였다. 즉 로고스를 인간에 비유할 때 Anima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럴때 그리스도의 영혼은 무엇이고 로고스는 무엇인가? 였다.
* 여기서 아리우스 이단이 등장한다. 아리우스는 입양설로 인간적 접근을 시도한다.
입양설로 하느님이 사람이 된 것이나 인간이 하느님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그분의 천재적 영성과 노력으로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양자로 높여졌고, 우리에게 모범을 제시한 것이지 그 자체가 하느님은 아니다.
-> 이런 면에서 이는 하강적 그리스도론이라 할 수 있다. 밑으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의 결합으로 매력을 준다. 또한 이해가 쉽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카스퍼는 입양설을 단죄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핵심을 몰랐다고 지적하면서 아리우스는 단지 로고스를 아니마로 대치시킨 것이 오류였다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예수가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었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것은 신성의 거부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구체적인 형태가 로고스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다만 로고스가 영혼의 역할을 한다고 보기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양자설을 배격하고 하느님의 친자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강생교리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아뽈리나리우스 그리스도의 신성을 견지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을 로고스가 보완했다고 본다. 이것은 플라톤의 3분법적 내용을 이용한 것이다. 즉 플라톤은 인간을 “1)corpus 2)psyche-감각혼 3)pneuma-정신적 혼 ”로 구분한다. 이것을 이용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밝힌다. 즉 pneuma의 역할을 로고스가 대체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무신론적 인간론과 이해를 같이하는 것이다.
철학적 문제 - 두개의 완전한 실체 즉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합치될 수 있다.
신학적 문제 - 인간 정신을 예수가 지녔다면 죄성을 메꾸어줄 수 있어야하는데 이것이 로고스다. 즉 예수의 완전성을 로고스가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론에서 육체는 단지 도구로 이용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 아리우스파의 사상은 독일 인도 쪽에 널리 퍼짐.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한 이런 사상이 퍼진 지역에서 정통 그리스도론과 맞서게됨.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 Deus 칭호 즉 Deus-Christ가 강조되었다. 이는 곧 반아리우스의 반사작용으로 신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 아뽈리나리즘을 그리스도교 사상의 헬레니즘화로 본다.
## 인간 이해에 대한 카스퍼의 요약
1.인간존재란 일체를 타자에게서 받아가는 가운데 비로소 존립할 수 있는 존재요, 남을 힘입은 존재이며 그러기에 감사로이 영위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제 스스로 제 자신의 본질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고 제 현존재의 실현을 하나의 선물로서만 받을 수 있다. 즉 은총과 구원이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선물이다. 은총은 곧 우리가 인간일수 있게 되었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것을 의미하며, 인간 존재의 최고의 가능성 및 최고의 실현은 바로 성찬례이다.
2.인간의 자유는 해방된 자유요 놓여있는 자유이다. 즉 조건지워진 자유이다. 하느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자유의 유대 안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일체의 세계내적,절대성 주장으로 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고 동시에 세상을 위한 투신과 참여의 자유를 얻게 된다.
3.인간의 존재는 순종에서 완성된다. 인간은 듣는 가운데 존재하고 이 수용은 동시에 고도의 능동서, 다른 사람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호응함이고, 봉사하려는 모든 것으로, 자유는 결코 자의가 아니다. 즉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자유이며 이런 자유에 입각한 순응성은 아무런 저의없는 개방성이요 지속적인 호의이며 호소와 요청에 대한 대기성이다.
4. 신앙은 그 자체가 인간의 구원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진 구원의 가능성은 택일의 길을 터 주었고 신앙으로 선택될 수 있는 구원은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고 하느님이 독생성자의 본질과 형상에 참여하도록 정명된 것이다.
=> 결국 이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다.”라는 정식을 끌어낼 수 있다.
3.위타인간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있어서 의 연대성
- 인간 자체의 사회성, 연대성, 대속사상이 주제
*신학자들의 문제: 예수가 지상에서 사실 때 이런 사회성과 연대성, 또 대속사상을 완전히 이해했는가?
본회퍼는 “위타적인 예수, 공존(公存)의 예수”사상에서 구원사상을 펼친다.
카스퍼: 구원론적인 그리스도론을 펼침
대리 대속사상; 구약의 남은 자 사상(남은 자들로 인해 전체 이스라엘 구원된다), 모세의 중재 사상
한 사람의 잘못으로 모두가 벌을 받아야하는 개체와 전체와의 불가분성이 있다.
=> 이런 속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사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안셀무스의 구속원리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야하는 당위적인 내용들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함은 하느님께 빚을 진것을 의미하며, 그 빚을 갚아야하는데 인간은 그 빚을 갚을 수 없다. 절대적인 빚은 절대적인 분에 의해서만 갚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즉 그는 하느님이고 인간이기에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오늘날 이 사상이 가톨릭의 핵심이 됨
=>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판 :하느님의 자유성이 덜 강조된다. 꼭 빚을 갚아야 된다는 빚의 개념의 의무개념은 하느님의 자유를 훼손한다.
*카스퍼의 연대성의 의미 : 내 자리뿐 아니라 상대방의 자리를 보장해주는 것.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 주는 것으로 사랑의 원리의 또다른 표현이 됨.
그리고 죽음의 문제와 신앙고백의 “고성소에 내리시어”를 언급하면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연대성이 죽은이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을, 즉 지상의 우리뿐 아니라 죽은이들까지도 수렴하는 우주 만물의 수렴을 의미하는 연대성을 표현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 이로써 구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이는 사도 바오로의 구원사상을 연상케 한다. 즉 아담 한사람으로 우리 모두 죄의 권세에 있다. 그런데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의 보속 희생 자기헌신으로 우리 모두가 구원되었다. 하나 안에 있는 다수, 다수를 포용하는 하나의 개념에서 연대성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카스퍼는 여전히 정적인 구원론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비참한 현실에 살고 있는 이들, 타종교인들, 가난한 이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는 해방의 실천에까지 이르러야 하며, 이때 연대성의 참된 의미가 확인가능하게 될 것이다.
제3장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Mediator, 중재사상 -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과연 우리의 기도와 삶이 진정한 것이었는가, 형식적인 것이었는가?
* Mediator의 인격적 의미
칼체톤 공의회 신앙고백에는 많은 성서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神人 그리스도의 철학적 사변적 고백은 아니다. 성서에서 직접 신인 그리스도가 고백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형성된 것이 곧 신인 그리스도이다.
교부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파악이 문제가 된다.
* 네스토리우스 논쟁 : 그리스도가 신-인이라면 그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사이에서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Christus Divinitas humanitas 일때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될 수 있으나 즉 마리아는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이 깨어진다. 이것이 5세기 에페소 공의회 직전까지 논쟁의 하나.
=> 그리스도의 모친은 문제가 없으나 Divinitas와 humanitas의 합체 관계가 무엇이냐에 고민이 있다. 이의 해결을 위해 이론적 결론보다 실천적인 결론으로 에페소 공의회의 선포 등장. 즉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신인성의 완전한 일치로 마리아도 완전한 하느님의 어머니이고 사람의 어머니이시다.
* 니체아 공의회 :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셨다는 Consubstantiales 강조
* 콘스탄틴 공의회 : 아리우스의 양자설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본체를 같이 하셨다고 함.
* 에페소 공의회 :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신인성의 합치.
persona; 위격성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 칼체톤 공의회 : Christus Deus - Homo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고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는 완전한 하느님이고 완전한 사람이다”는 정식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들의 구세주, 중재자이다”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의 종언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실천이 따라야 한다. 바로 이런 실천에서 그리스도론을 펼쳐야한다.
우리의 이런 고백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근거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 보프 **
9.그리스도론화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 예수 유년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확인이다. 바로 이 핵심적인 케리그마에서부터 예수의 지상 생활과 공생활에 관한 가르침, 그의 삶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유년기 설화에 대해서도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선포라는 관점에서, 즉 신앙의 고백과 선포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 공생활, 그리고 유년기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년기 이야기를 역사적 고증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성삼일 때나 크리스마스 때 말 구유 장식과 같은 외적인 장식이 예수의 어떤 부분을 진실로 고백하고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겉치장이요 미신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유년기 설화는 1-2세기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할 때, 그 시기의 언어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 메시지,핵을 포착해서 우리 시대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설화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접근하는 것은 복음을 기계화시키는 것이된다. 따라서 오늘 우리 시대의 말구유는 무엇이며 또 목동은 누구인가, 베들레험, 갈릴레아, 나자렛, 동방박사, 별 등에 대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가 복음이 전하려는 핵심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펼쳐준 그 예수를 그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유년기 설화를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족보를 보면 사실 예수는 다윗의 후손일 수 없다.“마리아의 남편 요셉”
요셉의 족보를 이야기하지만 예수는 바로 이 족보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동정녀 잉태가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가 동정이냐 아니냐가 촛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건에다 촛점을 맞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다윗의 후손, 요셉의 아들이라는 그 시대의 문화의 한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모순적인 이야기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는 이 이야기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를 포착하는 중요한 점이 된다. 즉 탄생 이야기에서 마리아의 동정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 성령의 힘으로 왔다는 것,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도 수렴하는 것이 그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대비시키면서 예수의 탄생의 우월성쪽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은 애초부터 계획되어지고 성령에 의해 이룩되어진 사건이다. 여기에서 루가복음의 핵심이 드러난다.
그런데 요한은 더 나아가 바로 로고스,말씀으로서 족보적인 의미, 나자렛의 예수라는 의미를 초월하는 우주적인 존재로 예수의 탄생을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고백적인 관점에서 유년기의 설화를 이해할 때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구약의 한 귀절을 인용하면서 “--이 이루어졌다”고 제시한다. 즉 구약의 완성으로서의 메시아, 구약의 종착점으로서의 메시아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예수가 구원의 종점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마태오 1,2장은 새로운 출애급의 완성으로서 모세의 연장으로서 예수가 엿보인다. 즉 동방에서 별이 나타나는 것, 헤로데는 파라오를 연상케 하고, 어린이 학살 사건은 모세만이 구원되고 다른 아이는 죽었던 박해 상황을 연상케 하는 등 바로 새로운 출애급이자 완성인 예수의 출생을 말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출애급 사건이 바로 이 예수의 유년기 설화에서 그대로 연결되었다.
10.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이 그토록 인간적일 수 있으셨다.
예수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칼체톤 공의회의 신앙정식은 Deus-Homo이다. 이것은 예수는 Deus-Homo일뿐 아니라 Homo-deus 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동안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Deus에 촛점을 맞추어 고백하였었다. 물론 이것이 강생의 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존재는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이기 때문에 동시에 어떤 인간의 완성도 우리에게 선취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Homo-Deus 라는 사실을 우리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위에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한 역사적 실존 인물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 아,이 분이 주님이었구나” 하고 다가가야지, 형이상학적인 관점은 우리 삶과 유리된 이론적인 고백으로밖에 남지 못한다는 것을 보프가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고 있다. 이는 결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다 출발점을 두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학은 이 Homo 에서 출발하여 Deus에 귀결한다. 즉 귀환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게서의 그리스도론에 가장 중요한 점은 콘트라 도체티즘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이 긴장관계는 신성과 인성 중 어느 쪽에 치우치느냐에 따라 이단의 진위가 규명된다. 우리 고백은 “예수는 하느님이다”는 것 때문에 하느님쪽으로 치우치게 되었는데, 따라서 여기에서 생겨난 첫번 오류가 가현론이다. 즉 예수의 역사적 삶은 하느님의 외적인 출현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와 에비온파가 여기에 속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신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성은 조금 약하게 된다.
두번째 생겨난 오류는 성자의 수난도 사실은 성부께서 하신 것이라는 성부수난설이다. 계속해서 이것은 예수가 지닌 신성을 너무 강조하게 된다. 육화는 결국 아버지 성부께서 강생하신 것이다. 그리고 강생하는 성부가 수난하는데 여기서 예수가 비쳐진 것이다. 입양설, 양자설도 성부수난설과 관계된다. 여기서 종속론이 등장한다.
종속론 : 예수는 신성을 지녔지만 여전히 성부의 신성에 종속되어 있다. 이 종속론도 여전히 신성 쪽에 치우친 것에서 생겨난 오류라고 보겠다.
아리우스 이단
로고스가 모든 것의 으뜸인데 바로 이 로고스가 강생해서 사람이 되었다. 바로 이가 하느님의 첫번째 아들이다. 이 로고스 신학도 종속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우스 사상에서 즉 사람의 아들이 로고스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승격되었다고 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많이 발견되는 사실이다. 사실 성서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즉 예수는 하느님보다 못하다든지 그에 종속되어 있다든지 그에 의해 높임을 받았다는 등의 주장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너무도 많다. 성서의 고백 분명하지 않고, 인간의 이해 한계도 있고 해서, 예수를 Deus로 고백하는데 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신성쪽으로 치달아 성부와 동질적인, 본체적으로 같은 존재로 정의한다. 즉 예수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면서 구별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자적인 신성에 촛점을 맞추었다.
-- 동일본질 consubstantialis
cum Deo
cum Homo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Nestorius에 대항하여 그리스도릐 신성을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서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 으로 고백한다. 이는 451년 칼체톤 공의회로 이어지는 데 여기서 Deus-Homo가 고백되어진다. 바로 이것,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라는 고백에서부터 새로운 그리스도론이 활발히 논의 되게 되었다.
보프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들을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관념적이며, 성서의 해석을 우의적으로 한다. 여기서는 클레멘스와 오르게네스 중심이다. 여기서의 주제는 Logos신학이다. 모든 것을 연결할 수 있고 수렴할 수 있는 로고스, 이것이 신학의 핵심이었다.
이 사상의 전신은 유스티누스의 “말씀의 싹” 사상이다 ; 모두가 말씀의 싹을 지니고 있다. 그 말씀때문에 모든 지성인들이 크리스찬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로고스가 바로 구원의 기준이 되며, 신학과 그리스도론의 중심이다.
예수에 대하여 설명할 때 신성이 강하니까 자꾸 방향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즉 본의 아니게 인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성을 견지해야할 책임이 교부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두개의 실체가 동시에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원리에 의해서 두개의 다른 실체가 하나로 융합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인성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강생하신 예수께서 완전한 인성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성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냐인 것이다. 그 조화를 위해서 예수의 Deus-신성, Logos가 spiritus를 흡수, 대치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로고스의 강생 때문에 예수의 인성은 사멸될 수밖에 없다.
나지안즈의 고레고리우스의 이의 제기 : 만일 예수의 강생이 이렇게 이루어졌다면 이 spiritus-영이 빠진 인간을 생각할 수 있는가? 로고스가 인간의 정신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spiritus는 구원되지 못하지 않느냐? 즉 완전한 인성을 위하는 강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만을 강조할 때 즉 로고스가 너무 강성일 때 단일성밖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뜻은 좋앗지만 바로 이 로고스가 지닌 강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성론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이다.: Natura Humana 인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서 인성은 폐쇄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개방적으로 신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한 1서는 단성론의 위험을 말하고 있다. 즉 바로 그 예수는 우리와 함께 먹고 마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분이었다. 따라서 인성에 대한 고백은 역사적인 예수가 전제되지 않는 가운데 신성,로고스에 대한 인식은 허구이다. 인간 예수, 역사의 예수를 간과한 채 예수의 신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대조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현실적이고 성서 해석은 자의적이다.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두 실체가 동일하게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우연적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어머니일 수는 없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긴장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인성과 신성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가 이의를 제기한다. 즉 하느님의 인간이 선재했었는데 어떻게 일치했는가?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제3의 존재인가? Christus - Deus - Homo 의 삼각관계가 Deus - Homo 의 관계보다 선재했는가? 이에 대해 강생하는 순간부터 실존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에서 다시 생겨나는 것이 이른바 네오 아리스토니즘이다. 문제는 두 학파 모두 강생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그 강생을 이해할 때 강생을 단순히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동시에 그것이 종착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강생의 의미는 하강의 구원사의 종점이라는 점이다. 이는 신화의 출발점이지만 하느님께서 완성하신 것으로서 강생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는 변증론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의 완성이자 출발점으로 해석할 때 이 문제가 조화있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예수를 끈질기게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느님의 강생인 동시에 인간의 신화(神化) -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것 - 에 대하여 선취적인 것으로 강생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체톤 공의회에서는 예수가 지닌 이 이중성과 단일성의 문제에 대한 종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Al. : persona의 견지에서의 일치,조화
An. : 본성의 이중성
여기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persona divina를, 즉 divinitas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persona는 Humana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divinitas쪽으로 기울게 되었던 것이다. Deus - Homo 도 마찬가지로 divinitas쪽으로 기울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형이상학적이 아닌, 교의적이 아닌, 실천적이요 구원론적인 고백이 필요하다. 이럴 때 Jesus - Deus - Homo 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ꠏꠏ ** 종 합 **
ꠐ 첫번째,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구원은 예수로부터 올 수 없다. 두번째, 반대로 예수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구원은 주어질 수가 없다. 세번째, 인성이 하느님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Deificatio는 불가능할 것이다.
네째, 우리들의 인성이 부족한 인성이라면 구원된 인성은 제3자의 것일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의 결합, 신-인 합치인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이 칼체톤 공의회의 고백이었다.
5세기의 그리스 문화권에서 그 용어를 빌릴뿐이지만 아직도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의 Natura는 Humana 인데 persona가 없을 수 있는가 하는 현대 신학의 문제제기이다. 즉 그리스도의 Natura는 Humana 인데 그동안의 그리스도론에서 persona Humana는 온데 간데 없고 persona divina 만 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체톤 공의회의 구체적인 존재인 예수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은 그분의 실존적인 양식을 고백한 것이지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고백한 것은 아니다. 즉 persona divina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위격적인 Natura Humana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언어는 현재와 다르기에 그것에 대해 기계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Natura라는 것은 지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인간 본성이라고 할 때 이의 발전, 상황, 과정등을 고려하는 것이다. 즉 persona는 Natura의 확인인 것이다.
보프에 의하면 부활은 수난과 죽음에 대한 확인이며, Natura에 대한 확인이 persona라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의 Natura라는 것은 예수의 인성도 반드시 포용해야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persona Humana와 divina의 일치는 여전히 고민으로 남는다.
persona는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이기에 열려져 있는 존재이다. 즉 항상 타자와 관계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에 대하여 정의할 때 보프는 타자를 위한 존재, 즉 예수는 자기를 비웠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이 케노시스의 의미, 강생의 의미로서, 하느님의 자기 비움의 의미인 것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다른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실존적 주체는 항상 하느님께 열려져 있고, 타자에게 열려져 있고, 하느님을 수령할 수 있고, 인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즉 자기 개인 중심의 삶을 사는 예수가 아니라 타자에게 열려진, 타자를 위한 존재가 예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Deus-Homo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부활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육체를 취한 로고스가 영적인 존재로 이행하는 것이 부활이라면 바로 이러한 고백의 의미도 natura에서 persona로 옮겨가는 도식으로 애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칼체톤 공의회에서 남아있던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해답의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에 나타난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자렛의 예수를 통해서 인간과 하느님을 이해해야할 것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인간을 꿰뚫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을 꿰뚫었다. 그래서 예수가 바로 Homo - Deus인 것이다. 즉 양쪽을 다 관통할 수 있는, 구원을 보장해 주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동시에 Deus - Homo인 것이다.
여기서 전체적인 의미에서 예수가 인류의 정점, 역사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라고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나타난 예수 ; 한 비천한 인간, 가난한 자의 벗,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한, 그 시대에 이의를 제기하고, 종교 정치 문화에 이의를 제기하고, 제도개혁을 꿰하며 성실하게 살다가 죽어간 그분. 그는 죽음의 삶이 곧 부활임을 이야기한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는 보증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보프는 이렇게 예수가 개방적인 존재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28에 나타나듯이 유다인과 이방인의 벽을 깬 예수, 자유인과 노예의 벽을 깬 예수, 남성과 여성의 벽을 깬 예수, 세계의 역동적인 의미로서 예수를 파악할 수 있다면 평등성의 실현, 세계의 역동적인 의미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수는 다른 이들을 위한 존재였다. 동시에 이것이 완전한 인간을 향한, 철저한 인간으로 향한 존재였던 것이다. 동시에 이는 하느님과 가장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예수, 의탁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하느님께 의탁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었다.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전적으로 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된 것이다.
따라서 칼체톤의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는 “예수는 위타적인 존재이다”라는 현대적인 말로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의 인간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었다는,인간의 비참한 역사, 비참한 신음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포용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현실, 비참한 현실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그러한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강생은 인간 조건 모두, 역사의 조건 모두를 수렴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교회와 세속을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가현론에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1.예수기적의 문제점
예수는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셨는데,예수의 행적에 관해 말할때 우리는 기적보도를 도외시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 기적을 바라보는 비판적 주체성-과학비판적 입장 (뭐든지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전부설명 가능하다 라는 현대인의 특징) -은 기적을 기적이라고 보고 놀라기 보다는 언젠가는 설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근세에 들어와 시작된 이런 관점은 예수의 기적에 관해 2가지 문제점을 가져다 준다.
1) 과연 기적이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연구, 검토 해야할 역사학적 문제
2) 기적은 과연 가능한가? , 근본적으로 기적이 뭐냐? 라는 자연과학적 문제
역사비판적 연구
① 문학비판 : 기적은 양적으로 과장되어 있다. 마르꼬와 마태오를 비교해 볼 때,‘많은’ 병자 ⇒ ‘모든’ 병자, 야이로의 딸이 ‘거의 죽어’가고 있다 ⇒ ‘이미죽어있는’
② 랍비, 헬레니즘과 복음서 기적사화와 비교
랍비,헬레니즘에서도 악마추방, 죽은 자의 부활등이 있는 것으로 볼떄 신약은 그리스도교 이외 모티브를 예수의 위대함과 전권을 강조하기 위해 썼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랍비, 헬레니즘 계통의 기적사화는 비역사적인 거짓이며, 신약의 기적만 역사적이라고 할 수 없다.
③ 양식사적으로 보아 어떤 기적사화는 부활체험후, 예수의 지상생애에서 소급하여 투영한것 같이 보인다. 이른바, 자연기적들은 교육과 신심을 위해 첨가 보충된것으로 판명된다.
결론적으로 복음서 기적중 상당수는 전설적으로 봐야하는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서술적 내용의 진위를 따질게 아니라 신학적 언표내용을 알아봐야 한다. 왜냐면, 역사서술이 아닌 기적보도들은 예수의 인격과 그 메시지가 띠고 있는 구원의 의미에 대한 신앙의 언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서 예수의 기적이 하나도 없다고 보면 않된다. 여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1) 예수의 생애에서 어떤 확실한 근거없이 기적 전승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기적 전승은 역사의 예수를 확인하는데 있어서 통용되는 기준을 똑같이 이용해 검토할 수 있다.
안식일 치유와 이로 인한 논쟁에서, 악마추방으로 인해 마귀와 결탁했다는 비난을 반박하는 가운에서도 예수의 반박자들은 예수의 기적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3) 어떤기적 사화에는 특별한 세부 묘사가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어떤 특별한 의도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것은 본래적 사실로 판명된다.
그래서 복음서 기적전승을 비판적으로, 역사학적으로 상세히 검토해 볼때 어떤 역사적 핵심이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걸수 없다는 결론이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질병치유, 마귀추방등 치유기적이다. 반면, 자연기적- 풍랑, 라자로 부활등- 들은 역사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적 으로는 기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과연 기적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제기.
전통적인 기적 이해(호교론적)에서 기적은 지각되는 사건으로서 자연적인 가능성을 초과하여,하느님이 자연계의 인과율을 묵살, 정지, 우회 함으로써 이뤄지는 사건이며, 이로써 기적은 말씀의 계시를 확인하는데 이바지 한다.
이런 의미의 기적은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볼때, 우리가 자연계의 모든 법칙을 다 알고 있을 때 확인될 수 있다.그러나 이런 완벽한 인식이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 또한, 신학적 관점에서도 하느님은 세계내적 인과율을 대신할 수 없는데, 만일 대신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세계내적 원인과 동일한 수준으로 격하되는데 이런 하느님은 우상일것이다.
* * 기적이 본래 갖고 있는 성서적 의미
성서는 위업과 표징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예수의 기적을 가리키는‘이상하고, 야릇하며,신기하다’라는 뜻인 τερατα 를 해석한다. 여기서 표징은 이례적인 사건으로써,이사건은 경악과 감탄을 일으키며, 기적은 시선을 하느님께 향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신앙과 하느님의 영광이다. 예를 들어 ‘저기압은 동풍을 일으킨다’와 ‘하느님이 동풍을 일게 하셨다’에서 전자는 인과관계 영역이요, 후자는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의 초월적 기원과 종교적 의의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 위치하는 종교적 맥락과 신론적 ‘말놀이’에 유의 해야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확대된 기적개념으로 종교적 대상의 모든 일을 기적 개념화 했고,다른 어떤 이들은 기적개념을 내면적, 심령적으로 해석하여 기적에는 신앙과 용서만이 있다고 한다. 전자에서는 성서에 의한 표징으로서 기적측면이 사라지는데, 여기서는 자연기적과 인간의 모든 재앙도 하느님 탓으로 돌려지게 된다. 후자는 성서에 의한 기적에 따르는 육체적 차원이 없어짐으로써 성서적 기적관은 하나의 근거없는 주장이 되며, 기적이 인간 실재에 부딪혀 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면 기적 신앙은 이데올로기의 표방에 불과 하게 된다.
요컨데, 문제는 기적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하느님의 작용이 주는 특별 말씀이나, 의미를 인간이 느낄 수 있느냐의 여부인데, 느낀다면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가? 이 근거는 신앙에 의해서 인가 , 아니면 신앙이 겪는 실재의 ‘무엇’에 상응하는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같은 2가지 상호관련성은 자연과학적인 근대적 실재 이해와의 대립이라는 과제를 안겨준다.
자연과학에서 모든 사건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법칙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데, 이로 보면 어떻다고 규정할 수 없는 사건의 기적을 위한 여백은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반적 조건연관( 條件聯關) 을 그자체로 묻고 알아보아야 하는데, 이 질문은 자연과학적 질문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의미에 관한 철학적이며 신학적 질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안에서 기적의 질문은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답변할 수 없다. 기적의 질문은 사건의미가 아닌 실재 그 자체 의미가 사건 안에 어떻게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나타나느냐를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과 신학이 만나는 곳은 초월적 질문이 제기되는 곳, 실재 전체와 그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곳이다.
기적의 실재 양태에 관한 질문에 있어서, 만일 실재와 그 의미에 관한 종교적 해석을 한다면, 기적의 질문은 다시 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 까지 연장 된다.
하느님은 세상 운행법칙을 영구화 하시고, 이에 따라 차례로 움직이게 하셨을까? 아니면 살아계신 역사의 하느님으로 세상 사건 안에서 그때마다 사랑을 베푸시고 자연법칙을 통하여 표징적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가? 이중에서 후자로 볼때, 하느님은 어떤 사건을 구원역사의 특별 표징으로 삼는 그때에 사건의 세속적 자립성을 그대로 살려 주시게 된다. 이는 신과 세계의 일치가 피조물의 자립에 반대되지 않는 성서적 원칙으로 통용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① 현상적 차원에서 기적은 놀아움을 자아내는 이례적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요소는 애매하고 多義的 인데 이것이 一義的으로 되려면 설교의 말씀이 동반되어야 하고, 이 말씀이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② 종교적 차원-말씀에 의해 펼쳐지는- 의 기적에서는 히느님이 직접적인 주도 하심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이 그 요소로 속한다. 그분의 말씀과 요구가 기적의 표징을 통해 구체화 된다는 사실로 실증된다.
③ 이 구체화는 피조물들의 제 2원인들(간접방법) 에 의해 매개된다. 즉, 히느님이 사람 눈에 볼 수 있을만큼 직접 행동하는 식의 개입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이 다스리러 오면,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이 계시되고, 이 계시는 인간과 세계를 참인간과 참세계이게 한다. 피조물의 자립성은 그 농도에 있어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정비례로 증대한다.
④ 기적사건은 언제나 다의적 이지만, 이는 신앙 결단을 위한 자유의 여백이다. 하느님 업적으로서 기적은 신앙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지만 신앙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자극하고 신앙을 근거있는 것으로 확인해 준다.
2. 예수 기적들의 신학적 의의
예수 기적은 하느님 다스림의 표징들이며, 악마의 지배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과 친교가 회복되는- 하느님의 다스림으로- 곳에서 ‘사물은 다시 제대로’되고 세상은 다시 온전하게 된다. 이런 구원은 심령적일뿐 아니라 인간전체에 관련되기에 그의 육체성이라는 차원에도 직접 관련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은 하느님이 지금 벌써 시작한 구원의 표징이며, 하느님 다스림이 가지는 육체적이며 현세적 차원의 표현이다.
하느님 다스림의 종말론적인 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미래의 先取(선취) 이기에 예수의 기적들은 인간과 세계가 파멸이라는 질곡에서 해방되리라는 보증이다. 기적은 이에 희망을 두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오는 것이며, 일찌기 들어본적도 없는 것에 대한 새 희망이고, 이것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전세계 실재가 하느님의 역사적 경륜에 편입되어 있다는 표현으로서, ‘희망을 지향하면서’ 달려가는 생성세계로 특징지어 준다.
결국 하느님 다스림이 도래하기 시작 했음을 보여주는 예수의 기적들은 예수의 사명과 전권을 가리키는 표징들이다.
* * 예수 기적의 의미
1. 예수 기적은 구약의 완성이다. 즉, 절름발이와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는 것은 구약에 언약된 하느님 법과 義가 실현된 것이다.
2. 예수의 기적에서 하느님 권능이 인간적 비천성, 은폐성, 모호성을 띠고 나타난다.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비참성을 가리키는 표징이다. 이같이 인간 예수의 구체적 역사는 하느님의 권능을 은밀하게 현시하는 장소가 된다.
3. 예수의 기적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여 그분을 뒤따르게 한다. 이런 추종은 동시에, ?캅像? 의미하며 하느님 백성을 종말론적으로 소집하는데 이바지 한다. 이 소집통고는 특히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로 하여금 지금부터 벌써 하느님 구원과 사랑을 몸소 체험할 수 있어야 하고 계속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3번째 관점은 중요하다. 예수 기적들은 신앙을 위한 표징이며 기적과 신앙은 밀접하게 연결된다.기적은 신앙으로 이끌어주는 길잡이인 동시에, 기적은 신앙을 전제로한다. (바로 이 의미로 볼 때 기적은 나를 넘어서면서 하느님께 신뢰케 한다. 예수는 그래서 요나의 기적 밖에 없다고 한다.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요나의 기적은 곧, 십자가의 희생죽음 이요, 그 희생적 죽음이 우리 시대가 찾는 기적이다.-정의 위해 몸바치는, 이웃위해 투신하는-) 왜냐면,예수는 신앙을 발견치 못하는데서 아무 기적도 행할 수 없었다.
* * 신앙과 기적 사이에 2가지 연관
1. 기적은 신앙으로 인도한다. 즉, 기적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개방하게 하지만, 인간을 압도하여 거꾸러 뜨리지는 않는 것이며, 하느님은 이 안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신다.
2. 기적을 기적으로 보고 그를 하느님 업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신앙을 전제로 한다.
또한, 기적은 신앙을 위한 표징이며, 이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할 권능이 있다는 신뢰이다. 이같이 기적은 당신께 간청하는 의지와 기도에 대한 예수의 응답이다.
그러나 간청의 의지와 기도가 기적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니고, 오히려,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걸 하느님께 기대하는 자기 비움안에 개방이 있는 신앙일때 기적은 하느님으로부터 하사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인은 하느님의 전능에 참여하며, 하느님 전능과 섭리에 대한 신뢰를 갖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은 어떤 이례적 현상이 아닌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몸소 등장하셨음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세계 구원을 위해 역사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 4 장 예수의 전권 주장
1.예수의 잠재적 권리주장 = 그의 메세지와 기적 안에 내재되어 있다.
예수의 메시지와 기적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었다. 이제는 메세지와 기적의 문제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다스림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우리에게 보여줄 수도 지적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루가의 말대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도 찾아낼 수 없는 방식으로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비유를 통해서만 알려질 뿐이다. 그렇다면 비유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카스퍼는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신비로서 성사에 비유한다. 성사는 가시적인 모습으로 비 가시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비의 열쇠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하느님의 원성사이며 원형으로서, 예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시화된다. 그러나 이 신비는 신앙을 통해 실현되는 실재이다. 하느님의 신비를 아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아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뜻한다. 그리고 그는 인격 자체로서 하나의 신비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예수를 통해 현실로 펼쳐지며 예수 안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하고 우리에게 펼쳐진다. 예수는 가장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세상에 오신다. 이 모습 안에 하느님이 숨어 계신다. 여기에 하느님과 인간의 본질이 예수 안에서 해결되고 설명되어진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의 교차점으로서 하느님 나라는 곧 예수 자신이었으며, 그 나라의 도래는 예수의 인격자체였다.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이 나타나고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지금 여기에 이뤄지는 것이다.
** 예수의 공적 활동과 말씀과 업적에 잠재하는 그리스도론
그는 인격과 소신을 일치시킨다. 그렇기에 그의 표징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며 그의 활동은 간접적 그리스도론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론은 부활 후에야 집적적으로 고백된다. 그리고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게 되는 데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회당에 가서 기도드리고 지켜야 할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였다. 반면에 그는 당시 사회에서 분쟁과 문제를 야기시켰다.(안식일법의 폐기, 세리와의 식사)
① 예수의 새로운 처신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맥락에서 참 의미가 드러난다. 당시의 근동지방에서의 공동식사는 공동운명을 의미하며 특히 하느님 앞에서의 친교를 의미한다.(성인들의 친교)
② 하느님 나라와 관계하여 당시 멸시받던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죄인들을 구원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구원의 손길로서 하느님의 사랑의 메시지인 것이다. 또 한번 그는 당시 사회에 충격을 던진다. 바로 이 죄인들에 대한 죄의 용서이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권리주장은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한 위치에 서서 행동하는 분으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죄의 용서는 하느님 사랑의 현실화였던 것이다.
③ 예수의 선포 역시 하나의 그리스도론을 포함한다. 예수는 당시 사회 기반이었던 유다 율법마저 능가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서 예수의 말씀은 완성에로 이끌어준다.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의 말을 한정짓는 예언자들과도 달리 예수는 당신의 말씀과 하느님의 말씀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전권에 입각하여 말한다. 이렇게 그는 기존의 도식을 능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것을 끝없이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그의 위대함의 근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삶에로의 투신과 과거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움직임들은 오늘날 정지되고 기계화된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다시 되물을 것을 요구한다.
2. 예수의 지존 칭호에 관한 문제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 했는가”하는 질문은 예ㅓ수 당시 사도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었다. 마르코6,14이하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대화와 8,27 이하 베드로의 고백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는 물음이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론적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상 생애의 예수와 관련지어 볼 때 예수 자신이 메시아임을 인지했었느냐는 것을 표현한다.
예수 당시 메시아관 : 메시아 대망 사상은 획일적이 아니고 다양한 메시아관이었다.
① 구약적 맥락에서는 즉 구세주적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나 하느님 나라의 임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인격적 구세주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② 여기에 교량역할을 해 준 것이 군주관, 즉 왕정제도이며 다윗왕권으로 대표되는 왕은 기름 부음받은 자이며 성유로 축성된 자이다. 그는 야훼의 지상대리자이며 통치권을 지님을 말한다. 2사무7,12에서 나타난대로 다윗가문에 대한 언약은 나단의 축복으로 나타나며 우리에게는 막연한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사상으로 이해된다.
③ 보다 세부적으로 이해되면서 야훼의 수난받는 종(제2이사야), 사람의 아들(다니엘서), 군주, 대사제(즈가리야), 정치적 임족주의적 메시아(열성당원), 율법교사의 메시아(랍비) 등으로 여러 유형의 메시아 대망 사상이 있었다.
이렇게 예수 당시에는 메시아관이 뚜렷하지 않고 다양하여 그 의미에서 혼동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예수는 메시아에 대한 칭호를 피했다. 예수는 생전에 결코 메시아 칭호를 단 한번도 그 자신의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칭호가 당위적이고 애매모호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의 신원을 지칭하기에는 그 단어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메시아 칭호는 제3자가 예수에게 부여한 칭호인데 예수는 여기에 수정을 가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예로 베드로의 고백에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애매모호한 메시아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에 예수를 메시아로 일러주면 백성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신원이 애매모호하고 오해되게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시아의 특징에 덧붙여 “사람의 아들은 백성들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붙들려가서 수난을 받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예수는 여기에 수난상을 덧붙였다. 유다의 메시아관은 “야훼의 종”이 한 부류있었지만 이해하기 힘들었고 때가 되어야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유보시켜 두었었다. 예수가 수난에 대해 예고했을 때 베드로의 반응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사탄아 물러가라”였다. 이것은 예수의 수난성을 배제한 메시아관은 사탄일 수밖에 없다는 초기교회의 이해를 드러낸다.
라이마루스 : 예수는 유대교의 전통적 이해 지평안에 머물러 있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정치적 단위로 이해했고, 제자들도 거기에 희망을 두었다. 결과저그로 예수가 죽음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을 인류 전세계를 위한 죽음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즉 나중에 정신적 메시아, 전 인류의 구세주로 들어올렸다.
자유주의 신학파 : 유다교의 정치적 외면적 메시아 대망 사상을 예수가 내면화시키면서 정신적 메시아 이념으로 재해석했다. 예수는 자기 민족의 정신적 도덕적 해방자였는데 정신적 쇄신을 시도하여 정신적 왕국을 세우려다가 이 사상을 위해 죽음을 자청하게 되었다. 애매모호한 외적 정치적 메시아 사상을 내면화시키면서 도덕적으로 심화시키기 위해 자청한 것이 죽음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마저 왕국의 일부분이었고 죽음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룩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문제점으로 예수는 결국 일반적 관념이나 도덕적 원칙을 상징하는 암호밖에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슈바이처는 비유로 대답했다. “이는 세 복음서를 심리적으로 해석해서 요한 복음이 아닌 제4복음을 만들어 내는 ?叩? 같다.”
브레데 : 복음서의 메시아관은 유다교가 아닌 그리스도교의 결정적 내용이며,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교리적 견해의 반영이다. 메시아관은 신앙고백의 결실이다. 메시아 고백은 역사적 기술이 아니라 신앙적 기술이다. 예수의 생애는 메시아 생애가 아니었는데 부활 후 신앙의 빛을 받아 메시아로서 각색이 되었으며 마르코는 함구령이라는 수법으로 이 긴장을 극복하였다.
이런 브레데의 이론을 불트만이 채택하여 현대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슈바이쳐 : 브레데와 불트만의 이론에 비판
1.예수의 생애가 메시아로서의 생애가 아니었다면 예수의 죽음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예수의 처형이유를 “유다인의 왕”으로 전하고 있는데 여기에 역사적인 신빙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가 유다인의 왕이라는 누명을 쓸 수 밖에 없는 타당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고 이런 역사적 실재를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에 대해서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해 정치적 선동자로 처형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죽음이 우발적인 오판은 아니었으며 예수는 죽을 수 있는 계기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정치가는 아니었더라도 예수의 새로운 사상은 기존의 종교질서를 엎을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기했던 것이다.
2.만일 예수 생애에 메시아적 종말론적 암시가 전혀 없었다면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겠는가? 예수가 메시아라불릴 어떤 가능성은 지상 생활의 예수에게서 감지되었었다. 부활체험을 메시아적-종말론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상 생애의 예수에게 그런 암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페쉬 : 예수의 메시아 주장 == 마르코8.27 이하 대화 내용에서 알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여기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함구령을 내린다. 당시 유포되었던 정치적 메시아나 민족주의적 메시아와는 달리 제자들은 스승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언자적 전통을 따르고있으며 이는 성령에 의해 축별(祝別)받은 세말의 예언자로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사자이며 파견자로 하느님의 삶을 나타내주고 있다. 고난받는 예수는 그 자체로 신비이며 메시아의 비밀을 드러내 주는 것이 된다. 예수는 자신이 오해될 까봐 메시아 이해에 대한 유포를 금했으며 이것을 뛰어넘는 십자가상, 수난의 메시아상을 사도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정치적 해석이 악화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던 것이다.
여성신학 : 카스퍼가 사용하는 원칙인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며 수난과 십자가의 메시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예수에 의해 기억되리라고 했던 향유를 부은 익명의 여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세번이나 에수를 부인하고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길 때, 한 여인은 이분이 그리스도이시라고 향유를 발랐다. 즉 그리스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다.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기존 종교에 도전하는 이러한 고백을 사도들은 숨길 수 빆에 없었다. 예수의 죽음 이유에 대해서도 로마인들에게가 아니라 유다인들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은 당시 유다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에 대해 그 이유를 묻게 되었을 때의 결과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예수의 정치적 죽음을 비정치화시키면서 종교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마르코14,62 이하에 나타나는 유다 최고 회의의 예수의 법정 진술에서 메시아와 사람의 아들이 혼용되고 있다. 재판시 예수는 자백을 강요받는데 그렇다면 그만한 흔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재판받는 상황을 추정해 볼 때 전혀 근거 없이 유다인의 왕이라고 할 수가 있었겠는가?
메시아, 그리스도 칭호는 수난 전승에 직결되고 있다. 신앙고백의 원자료인 고린토 전서 15장의 부활 고백에서 최초의 복음선포에서 예수는 십자가의 메시아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 수난과 부활은 복음의 핵이다.
하느님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분을 메시아로 삼으셨다는 것을 사도행전도 주장하며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이 칭호를 일단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했다. 즉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유대교화 하지 않고 수난을 통한 메시아성을 재창출해냈다. 예수는 새로운 것을 제기하는 분이며 하느님의 다스림을 봉사로써 이해하였던 것이다.
*** 사람의 아들에 대한 칭호 ***
메시아가 제3자에 의해 부여된 반면에 이 칭호는 사도7,56을 제외하면 전부 예수 자신의 발설로 나오게 되는데 이것으로 보아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특징에 더욱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생긴다.
1) 인자(人子)
꠆ꠏ 인간 일반, 또는 인간에 대한 고상항 표현(셈족 개념)
ꠌꠏ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천상의 인자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대리하는 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자들, 곧 참된 이스라엘의 대표자를 의미 한다.(다니엘 7,13 이하)
2) 예수는 당시 널리 퍼져있지 않던 인자 개념을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면서 동시에 은폐할 수 있었다. 예수는 ‘비하에서 현양’이라는 도식을 여기에 숨기고 있었다. 이 인자개념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대리자요, 사람들의 대표자로 형용되며 이것이 수난 및 현양의 그리스도론, 재림대망, 예수의 개인적이며 보편적인 의의 등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론으로 발전한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론을 발전시켜 가면서 예수께 물려받은 이 명칭을 통해 신앙의 주님과 그분 재림 사이의 연대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인자이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재림 시 구원될 것이라는 확신을 인자라는 표현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아들, 하느님의 아들 ***
예수가 말한 것은 하느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소개함이다. 예수는 부자 관계 그 자체보다는 하느님의 부성(父性)에 중점을 두어 이야기 하신 것이다. 즉 사랑 안에서의 상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론 : 예수는 하느님을 근본으로 하고 하느님을 위할 때 모든 것이 되었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모소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맞아들이기위한 비 터요 빈 자리이다. 우리가 예수에관해 말할 때 그것은 예수가 부활 이전에 존재적으로(ontisch)으로산 것을 부활 후에 존재론적으로(ontologisch)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 방식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전히 충만하시고 하느님의 전능에 참여하신다. 그리고 그 전능은 사랑에 있다.
제 5 장 예 수 의 죽 음
1. 사건의 줄거리
예수의 죽음은 복음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복음에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기록은 양적으로나 비중으로나 복음의 진수를 이루고 있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로 그리고 신앙 고백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십자가 처형>
기원전 519년 바빌로니아에서 반란인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십자가형은 페르시아인들이 창안한 형벌로 로마에서는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우리는 십자가를 종교화 이전에 끔찍한 형틀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에선 노예들, 이방인들에게만 적용되었고, 유대 민족 해방 운동가(자유 투사)들도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예수도 정치적 반란자로 처형당했다. 그러나 예수는 열성당원과 같은 叛徒들의 두령은 아니었다.
<예수의 유죄 선고 사유>
예수는 문제의 인물이다. 예수의 죽음 또한 문제의 죽음이다. 예수는 신성모독죄, 안식일 준수 문제, 성전 정화에서의 마찰, 정결례 문제, 정치적 이유 등 여러가지로 로마와 유대교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예수는 두 측면에서 조롱을 받았다.
① 로마의 군인들로부터 유다인의 왕이라는 조롱과 가시관을 받았다.그러나 예수는 그의 행적을 보면 왕으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왕이라는 누명을 쓸 행동을 했다.
② 유대교 최고의회는 메시아 문제 (거짓 예언자)와 성전을 헐겠다는 예수의 말씀(하느님 모독죄)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이러한 조롱, 이러한 선고는 그가 이미 생전에 예언자나 신적 능력의 모습을 보였기에 가능하다는 반증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이다.
<보프의 예수 이해>
예수가 누구인가 보프는 좀더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보프에 의하면 예수는 첫째, 하느님께 방향지워진 자이다.
둘째, 위타적인 존재자,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이를 십계명으로 요약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된다. 예수의 죽음도 이런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해방신학은 이 도식을 좀더 명확히 드러내 준다. 해방신학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라고 요구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위타적인 존재적 삶을 통해서만 확인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확인된다. 오늘날의 해방신학의 핵심은 이웃 사랑이 더욱 더 큰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확인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하느님께 방향을 지으면서 타인을 위해 산 사람,즉 위타적인 존재였다.
<예수의 죽음 이해>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 차원의 오해나, 자유인. 율법 위반자. 비타협주의자로서 반대자들에게 제거된 것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이 이루신 구원업적이요, 예수의 자발적인 자기희생, 자기헌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자신은 그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2. 종말론적인 전망
예언자들의 공통된 운명은 수난과 죽음, 즉 고통이다. 예수께서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런데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분명한 추종과 결단, 집까지 끊을 것을 요구하셨다. 이는 예언자들의 종말이 엄청나므로 그리고 예수 자신에게 닥쳐올 고난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에 그런 죽음의 추종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 예수 자신의 죽음 이해 *
예수의 어록 자료의 수난사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흔적이나 암시가 없다. 또한 폭력의 희생이나 예언자와 같은 운명 암시 등의 대목에서도 예수의 죽음에 어떤 본격적인 구원 의미를 명확하게 시인하고 있지는 않다.
<예수의 수난 예고>
그러면 복음의 수난 예고는 구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가? 예수는 수난을 얼마나 인지했으며, 그 죽음은 자발적인 죽음인가?
그런데 수난 예고는 사후 예고로 부활 후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수난 예고는 신앙 고백 형태로서 부활의 빛 안에서 기술한 부분이 많다. 이는 역사 서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난 예언들은 예수가 당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로써 죽음의 운명을 감수하는 예수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수난예고들은 예수의 고난을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필연성으로 이해함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이 수난 예고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부활 이후의 해석이지 예수의 참된 말씀이 아니라는 게 통설이다.
<4복음서의 수난 기사>
네 복음서의 수난 기록은 일치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호교론적 의미와 교화적인 의미, 교육적인 의미와 동기가 있다. 이는 교부 시대의 외경이나 순교자들, 시문학의 형성처럼 부활 후에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의미 부여와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메시아의 수난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수난 기사들은 매우 오래된 전승으로 역사적인 사건의 경위를 상당히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수난 전승은 몇몇 신학적 관심 안에 규정되었는데 즉, 호교론적, 교의적, 교화적 동기들이 그것이다. 수난 보도는 사실 보도이며, 복음 선포 의도에서 쓰여졌다. 이 기사는 예수의 수난을 부활에 비춘 해석으로 메시아의 수난, 의인의 수난, 구약의 완성, 하느님의 뜻의 실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기사 이면에는 구약 성서의 배경, 즉 야훼 종의 노래와 시편 22장, 69장의 진한 암시와 영향이 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해석>
- Wrede : 예수의 지상 생애는 전혀 비메시아적이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예수가 왜 ‘유대인의 왕’, 메시아의 참칭자로 처형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 Bultmann : 예수의 십자가상 처형은 그저 하나의 정치적 오해였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정치적 오해였다면 예수가 지닌 가르침,종말론적 교훈, 예수의 죽음 등의 이해가 어려워진다.
- Marxen : 예수는 당신의 죽음을 하나의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였다면 예수의 현재 지향적 활동과 행적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0 C초 근대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 역시 예수는 당신의 죽음을 구원의 죽음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예수의 죽음의 구원론적 이해는 사도 바울로의 조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9세는 비메시아적, 비구원적 주장을 단죄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
인간의 고통에는 영광을 향하는 의미, 속죄적인, 구원적인 의미가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고난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담겨진 구원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에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구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원리들이 있다. 당시에는 ‘고난받는 의인’이란 관념과 의인의 죽음에는 속죄의 힘이 있다는 표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실제로 구원의 죽음으로 이해하였느냐이다.
- Schuweizer의 종말론적인 견해 -
하느님의 다스림 도래와 종말론적 재난,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적 고난의 시대는 분리될 수 없다. 종말론적 재난의 표현으로서의 수난 소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종말론적 재난은 한 짝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즉 영광의 도래와 그 과정에서 수난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의 수난은 분리될 수 없다. 주의 기도 중 유혹의 위험에 관한 언급은 종말론적 재난을 뜻하며 예수는 처음부터 이를 예고하고 있다. 고난과 박해라는 재난은 하느님 나라의 두 모습, 즉 비하와 은폐에 속하며 예수의 설교에 시종 일관하고 있다. 이 은폐성의 극치가 십자가의 죽음이고, 마지막 극치에서 하느님의 영광의 실현이 극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부활의 꽃을 피우기 위한 죽음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부활은 십자가의 긍정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종말론적 사신은 고난의 신비에 귀결되어 있다.
*** 죽음을 예견한 예수의 생애 ***
예수는 어떤 폭력의 희생이 되어 횡사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했고, 또 예상했다.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비난, 마귀와 결탁했거나 마술을 부린다는 비난, 안식일 계명을 위반했다는 비난, 그리고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죽여 없앨 모사와 실제의 제거 등 예수는 늘 생명의 위험을 당해 왔다. 예수의 공생활은 마찰과 갈등의 삶이었다.
요한 세자의 비극적인 최후 또한 자신도 폭력에 희생되어 횡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예수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예언자들의 운명에 미리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언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의 판가름도 예루살렘에서 나야 했다. 예수는 죽음과 위험을 예견한 채 예루살렘 상경을 결단하였다.그러므로예루살렘에서의 판가름은 최종적이요, 종말론적 위기였고, 은총과 심판을 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성전에서의 충돌 사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지지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환호하는 시위를 벌이고, 큰 민중 집회가 이루어진 것 같다. 성전에서 충돌은 분명히 발생했다.
성전 정화는 혁명적인 행동이라기보다 차라리 예언자적인 상징 동작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구약성서의 기대에 관련지어 볼 때 이 동작은 세말의 때가 시작했다는 것, 묵은 성전이 끝나고 새로운 성전이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처럼 메시아적 희망을 일단은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며 묵은 성전의 파괴와 새로운 성전의 건축을 예언했다.
성전에서 벌어진 일은 유대교 교권 당국에게는 틀림없는 도전 행위였다. 따라서 이 일은 예수의 재판의 발단이 되었고, 유죄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와 그 반대자들과의 충돌은 종말론적인 맥락 안에 서 있는 것이다.
<최후 만찬>
최후 만찬은 종말론적 전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본문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하는 말씀이 적어도 하나는 들어 있다. 즉, “나는 그대들에게 진실히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 더 마시지 않겠다.”
제자들과 나눈 예수의 최후 만찬은 하나의 종말론적 상징동작이었다. 예수는 최후만찬 때에 임박한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이 죽음과 함께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미리 내다본다. 예수의 죽음은 Basileia의 도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자신의 설교 및 공적 활동의 종말론적 성격을 견지하였다.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말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성서의 전승 안에서조차 예수가 하느님께 버림을 받고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루가나 요한은 각각 “아버지, 당신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 는 승리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고난과 죽음의 시련 한가운데서도 하느님은 처음부터 주님이시며 자기를 구원하여 새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편 22는 이 체험을 묵시문학의 언어를 빌어 하나의 전형적이며 모험적인 운명으로 고정시켰다.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기도는 실망과 좌절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시편 22 전체에 나타난 복음작가의 신앙의 해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편 22 끝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확신,감사의 기도로 끝맺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시편 22편의 전체 메시지로 이해하면 이 기도는 예수의 하느님께 대한 종말론적 확신을 토로한 예수의 마지막 신앙 고백이었다. 이 차원에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가 선명하게 펼쳐진다.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한다는 것, 그것은 곧 하느님의 종말론적 다스림이 뚫고 들어오는 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의 말씀은 절망의 외마디가 아니라 하나의 기도이다. 청허를 확신하는 기도요,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를 희망하는 기도이다.
<요약>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와 신기원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종말론적 시련의 대기를 내포한다. 그의 메세지는 현세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극단적 결과로서 죽음까지도 수락해야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과감했던 그분의 공적 활동에서 빚어진 결과일 뿐 아니라 그의 메세지의 총괄이요 요약이기도 하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은,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밝혀준 사건이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종말론적 다스림의 도래이다. 이 죽음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현세대의 조건들 한가운데서 실현된 모습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무력 가운데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난 가운데에 富가, 버림받은 가운데에 사랑이, 공허 가운데에 충만이, 그리고 죽음 가운데에 생명이 실현된 모습이다.
3. 구원론적 의의
<예수의 죽음 = 보편적인 구원>의 근거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을 야훼의 종에 관한 넷째 노래에 비추어서 이해하였다. 여기에는 구원적 ?퓜?, 대속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야훼의 수난하는 종에 관한 노래는 1고린 15,3-5에 전해진 오랜 신앙 고백 정식과 성만찬 전승에서 벌써 예수의 죽음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대리 속죄의 죽음으로 해석하는 데 원용되고 있다.
역사-비판적 성서주석학은 이 해석의 정당성을 문제시하였다. 왜냐하면 ipsissima verba에서는 pro multis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만인을 위한 속
죄의 헌신이었던 예수의 죽음에 관한 해석이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신화나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 것이다.
결국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의미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언행, 예수의 기적 등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현장이나 최후의 만찬 때 발설한 단편적인 말씀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의 총괄적인 내용 안에서 즉, 종말론적인 언행 안에서 구원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구원론은 종말론의 결과로서 설명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구원론적 의의를 부여했다는 실증>
1)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에 관한 그의 사신과 연관지어 이해하였다. 그런데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원의 총괄개념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 죽음을 구원론적으로 해석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따라서 예수의 잠재적 그리스도론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예수의 잠재적 구원론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2) 하느님의 다스림은 예수 안에서 봉사라는 모습을 띠고 인격적으로 실현되었다.이 봉사의 개념은 위타적인 존재와 연결된다.이 봉사는 어떤 박애주의적 개념의 봉사가 아니라, 당시의 종교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봉사의 가치를 드러내는 그런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서 마치 시중드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예수는 죄인들, 말단 인생들과 친교를 나눈다. 예수는 이 봉사와 친교를 통해 인간들의 소외를 뿌리로부터 고쳐준다. 예수가 가져다 준 이러한 본연의 해방은 하느님 앞에서의 죄책의 사면이고, 예수가 세워준 새로운 친교는 하느님과의 친교이다. 예수의 이러한 구속적 봉사는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생명의 위험을 무릎써야 하는 것이었다.
과연 예수는 그 삶과 죽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인간이다. 이 위타존재야말로 그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룬다. 그는 이 위타존재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인격적 화신이기 때문이다. 이 위타존재에서 구원론이 결론된다.
이런 배경에서 Mk 10.45의 “대속물”도 ‘예수의 생애 안에 한자리’(Sitz im leben Jesu)를 차지하게 되고, 많은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최후만찬의 말씀도 예수 자신에게까지 소급시킬 수 있는 개연성이 커진다. 그러므로 후대에 형성된 “υπερ-정식”(예수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일련의 표현들)은 그 기본 골격에 관한 한 예수의 지상 생애 자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결론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겼던 순종안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때 예수의 순종적 죽음은 예수의 행적 전체의 수렴이요, 총괄 개념이며 모든 것을 능가하는 마지막 절정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의 구원 의의는 그의 죽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이 구원 의의는 예수의 죽음에서 가장 확실히 드러나고 결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프는 예수의 죽음에서 “넘겨진다”는 의미를 계속 설명한다. 즉 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를 넘겨 주었다, 베드로가 배반했다, 군인에게 넘겨졌다, 빌라도 법정에 넘겨졌다 등등 보프는 넘겨주었다는 의미에서 내어주는 존재가 지니는 위타성과 구원적 의미를 본다.
한편 우리는 예수의 숙명적인 죽음, 순종적인 죽음, 운명의 죽음에서 일의성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의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타종교, 타인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이 일의성 안에 타인의 삶을 함축해야 한다. 함축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십자가, 십자가의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모든 인간 고통의 총체를 예수의 십자가로 읽어낼 때 예수가 우리 고통의 전표이고 수렴이고 우리 고통이 십자가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의 일의성을 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죽음에서 예수의 메시지,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전적인 권한, 전권 요구, 하느님 나라의 은폐성 등이 밝혀진다. 하느님의 비하의 극치인 죽음을 통해서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신다.
십자가는 미완성의 삶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종말론적 의미에서 미완성의 삶이다. 미완성의 실패가 안고 있는 부활의 가능성, 종말론적인 희망, 즉 부활을 내포할 때 한 짝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삶은 미완성이다. 그 미완성의 의미를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고, 미완성을 넘어 선 완성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해주는 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제 6 장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의 증거
( Schema )
예수- 지상, 역사 / 그리스도 - 신앙 exultatus
이 두 부분의 연결이 부활한 그리스도이고 주제이다.
Catholic 의 부활의 입장 :꠆ꠏ부활의 주제가 핵심이 아닌 호교론적으로 논의함
ꠐ 그리스도의 신성 증명 ; 기적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ꠐ 논의함
받아 극복하려고 함. ꠐ 부활 사건 역사내적인 사건이 아닌데 역사내적인
ꠌꠏ 사건으로 격하시킴
결론 ꠆ꠏ 부활의 기록 (두가지 전승을 나타냄 )
ꠐ 1. Kerygma (복음선포)- 신앙의 대상
ꠌꠏ 2. Legendaria (부활 사화)
부활의 교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다.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라는 복음선포와 신앙 고백이 가장 중요한 맥락이다.
+ 빈무덤 사건, 발현사화 (빈무덤 이야기와 부활 케리그마)
두 가지 전승이 결합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마르꼬 16,1-8 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케리그마의 핵심이고 나머지 빈무덤 사건과 발현사화는 부차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문제점은 부활의 첫체험(사도체험)을 기초로해서 교회공동체가 형성된 것이고 사도 체험이 사실이냐 중간적 체험이냐가 논란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카스퍼나 보프는 부활사건을 역사내적 사건이 아니라 초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따라서 이는 완성적인 것을 선취시킴이다. 이 부활사건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이다. 부활사건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 하느님 절대권에 대한 승복을 통해 즉 종말론적인 희망, 우리 삶에 대한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점은 사도 원체험이다.
1) 보았다. 일어섰다. -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2) 부활사건 - 사도들 자신들도 고민함 ( 믿음으로의 과정이 있다. 우리와의 고민
과 같다.)
3) 영지주의, 이원론 배격을 위해 - 부활 후 사도들과의 만남을 사실적으로 서술
함- 이것은 legendaria 이다.
4) 투신의 의미로써 부활이 확인됨 - 부활에 대한 개념 정화시킬 수 있음
5) 메시지가 전달될 때 - 눈뜸, 새로운 깨달음 ☞ 새로운 세계가 펼쳐짐
1. 전승의 실태
① 예수의 죽음은 철저한 실패인데 여기에는 의인의 죽음을 대속의 가치가 있다라는 유다이즘이 깔려있다.
② 예수의 메시지, 가르침을 예수의 인격과 동일시한다. 또한 비참을 겪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을 증언함 - 새로운 눈뜸
③ 교회의 근거와 신앙의 근거를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즉 하느님께서 죽은자 예수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④ 복음을 통해서 사도들이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듣고 불신하고 거부하는 행위는 부활의 신비를 더욱 진하게 해준다. 즉 사도들의 고민이 부활의 신비를 더욱 진하게 해준다.
* 부활증언의 難点
(1) 수난 4 복음은 일치점이 많다. 그러나 부활 체험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ㄱ. 케리그마의 전통 ꠆ꠏ 전례를 통한 신앙고백과 전례의 정식
ꠉꠏ 간결하고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오래된
ꠌꠏ 신앙의 정식이므로 구속력을 지님
cf) 엠마오스의 제자 - 식탁의 자리에서 감지하고 체험된 주님이시다.
초대 교회의 긴장감 고민 표현
1.Cor.15,3 - 8 (원천적인 신앙 고백 형태) ; 이 전승은 40-30년 말로 소급됨
( 케리그마 전승의 핵심,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 발현에 대한 내용 없는 신앙의 고백의 형태 : 로마 1,3 ; 필립 2,6
- 그리스도가 주인이라고 고백함
ㄴ. 레젠다리아 - 마르꼬 16,18( 합쳐야 하는 과정 주목 필요 )
cf) 카스퍼는 케리그마 중심; 베드로, 1고린토 15,3 ; 사도행전의 증언
여성 신학에서는 케리그마에 이의제기가 레젠다리아이다. 케리그마는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적 복음 선포라면서 4 복음서 작가들을 반발하면 부활 증언은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변증론적으로 여성이 제기함
① 여인을 언급함
② 발현 장소 ; 마태오, 마르꼬 = 갈릴레아
루까 , 요한 = 예루살렘
루까와 마르꼬의 신학의 차이일 수 있다.
③ 사도 바울의 교계제도의 반대하는 세족례를 제시, 봉사하는 예수제시
④ 빈무덤 사건 - 역사적 사건의 진위성
ㄱ. Camperhausen ( 역사 비판적인 방법 )
- 빈무덤이 부활신앙을 가져 왔고 부활신앙이 천사들의 발현을 가져 왔다라고 이야기함,즉 빈무덤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므로 부활 사건이라 개진함
ㄴ. 반대되는 의미는 부활에 대한 레젠다리아는 케리그마에 대해 2차적이다. 즉 레젠다리아라는 것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현실성, 역사성, 육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발현사화가 만들어졌다. - 교의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발현사화가 생성됨
ㄷ. 레젠다리아를 강조할 때 부활 사건을 역사내적 사건으로 격하시킴
ㄹ. 캄페르하우센은 역사적 사건을 강조했으나 결과적으로 초자연적인 사건이 자연 사건으로 격하되는 실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ㅁ. 무덤 사화 결과( P.222 참조 )
-. 4 복음서 상호 일치하지 않음 -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님을 증명
-. 마르꼬 16,1-8 가장 오래된 전승(마태,루까가 마르꼬와 일치할때만상호일치)
마르꼬 복음의 초반부가 가장 중요한 전승이다.(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님 - 문학적으로 긴장을 보여주기 위해 서술했다. )
-. 마르꼬 전승이전에로 소급가능
마르꼬 이후 베드로 외경 ; 유치하다. 그러므로 역으로 소급하여 생각하면 부활에 대한 핵심요소가 발견될 수 있다. - 마르꼬 이전으로 소급해야 한다.
양식사적으로 볼 때, 케리그마의 핵심 즉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표현이 그 다음에 징표로서 빈무덤으로 이어짐 ; 빈무덤이 부활의 증거는 아니다. 그러므로 빈무덤은 의식속에 담겨진 원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마르꼬 16,1-8 ( 의식 원인담 )
역사 혹은 비역사적인 사화가 아님 -초월하는 것이다.
① 개연성을 보여 줌 ( 어떤 변화가 있었다라는 것을 일깨워줌)
② 빈무덤이 역사적 사실과 부활 사건 속에 어떤 관계가 있다. 하나의 징표로서 제시해야 한다. 즉 빈무덤 때문에 예수께서 부활했다라는 논증은 아니다. 호교론에서 빈무덤과 여성증언이라는 이유로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활에 대한 진의를 흐리게 한다.
결론적으로 카스퍼는 두개의 전승이 마르꼬에 의해 연결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베드로에게 전해준 것에서 루까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변하게 되고, 요한에서는 아예 예루살렘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무덤사화는 부활신앙을 갖기 위한 징표로 씌여진 것이다.
공통점은 어떤 특정한 사람한테 나타났다는 것. 즉 그분이 살아 있는 분으로 보여 주셨고 부활하신 분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인의 고백이다. ( 표현== 내용)
2. 해석학적인 전제들
-. 부활 사건은 초역사적 사건인데 이의 신학적 논증이 가능한가 ? 초역사적 사건의 진위성의 문제는 과거 가톨릭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그러나,강생의 끝으로서 부활로 이해한 것은 하느님의 하강의 재상승으로서 부활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① 소극적 그리스도 - 사기설 주장, 예수의 죽음은 거짓이다.
* 라이마르스 - 제거설, 착오설 , 가사설, 진화설 등이 있다.
당시 종교에 대한 압축으로서 구약의 약속이든지 그리스 신화와 미래 종교의가르침이든지 후기 묵시문학의 하늘의 승천이라는 것과 연결되면서 예수가 확인해 주었다.
* 환시설 ; 제자들의 주관적인 착각이거나 환시이다. 주관적인 체험이었다.
* 가설들의 공통점 - 좁은 의미로서 사실성에 대한 증명이다.
사학적, 논리학적인 학적 논의는 되지 않았다.
② 적극적 그리스도론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빈무덤 강조함 - 부활논증의 핵심이 뒤바뀌어 지엽적 이차적인 문화하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빈무덤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활신앙이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신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빈무덤의 의미 )
K. Barth 변증법적인 신학 ( 종말론적 신학 )
-. “이루어졌지만 아직 아니”라는 형식, 즉 종말론은 역사의 끝이 아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말씀과 다스림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역사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하다. 상징, 유비이다. 빈무덤은 그저 부수적 현상이다.
⇒가현설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Bultmann
-. 바르트와 같이 부활을 객관화하지 않았다. 슐라이허마허와 딜테이의 학설을 발전시킴. 정신의학적 용어적 이해라는 매개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고 이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활은 이해의 대상이지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조직신학이 슐라이허마허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신앙론- 주관 신앙 체험의 해석이며 하이덱거의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부활신앙은 십자가의 구원사건으로서, 종말론적 의미가 나에게 주는 의미의 본질 때문에 복음선포가 가능하다. 교회가 복음선포를 하고 있으므로 부활 신앙은 교회의 시비에 의해서 확인된다. 이때 그리스도는 없고 케리그마의 당담자인 교회만이 남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는 케리그마 속에서 드러난다.결과적으로 사건 전승과 교회 안에서만 부활신앙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역사적인 질문이 무의미하고, 실존적 종말론적인 해석만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사건과 부활신앙이 동일시 되면 교회론적으로 설명한다. ⇒ 그리스도의 초월성이 훼손당한다.
* 에베린 , 마르크센 - ‘보았다’는 체험이 ‘부활했다’는 신앙으로 확신되어갔다.
* 마르크센 -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지상생활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즉 불트만은 부활은 십자가의 종말론적 의미로 설명하는 반면 마르크샌은 모든 설명의 중심을 지상 예수의 업적의 연장으로 설명한다.
* 페쉬 - 진화설의 영향을 받아 바르트, 불트만을 넘어선다.
* 판넨베르그 - 역사 현장의 계시이므로 모든 것이 역사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빈무덤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설명하다 보니 종말론적 관점에서 설명이 빈약하다.
결론 :
가톨릭 학자들의 시도 ( p.240)
역사적 사건은 다의적이기 때문에 징표라는 범주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노력함. 즉 의미만 담겨진 말이 사건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징표적 의미를 인정한 과학적인 증명은 아닐지라도 빈무덤은 가현설 배제의미가 담겨져 있다.
칼 바르트의 종말론적 해석 -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중요하지 역사적 사실 필요하지 않다.
가톨릭 - 이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설명 가능해야 한다.
죽음으로 생명의 지속성이 인간에 근거하지 못하게 되는데, 하느님만이 이것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부활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 인간학적 견해 -------------------
* 칼 라너 , 보로스 ; 자유를 통해서 궁극적인 것으로 향해 나가고 있다.
* 라씽어 ; 사랑의 완성으로 부활 이해
* 판넨베르그 ; 희망의 현상학으로 부활 이해
* 몰트만 ; 정의의 구현실현에 대한 희망에 대한 확인이 부활이다.
-> 인간의 의미는 역사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종말론적으로 귀결되고 궁극적 의미가 인간에게 있다.
3. 신학적 근거 제시 - 부활과 발현 설명
* 하르낙 ; 예수께서 베드로 다음 야곱, 열두 사도, 바울 순으로의 발현은 초기 교회의 지도체계를 이해해간 변화과정이다. 부활은 역사적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교회의 핵심적 주체의 위치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부활 신앙을 전하는 주체 권한을 가지고 있다. 즉 발전과 사명이 연관을 가지고 있다. 부활하신 다음에 파견소명을 주신다.
⇒ 파견을 따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이며 기능적으로 초기 교회의 지도권의 변화되는 과정으로 설명할 때, 인격적인 해석과 반립하게 된다.
-. 결정적인 용어; ꡔ 보다 ꡕ 라는 용어가 가지는 의미
① 보였다 : 이 경우는 제자들이 주인공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졌다.
②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서 예수님을 보여 주셨다.
③ 중간동태 : 예수자신이 자신을 보여 주셨다.
여기서, ②,③의 의미 : 하느님 신현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은폐성과 신비성이 구약의 하느님의 신현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부활을 하느님의 신현으로 이해할 때 모든 문제 해결된다. 사실이면서도 역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신현으로 이해한다.
* 마르크센 : 보다 라는 체험은 부활하신 분이 아닌 예수님을 보았던 것. ‘보다’ 라는 체험의 틀이 바뀌어서 부활로 이해됨. 예수의 부활은 보았다라는 체험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보다’는 ‘그분을 일으켜 세우셨다’라는 말과 함께 이해할 때 의미가 확인된다.
출발점은 제자들이 예수를 보았다라고 한 것에서 시작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1 장에서 나타난 바울의 자기의 개인의 현실(묵시문학) 부활이 종말론적 사건의 일환으로 하느님의 업적, 종말론의 앞지른 사건, 묵시문학을 체험한 사건으로 이해할 때 부활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즉, 하느님께서 영광으로서의 십자가의 예수를 확인시켜주었고 하느님께서 예수를 높이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셨다는 의미를 묵시문학으로 이해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가능하다. (p.248)
복음에 발현기사에서 예수께서는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있다.
결론 :
① 부활 발현은 결국 물적 증거의 대상이 아니다. 선택해야할 입장의 메시지이다.
② 부활하신 주님과의 체험은 하느님과의 만남( 신체험 )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종말론적 계시이기도 하다.하느님만이 우리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의 마지막 근거이며, 구체적으로 예수가 그 근거가 되고 있고 종말론의 선취자로서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③ 첫제자들의 부활체험이 우리 신앙의 기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첫 증언자들의 체험과 그 전승을 통해서만이 매개된다. 그래서 복음선포의 증언자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구별되어 있다. 도식적인 설명인데 왜냐하면 첫 증언자들과 우리들을 동일선상에 놓아야지 구별된 쪽으로 본다면 우리의 각자의 비약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매개시키면서 살아지는 의미이다. 즉 증언자들이 증언해 주면서 증언의 의미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카스퍼는 소홀히 하고 있다. 교회론적 설명 속에 즉 케리그마로 남지만 교회안에서 예수는 부활하고 있다. 그래서, 예배와 전례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것이 객관적이냐 그렇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나 예수를 만날 ?育품? 있느냐 없냐라는 것이 마지막 문제이다.
(7장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의 내용) 부분은 따로 정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뒷부분은 중요하니 꼭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간단명료한 정리가 되지 못한점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음부터는 우리 모두가 강의록 정리에 좀 성실히 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 3 부 그리스도의 신비
제 1장 하느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
1.자기비허의 하느님의 아들(필립 2,5-8)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신약성서는 여러가지 이름으로 답하고 있다. 메시아, 예언자, 구세주,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그것이다. 그중 가장 적절하다고 판명된 칭호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 아드님에 관한 하느님의 복음’(로마1,3.9; 2고린1,19; 갈라1,16) 이라는 신앙고백 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견해가 종교사학파와 비신화화를 주장하는 그룹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이면에 아직 미개하고 미숙한 원시사회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구약의 비신화화를 바탕으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카스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장에서 자신의 논리로 전개하고 있다. 이것의 핵심적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미 구약에서 부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왕, 예언자, 사제에게 주어진 칭호였다. 그러나 이렇게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 문화권에서 말하는 개념 즉,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神子의 개념 표현과는 다르다.
스토아, 그리스 철학계의 신화적 표현은 실제 출산의 과정을 통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
성서는 아들의 의미가 출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파견의 사명, 봉사의 임무를 줌으로써 형성되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카스퍼는 주장하고 있다. 구약에서 부여한 특수 사명이란 선택에 의한 파견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봉사의 의미로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Fillus Dei --kenosis
출발 : 기능적인 그리스도론
Kenosis로서의 하느님의 아들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능적인 그리스도론이 항상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의 기능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카스퍼는 기능적인 그리스도론이라고 한다. 우선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해하고 고백하게 되는 첫번째 단계는 그분의 기능을 볼 때 시작되는데 이것이 이 章을 해독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그리스도론을 상기하면된다. 유스티누스의 그리스도론은 Logos가 그 자체로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관련될 때만 그 위격성을 갖는다고 본다. 이러한 전개는 본의아니게 종속론에 빠지게 된다.
다음 단계는 카스퍼에 의하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본질을 똑같이 한다는 본질적 그리스도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의 철학사상, 관념론과 연결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점차 관념화 철학화 하게 된다.
따라서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것을 문제화하여 Substantia개념에 대치되는 Persona개념을 형성하면서 본질적 그리스도론에 제동을 걸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능적으로 출발한 그리스도론이 본질에 귀의하면서 우리와 무관한 본체적인것으로 사변화되고 헬레니즘화 될 때, 초기의 교부들은 예수의 역사적 삶과 죽음이 우리를 구원한 측면을 고려하여 비판적으로 그분의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Persona개념을 도입하여 위격적인 그리스도론으로 다시 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카스퍼는 이러한 일련의 진전과정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첫째,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기능에 주목하는 기능적인 그리스도론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뽑히었고 사명을 받아 봉사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도록 파견된 의미로서 이해하는 그리스도론인 것이다.
둘째, 하느님의 속성에 주목하면서 현실과 무관한 철학적 사변적인 본질적 그리스도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주치는 것이 유스티누스의 로고스론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의 싹이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볼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유일회성)이 항상 확인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기능적 그리스도론과 마찰을 빚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스토아 철학적 요소를 흡수하면서 그리스도를 원초적 로고스로 보게된다. 그러다보니 그 자체가 본질적인 것으로 설명되면서 헬레니즘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에 제동을 거는 것이 바로 니체아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그 이후의 공의회의 선택인데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세째, 이러한 결과로 위격적 그리스도론이 펼쳐지게 되었다.
여기서 예수의 독특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으로 대두되게 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전권요구는 타종교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칭호도 이러한 전권요구에 합당한 것은 없다. 카스퍼는 예수의 구체적인 역사, 삶과 죽음, 존재자체를 하느님께 대한 설명으로 본다. 다른 말로 예수는 하느님의 성사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수 있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원성사이며 바로 하느님을 해석해주는 언어인 것이다. 여기서 카스퍼는 요한복음 14장 9절 ‘나를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를 제시한다. 이런 식의 내용은 칼 라너의 표현과 연결시키면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성서의 점진적 설명
1)공관복음을 볼 때 다소 진전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론적 반성이라고 할수 있는 부분이다. 요르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암시되고 있다.
2)마르코 복음에서 전체적인 복음의 서두에 신앙고백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미 예수를 정의할 때 Filius Dei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마르코 복음 첫머리는 복음 전체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총체적인 언명을 보여준다.
3)루가복음에서 마리아의 잉태 대목이 바로 성령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성서의 구성상으로 볼 때 마지막 결론인데 이것으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신한 부활이후의 신앙고백을 잘 요약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초기교회의 이의제기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단으로 단죄된 에비온파, 양자설, 도체티즘이 그것이다.
에비온파는 유다교 문화권에서 형성된 이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종교분파이다. 이에 의하면 예수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나 도덕적 시련을 이겨낸 다음에야 하느님의 양자로서 확인되었다고 주장한다.
카스퍼는 그러나 부활 이전의 예수의 전권 요구에 대해서 이 에비온파의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반박한다. 부활 이후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입양되었다면 부활 이전의 예수의 지상생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모든 이의 학설에는 일리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 이유는 성서의 종말론적인 실재이해는 초역사적인 본질 개념을 잘 모르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즉 존재를 본질로 이해하지 않고 실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입양은 예수의 존재 자체를 하느님의 실재로 이해할 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고 카스퍼는 설명한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기능적인 그리스도론이 본질적인 그리스도론으로 전이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신약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 성변용(聖變容)의 예수, 성신에 의한 잉태 등의 내용은 기능에서 본질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접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본질적 그리스도론 다음 단계에서 는 파견된 그리스도론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본질적 그리스도론만 이야기하다 보면 사변이나 관념에 불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예를 카스퍼는 요한복음을 들어 설명해 나가고 있다. 요한은 본질적이라기 보다는 인간과 연결된 구원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하며 파견된 그리스도론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 예수의 본질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며, 또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여백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뜻에 대한 순종의 의미로서 구원론적인 그리스도론을 요한 사도가 펼치면서 나름대로 종합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울로는 모든 것을 십자가로 풀려고 한다. 결국 십자가가 그리스도교 핵심, 신학의 기본열쇠가 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결의, 선택, 결단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말씀, 계시의 총괄적인 수렴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여기서의 ‘반드시’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묵시문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달리말하자면, 주어진 현실을 수렴하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다음에 사도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헌신정식’, 즉 Christus Traditus, 넘겨진, 전달된 그리스도, 헌신적인 위타적인 의미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기능적 그리스도론 - 본질적 그리스도론 - 파견적,구원적 그리스도론 - 십자가의 그리스도론으로 진전되어 감을 알 수 있다. Christus Traditus(넘겨진,전달된,팔려진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해석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있어서 십자가의 죽음?? 주역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말해서 역사의 주관자가 하느님이라는 뜻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역설(paradox)드러난다. ‘죽어야만 살리라’,‘죽음을 통해서만 부활하리라’는 역설을 통한 설명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역설은 그리스적 신관, 또는 평범한 신관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치욕, 부끄러움, 좌절, 실패의 표현인데 이것을 통해 부활이 이뤄지며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것은 Kenosis의 신비로 이해해야만 수용 가능할 것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의지가 꼭 관철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이다. 이 말을 현실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앞에 주어진 고통, 좌절, 비참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뛰어넘는 결단으로 십자가를 이해할 때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는 것이 카스퍼의 성서적 이해라고 하겠다.
때문에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단순한 해석의 차원이 아니며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내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구체적인 체험과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지 단순하게 어떤 의미만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이해가 역사 전체, 두주관 젃체를 바꾸어 놓았다는데 십자가의 혁명원리가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카스퍼의 견해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결국 신관에 대한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은 신관의 위기를 초래했다. 혁명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해되는 하느님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모험, 도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카스퍼는 암시하고 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자신의 전존재를 건 결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전체로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며, 실제로 오늘날의 무신적 성향은 이런 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이것의 수용은 역사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모험의 결단으로서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카스퍼의 묵상결과인 것이다.
그의 결론은
1)십자가와 부활에 입각한 그리스도론적 해석은 하느님 이해에 대한 위기와 함께 전우주와 역사를 새롭게 하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2)무력(無力)가운데 위력(威力), 무능함 가운데 전능성, 시간안에 초월성, 불변성안에 가변성을 드러내는 하느님은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라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수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3)따라서 하느님은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내재하시는 그분을 나자렛의 예수라는 구체적인 인물의 역사와 운명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뿐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라고 일컫는다. 하느님의 초월성이 예수 안에 내재되어 있고 그 예수가 바로 교회 안에, 역사 안에 늘 현존하고 있다는 도식이 설명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아들이라는 논리가 이어서 계속되게 된다.
카스퍼는 요한복음 1장과 8장을 주석하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논점이 기능언명에서 본질언명으로 전이되고 있다. 예수의 기능을 언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에 따라 기능적 그리스도론은 필연적으로 본질적 그리스도론으로 옮아가야 한다는 시각으로 이 부분을 주석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카스퍼는 심위일체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기능적인 설명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엮어가고 있다. 그의 설명은 순차적인,시간적인,종속적인 설명을 넘어서서 병렬적으로 언급하면서 창조하신 하느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우리들 안에 사랑으로 현존하시는 성신의 역할을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대내적인 심위일체가 아니라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칼 라너의 견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카스퍼도 성삼론을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구원사적인 의미에서 인간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위와같은 내용이 Kenosis, 비움을 통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설명이다. 즉 그분의 기능을 통하여 본질로 향하고자하는 움직임을 카스퍼가 요약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십자가의 역설이 하느님의 구원계획, 결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 하겠다.
** 본 章 정리 **
Kasper의 Filius Dei로서의 신앙고백은 과거 그리스도론보다 진취적인 면을 갖는다.
그는 3가지 관점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가, 자기 비허(Kenosis)로서의 그리스도인데 이는 과거 본질적 그리스도론을 넘어서면서 기능적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위격적 그리스도론까지 이끌며 현대신학에서의 새 신학 방향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또한 유럽신학의 한계를 드러내므로, Boff의 해방론적 그리스도론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둘째는,Aeternitas(영원으로부터의 하느님의 아들)
세째는,Pleroma(시간의 충만으로서의 하느님의 아들)
이러한 세 관점들은 과거 스콜라 신학의 관념적 그리스도론을 극복하면서 우리 시대에 맞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론을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역사,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보완하고 특별히 십자가 신학, 나아가 신비(Mysterium)가 중재 된다. 그러면서 열쇠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즉, 삼위 일체의 대내적 관계의 의미가 역사내의 진입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간 관계로 볼 때 삼위 일체적 의미가 있지만 성삼 내적인 관계에서 볼 때는 세 위격(tres persone)의 구별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라고 라너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그 한계를 말한다. 그래서 그 해결 방법을 역동적 관계속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선재성에서 위격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첫번째 항목에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근거를 그분의 케노시스에 둔것은, 인간 삶의 근원인 것과 맥을 같이한다.
2. 영원으로부터의 하느님 아들 (aeternitas)
두번째 항목에서, 영원성을 지님은 시간의 연장선, 완성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고 카스퍼는 말한다. 나름대로 先在性, 즉 하느님의 본질에 기원을 둔 거기에서 귀납적으로 얻어진 결론이 아니라 우리가 알기전에 시작된 무한성을 강조한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인간의 이성, 언어로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가 고민이 된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고 이러한 호칭과 하느님께 대한 관계 설정은 하느님 본질에 속했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종말론적 의미, 종말론적 성격 때문에 예수의 본질과 선재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그의 先在性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성격, 그분의 부활 또는 역으로 세례, 지상생활에서의 가르침의 결론으로서의 선재성이 아닌, 신앙에서 소급되는 영원성.선재성이 아닌, 바로 이미 전제된 (필립 2,6-8) 주님이라는 고백과 선재성은 같은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카스퍼는 성서를 인용하면서 제시한다. 즉, 도미누스,퀴리오스는 선재적인 주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단어 의미는 존재 의미와 함께 본질을 언명하는것일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과 형상을 같이함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선언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선재성이 우리의 구원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재성이라는 것이 예수의 지상 생활에서의 결론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에게서 연유된 것에서 이해해야 한다.
카스퍼는 또한 선재란 의미와 함께 파견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의 인격과 운명은 오히려 세계내적 역사의 연관에 그 기원이 있다기 보다 세계내적으로 연역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느님은 몸소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 아들의 선재에 관한 언명의 의도는 우리 자신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와 우리의 구원에 그 궁극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주님으로 고백한 그분이 어째서 선재적인 분일 수 있겠는가 ?
예수의 운명, 인격이 지상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내적 역사와 연결된 또는 파악된 것만은 아니다. 예수의 존재 양식, 삶 자체가 바로 하느님 설명의 표현 방식이다. 그래서 선재라는 주제-그리스도의 선재성은 다만 표상을 채택했다해도 영지주의나 동방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일회적인 사건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서 자신을 건네주셨고 인간과 중재하셨다. 따라서 예수를 파악하는 것은 하느님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즉 예수가 하느님의 본질을 정의해 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선재적인 언명은 하느님 개념의 포괄적 해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다.
성서는 사실상 하느님과 역사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특별히 그리스 철학에서 나타나고 있던 초월적, 관념적 신개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신학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신관이 지금까지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에 영향을 주어왔다는 바로 여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다.
그런데 성서의 하느님은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영원성, 선재성의 의미는 그리스 철학 개념과 전혀 다르다. 즉 성서적 의미의 영원성은 영원이 시간안에 잠입했다는 의미이다. 반면 그리스 철학에서는 시간을 넘는 무관한 무한의미로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를 제거해야 한다.
성서적 하느님은 바로 출애급 사건에서 처럼 울부짖고 있는 백성과 함께하는 역사내적 시간안에 개입하는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원성이라는 것은 시간안에서 인간에게 신의를 지키시는 하느님이다. 여기서 그분께 대한 희망이 싹틀수 있다.
그러면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consubstantia)
1) 그것은 전례적 고백으로서 추상적 의미가 아니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구세사적 고백의 교회 전승이었다.
2) 따라서 이것은 빈말이 아니고 하느님과 직결된 설명이었으며 사변적 설명에 국한되지 않은 우리에게 필요한 응답으로서-구원론적 의미로 본질을 같이 했다는 의미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Persona개념은 substantia개념을 보완시켜 주었다. 즉 본질적 신론이 위격적 신론에 의해 보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본성이 아니라 인격 내지 위격이야말로 궁극의 것이요 최고의 것이라는 사유의 방향전환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형이상학적 본질사유가 신학안으로 들어와서는 마침내 성서의 종말론적이요 구세사적 사고를 멀리 내쫓게 되었다.
이렇게 초기 교회의 형이상학이 지배적이던 신학을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다시 정립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톨릭은 너무 쉽게 전례등을 통해 매개하였다. 그는 이러한 형식성을 배제하면서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믿음,신앙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에서는 이것이 다시 형식화되었다. 한편 루터는 믿음은 예수의 죽음,십자가를 통한 무한한 심연과 연결되었다고 하면서 새 전기를 마련한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속성에 참여하는 한 몫을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와,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시 되며,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와 같은 역사상의 예수상과 조화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근세 이후 헤겔의 변증론적 설명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큰 변화를 주었다. 즉 그의 제3자 통합윈리에 의해 성서원리가 재해석된다. 달리 말해 절대정신이 타자안에서 또한 그 타자를 위하여 자신을 내놓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을 객체화시킨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대정신의 본질에 속한다. 헤겔에게서 이것-절대정신-이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서 말씀의 철학적 해석이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의 고백이 삼위일체와 영원성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십자가가 걸림돌이 된다. 즉 십자가는 사변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리고 변증법적으로 지양되고 화해되어 버리고 만다.
따라서 카스퍼는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함께 자유의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격성은 헤겔의 변증론적 설명에 의해 한계를 지니면서 동시에 초월성을 지닌다고 본다. 또한 이것은 스콜라 철학에서 무시되었던 사랑의 관계 즉 사변적 접근에서 하느님을 역동적 관계로 이해할때 보완될 수 있다. 이것은 영원이 인간 세계에 개입한 의미, 선재적 그리스도가 시간안의 예수로 다가온 시간을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영원으로부터의 하느님의 아들, 선재적 그리스도가 풍요롭게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사랑의 역동적 관계를 바로 본질적 그리스도론에서 위격적 그리스도론, 현실안에 다가온 영원의 찬미로 이해할때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참된 영원성, 역사 개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시간의 충만으로서의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
여기서는 중개 사상이 핵심이 된다. 우주적 창조, 우주적 중개 사상이 성서 전반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중개 사상은 구속적 의미를 통해서만 확인되며 선재적 사상과 근원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구약의 지혜 사상에서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 . 그리고 신약 성서 Q자료에서도 지혜적 그리스도론을 펼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지혜사상은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도움되었다. 그러나 Sophia가 그리스 철학에 근거를 두기에 세속적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여기에서 해방신학자에 의한 해방론적 그리스도론이 보완되어야한다. 하지만 현실 개혁과 그리스도의 삶을 동일시 할 때 그리스도가 본래 추구했던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서 중개 사상이 흐려질수 있다. 결국 그리스도의 구원이 현실해방과 단순히 동일시 될수 있는가 하며 카스퍼는 염려한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합(Intigratio)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그 통합사상이 어떤 분명한 선택없이 가능한가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결국 카스퍼는 통합을 이야기 하면서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는 하느님 사랑의 초과 실현 신앙,은총으로 이해할수 있는 열매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든 것을 푸는 열쇠라고 한다.
결국 현실의 비참한 상황에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떻게 관계될 수 있는가,여전히 해방으로 다가오는가가 우리의 물음이다. 카스퍼를 통해 이러한 물음-구조적 불의-에 대해 도외시하고 있는 유럽 신학의 한계를 볼수 있다 (2,3항이 결국 관념에 머무름)
( *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근거가 무었인가? 참된 뜻은 무엇인가? )
제 2 장 인간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
(Fillus homnis)
* 카스퍼는 오늘의 그리스도론에서부터 문제 제기.
먼저 성서의 예수님 -> 죽음과 부활
초기 교회의 고백 신조 -> “Deus - Homo 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역사적, 철학적, 사변적으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주로 다룸
1)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Filius Dei)
2)인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Filius hominis)
3)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Mediator)
* 과거에는 스콜라 신학적인 그리스도론이었다.
신앙고백 ; 예수 그리스도 = Deus - Homo
성서, 공의회의 신조(니체아,콘스탄티노플, 칼체톤); 2-5세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 정의!
문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깊이 다루지 않았다. -> 제2차 바티칸 이후 개혁
** 오늘의 주제 = 1960년대 그리스도론의 핵심 주제;Deus - Homo 로서의 그리스도
그러나 너무 관념적, 그리스 철학적 사변적이었다. 또 개신교에서는 깊이있게 다루었으나 가톨릭은 등한시하였다. 2차 바티칸에 와서야 이 문제를 다룬다.
## 사람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 ##
1)참인간 그리스도와 우리 구원의 구체성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2)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우리 구원의 인간성 ꠐ
3)위타인간 그리스도와 구원에 있어서의 연대성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 을 다루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해방성이 배제되어 있다. 카스퍼는 연대성 안에서의 구원성에만 머물렀다. ( 연대성에는 해방성이 필연적인 것이다.)
1. 참 인간 그리스도와 우리 구원의 구체성
-- 강생, 육화의 역사성 강조
구체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강생, 즉 Incarnatio의 역사성, 구체성이다. 이 자체가 신비이고 이 자체가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타종교, 특히 불교와의 대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그렇다면 강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과 인간이 결합하였다는 이 문제에 대한 이해에는 답이 다양한데, 영지주의가 가장 큰 도전 자료를 제시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Docetism(가현론)이다.
## 가현론 :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왔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의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럴때 인간의 신성이 나타난다는 것.
** 우리는 영-육의 2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여기서 카스퍼는 육체성의 두드러진 의미를 철학,사변, 심리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강생의 몰이해를 지적한다. 즉 육체를 Excarnatio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육체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 표출은 불가하다. 육체와 정신은 불가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Incarnatio를 통해서 즉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 구체적,육체, 역사성의 가치를 하느님은 껴안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성의 부정적인 면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죄(罪)론
죄는 인간과 하느님, 인간 상호, 자연과의 관계를 깨뜨려 인간을 소외시킨다.
구원이란 이런 소외된 관계를 정리하여 해방시키는 것이다.
2.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우리 구원의 연대성
** 사도 바오로의 인간성 설명 ** 보프의 설명
- 순종(obedentia) 강조 - 기계적으로 이해한 순종 거부
-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예수는 법과 - 예수는 그런 순종을 한 것이 아
전통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니고 순전히 자유스러웠던 것이
-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완전한 삶 다. 철저한 자유의 삶-하느님의
뜻 안에서.
진리에 대한 순종은 바로 불의에 대한 거부와 싸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의 인간성이 보여주고 있다.
카스퍼는 아담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는 데 특히 이레네우스의 수렴사상(Recapitulati)으로 설명.
이레네우스는 인간에 있어 모든 것은 잘못 된 것에 역관계를 이루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수렴한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가 부활해내고, 하와가 실패한 것을 마리아가 보완한다는 철저한 대속사상, 수렴사상, 보속사상이 이레네우스 신학이 중추 내용이다.
가현설에서는 로고스의 강생을 강조했는데 영육의 일치 즉 구약과 신약 이전의 영육 일치 사상이 강생과 연결될 때 영육의 도식이 “로고스 + 육”의 일치라는 개념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냐시오와 이레네우스는 예수의 강생을 통하여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고백에 이른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신앙고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 도식을 떼르뚤리아누스는 “신성 + 인성”의 조화로 종합한다. 즉 육의 개념의 부정을 ?曼므歐? 위해 강생을 divinitas + huminitas 결합이라 설명. 여기서 육의 개념을 huminitas라 함으로써 조금 더 넓은 개념으로 확산된다. 이는 라틴교회의 정의가 된다. 동방교회 역시 하느님이 육체를 취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가 문제였다. 즉 로고스를 인간에 비유할 때 Anima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럴때 그리스도의 영혼은 무엇이고 로고스는 무엇인가? 였다.
* 여기서 아리우스 이단이 등장한다. 아리우스는 입양설로 인간적 접근을 시도한다.
입양설로 하느님이 사람이 된 것이나 인간이 하느님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그분의 천재적 영성과 노력으로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양자로 높여졌고, 우리에게 모범을 제시한 것이지 그 자체가 하느님은 아니다.
-> 이런 면에서 이는 하강적 그리스도론이라 할 수 있다. 밑으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의 결합으로 매력을 준다. 또한 이해가 쉽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카스퍼는 입양설을 단죄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핵심을 몰랐다고 지적하면서 아리우스는 단지 로고스를 아니마로 대치시킨 것이 오류였다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예수가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었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것은 신성의 거부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구체적인 형태가 로고스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다만 로고스가 영혼의 역할을 한다고 보기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양자설을 배격하고 하느님의 친자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강생교리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아뽈리나리우스 그리스도의 신성을 견지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을 로고스가 보완했다고 본다. 이것은 플라톤의 3분법적 내용을 이용한 것이다. 즉 플라톤은 인간을 “1)corpus 2)psyche-감각혼 3)pneuma-정신적 혼 ”로 구분한다. 이것을 이용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밝힌다. 즉 pneuma의 역할을 로고스가 대체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무신론적 인간론과 이해를 같이하는 것이다.
철학적 문제 - 두개의 완전한 실체 즉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합치될 수 있다.
신학적 문제 - 인간 정신을 예수가 지녔다면 죄성을 메꾸어줄 수 있어야하는데 이것이 로고스다. 즉 예수의 완전성을 로고스가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론에서 육체는 단지 도구로 이용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 아리우스파의 사상은 독일 인도 쪽에 널리 퍼짐.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한 이런 사상이 퍼진 지역에서 정통 그리스도론과 맞서게됨.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 Deus 칭호 즉 Deus-Christ가 강조되었다. 이는 곧 반아리우스의 반사작용으로 신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 아뽈리나리즘을 그리스도교 사상의 헬레니즘화로 본다.
## 인간 이해에 대한 카스퍼의 요약
1.인간존재란 일체를 타자에게서 받아가는 가운데 비로소 존립할 수 있는 존재요, 남을 힘입은 존재이며 그러기에 감사로이 영위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제 스스로 제 자신의 본질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고 제 현존재의 실현을 하나의 선물로서만 받을 수 있다. 즉 은총과 구원이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선물이다. 은총은 곧 우리가 인간일수 있게 되었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것을 의미하며, 인간 존재의 최고의 가능성 및 최고의 실현은 바로 성찬례이다.
2.인간의 자유는 해방된 자유요 놓여있는 자유이다. 즉 조건지워진 자유이다. 하느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자유의 유대 안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일체의 세계내적,절대성 주장으로 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고 동시에 세상을 위한 투신과 참여의 자유를 얻게 된다.
3.인간의 존재는 순종에서 완성된다. 인간은 듣는 가운데 존재하고 이 수용은 동시에 고도의 능동서, 다른 사람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호응함이고, 봉사하려는 모든 것으로, 자유는 결코 자의가 아니다. 즉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자유이며 이런 자유에 입각한 순응성은 아무런 저의없는 개방성이요 지속적인 호의이며 호소와 요청에 대한 대기성이다.
4. 신앙은 그 자체가 인간의 구원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진 구원의 가능성은 택일의 길을 터 주었고 신앙으로 선택될 수 있는 구원은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고 하느님이 독생성자의 본질과 형상에 참여하도록 정명된 것이다.
=> 결국 이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다.”라는 정식을 끌어낼 수 있다.
3.위타인간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있어서 의 연대성
- 인간 자체의 사회성, 연대성, 대속사상이 주제
*신학자들의 문제: 예수가 지상에서 사실 때 이런 사회성과 연대성, 또 대속사상을 완전히 이해했는가?
본회퍼는 “위타적인 예수, 공존(公存)의 예수”사상에서 구원사상을 펼친다.
카스퍼: 구원론적인 그리스도론을 펼침
대리 대속사상; 구약의 남은 자 사상(남은 자들로 인해 전체 이스라엘 구원된다), 모세의 중재 사상
한 사람의 잘못으로 모두가 벌을 받아야하는 개체와 전체와의 불가분성이 있다.
=> 이런 속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사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안셀무스의 구속원리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야하는 당위적인 내용들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함은 하느님께 빚을 진것을 의미하며, 그 빚을 갚아야하는데 인간은 그 빚을 갚을 수 없다. 절대적인 빚은 절대적인 분에 의해서만 갚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즉 그는 하느님이고 인간이기에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오늘날 이 사상이 가톨릭의 핵심이 됨
=>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판 :하느님의 자유성이 덜 강조된다. 꼭 빚을 갚아야 된다는 빚의 개념의 의무개념은 하느님의 자유를 훼손한다.
*카스퍼의 연대성의 의미 : 내 자리뿐 아니라 상대방의 자리를 보장해주는 것.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 주는 것으로 사랑의 원리의 또다른 표현이 됨.
그리고 죽음의 문제와 신앙고백의 “고성소에 내리시어”를 언급하면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연대성이 죽은이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을, 즉 지상의 우리뿐 아니라 죽은이들까지도 수렴하는 우주 만물의 수렴을 의미하는 연대성을 표현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 이로써 구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이는 사도 바오로의 구원사상을 연상케 한다. 즉 아담 한사람으로 우리 모두 죄의 권세에 있다. 그런데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의 보속 희생 자기헌신으로 우리 모두가 구원되었다. 하나 안에 있는 다수, 다수를 포용하는 하나의 개념에서 연대성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카스퍼는 여전히 정적인 구원론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비참한 현실에 살고 있는 이들, 타종교인들, 가난한 이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는 해방의 실천에까지 이르러야 하며, 이때 연대성의 참된 의미가 확인가능하게 될 것이다.
제3장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Mediator, 중재사상 -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과연 우리의 기도와 삶이 진정한 것이었는가, 형식적인 것이었는가?
* Mediator의 인격적 의미
칼체톤 공의회 신앙고백에는 많은 성서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神人 그리스도의 철학적 사변적 고백은 아니다. 성서에서 직접 신인 그리스도가 고백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형성된 것이 곧 신인 그리스도이다.
교부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파악이 문제가 된다.
* 네스토리우스 논쟁 : 그리스도가 신-인이라면 그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사이에서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Christus Divinitas humanitas 일때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될 수 있으나 즉 마리아는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이 깨어진다. 이것이 5세기 에페소 공의회 직전까지 논쟁의 하나.
=> 그리스도의 모친은 문제가 없으나 Divinitas와 humanitas의 합체 관계가 무엇이냐에 고민이 있다. 이의 해결을 위해 이론적 결론보다 실천적인 결론으로 에페소 공의회의 선포 등장. 즉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신인성의 완전한 일치로 마리아도 완전한 하느님의 어머니이고 사람의 어머니이시다.
* 니체아 공의회 :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셨다는 Consubstantiales 강조
* 콘스탄틴 공의회 : 아리우스의 양자설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본체를 같이 하셨다고 함.
* 에페소 공의회 :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신인성의 합치.
persona; 위격성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 칼체톤 공의회 : Christus Deus - Homo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고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는 완전한 하느님이고 완전한 사람이다”는 정식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들의 구세주, 중재자이다”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의 종언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실천이 따라야 한다. 바로 이런 실천에서 그리스도론을 펼쳐야한다.
우리의 이런 고백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근거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 보프 **
9.그리스도론화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 예수 유년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확인이다. 바로 이 핵심적인 케리그마에서부터 예수의 지상 생활과 공생활에 관한 가르침, 그의 삶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유년기 설화에 대해서도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선포라는 관점에서, 즉 신앙의 고백과 선포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 공생활, 그리고 유년기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년기 이야기를 역사적 고증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성삼일 때나 크리스마스 때 말 구유 장식과 같은 외적인 장식이 예수의 어떤 부분을 진실로 고백하고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겉치장이요 미신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유년기 설화는 1-2세기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할 때, 그 시기의 언어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 메시지,핵을 포착해서 우리 시대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설화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접근하는 것은 복음을 기계화시키는 것이된다. 따라서 오늘 우리 시대의 말구유는 무엇이며 또 목동은 누구인가, 베들레험, 갈릴레아, 나자렛, 동방박사, 별 등에 대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가 복음이 전하려는 핵심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펼쳐준 그 예수를 그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유년기 설화를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족보를 보면 사실 예수는 다윗의 후손일 수 없다.“마리아의 남편 요셉”
요셉의 족보를 이야기하지만 예수는 바로 이 족보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동정녀 잉태가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가 동정이냐 아니냐가 촛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건에다 촛점을 맞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다윗의 후손, 요셉의 아들이라는 그 시대의 문화의 한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모순적인 이야기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는 이 이야기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를 포착하는 중요한 점이 된다. 즉 탄생 이야기에서 마리아의 동정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 성령의 힘으로 왔다는 것,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도 수렴하는 것이 그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대비시키면서 예수의 탄생의 우월성쪽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은 애초부터 계획되어지고 성령에 의해 이룩되어진 사건이다. 여기에서 루가복음의 핵심이 드러난다.
그런데 요한은 더 나아가 바로 로고스,말씀으로서 족보적인 의미, 나자렛의 예수라는 의미를 초월하는 우주적인 존재로 예수의 탄생을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고백적인 관점에서 유년기의 설화를 이해할 때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구약의 한 귀절을 인용하면서 “--이 이루어졌다”고 제시한다. 즉 구약의 완성으로서의 메시아, 구약의 종착점으로서의 메시아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예수가 구원의 종점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마태오 1,2장은 새로운 출애급의 완성으로서 모세의 연장으로서 예수가 엿보인다. 즉 동방에서 별이 나타나는 것, 헤로데는 파라오를 연상케 하고, 어린이 학살 사건은 모세만이 구원되고 다른 아이는 죽었던 박해 상황을 연상케 하는 등 바로 새로운 출애급이자 완성인 예수의 출생을 말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출애급 사건이 바로 이 예수의 유년기 설화에서 그대로 연결되었다.
10.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이 그토록 인간적일 수 있으셨다.
예수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칼체톤 공의회의 신앙정식은 Deus-Homo이다. 이것은 예수는 Deus-Homo일뿐 아니라 Homo-deus 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동안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Deus에 촛점을 맞추어 고백하였었다. 물론 이것이 강생의 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존재는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이기 때문에 동시에 어떤 인간의 완성도 우리에게 선취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Homo-Deus 라는 사실을 우리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위에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한 역사적 실존 인물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 아,이 분이 주님이었구나” 하고 다가가야지, 형이상학적인 관점은 우리 삶과 유리된 이론적인 고백으로밖에 남지 못한다는 것을 보프가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고 있다. 이는 결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다 출발점을 두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학은 이 Homo 에서 출발하여 Deus에 귀결한다. 즉 귀환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게서의 그리스도론에 가장 중요한 점은 콘트라 도체티즘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이 긴장관계는 신성과 인성 중 어느 쪽에 치우치느냐에 따라 이단의 진위가 규명된다. 우리 고백은 “예수는 하느님이다”는 것 때문에 하느님쪽으로 치우치게 되었는데, 따라서 여기에서 생겨난 첫번 오류가 가현론이다. 즉 예수의 역사적 삶은 하느님의 외적인 출현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와 에비온파가 여기에 속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신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성은 조금 약하게 된다.
두번째 생겨난 오류는 성자의 수난도 사실은 성부께서 하신 것이라는 성부수난설이다. 계속해서 이것은 예수가 지닌 신성을 너무 강조하게 된다. 육화는 결국 아버지 성부께서 강생하신 것이다. 그리고 강생하는 성부가 수난하는데 여기서 예수가 비쳐진 것이다. 입양설, 양자설도 성부수난설과 관계된다. 여기서 종속론이 등장한다.
종속론 : 예수는 신성을 지녔지만 여전히 성부의 신성에 종속되어 있다. 이 종속론도 여전히 신성 쪽에 치우친 것에서 생겨난 오류라고 보겠다.
아리우스 이단
로고스가 모든 것의 으뜸인데 바로 이 로고스가 강생해서 사람이 되었다. 바로 이가 하느님의 첫번째 아들이다. 이 로고스 신학도 종속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우스 사상에서 즉 사람의 아들이 로고스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승격되었다고 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많이 발견되는 사실이다. 사실 성서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즉 예수는 하느님보다 못하다든지 그에 종속되어 있다든지 그에 의해 높임을 받았다는 등의 주장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너무도 많다. 성서의 고백 분명하지 않고, 인간의 이해 한계도 있고 해서, 예수를 Deus로 고백하는데 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신성쪽으로 치달아 성부와 동질적인, 본체적으로 같은 존재로 정의한다. 즉 예수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면서 구별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자적인 신성에 촛점을 맞추었다.
-- 동일본질 consubstantialis
cum Deo
cum Homo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Nestorius에 대항하여 그리스도릐 신성을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서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 으로 고백한다. 이는 451년 칼체톤 공의회로 이어지는 데 여기서 Deus-Homo가 고백되어진다. 바로 이것,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라는 고백에서부터 새로운 그리스도론이 활발히 논의 되게 되었다.
보프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들을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관념적이며, 성서의 해석을 우의적으로 한다. 여기서는 클레멘스와 오르게네스 중심이다. 여기서의 주제는 Logos신학이다. 모든 것을 연결할 수 있고 수렴할 수 있는 로고스, 이것이 신학의 핵심이었다.
이 사상의 전신은 유스티누스의 “말씀의 싹” 사상이다 ; 모두가 말씀의 싹을 지니고 있다. 그 말씀때문에 모든 지성인들이 크리스찬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로고스가 바로 구원의 기준이 되며, 신학과 그리스도론의 중심이다.
예수에 대하여 설명할 때 신성이 강하니까 자꾸 방향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즉 본의 아니게 인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성을 견지해야할 책임이 교부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두개의 실체가 동시에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원리에 의해서 두개의 다른 실체가 하나로 융합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인성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강생하신 예수께서 완전한 인성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성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냐인 것이다. 그 조화를 위해서 예수의 Deus-신성, Logos가 spiritus를 흡수, 대치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로고스의 강생 때문에 예수의 인성은 사멸될 수밖에 없다.
나지안즈의 고레고리우스의 이의 제기 : 만일 예수의 강생이 이렇게 이루어졌다면 이 spiritus-영이 빠진 인간을 생각할 수 있는가? 로고스가 인간의 정신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spiritus는 구원되지 못하지 않느냐? 즉 완전한 인성을 위하는 강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만을 강조할 때 즉 로고스가 너무 강성일 때 단일성밖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뜻은 좋앗지만 바로 이 로고스가 지닌 강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성론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이다.: Natura Humana 인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서 인성은 폐쇄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개방적으로 신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한 1서는 단성론의 위험을 말하고 있다. 즉 바로 그 예수는 우리와 함께 먹고 마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분이었다. 따라서 인성에 대한 고백은 역사적인 예수가 전제되지 않는 가운데 신성,로고스에 대한 인식은 허구이다. 인간 예수, 역사의 예수를 간과한 채 예수의 신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대조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현실적이고 성서 해석은 자의적이다.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두 실체가 동일하게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우연적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어머니일 수는 없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긴장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인성과 신성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가 이의를 제기한다. 즉 하느님의 인간이 선재했었는데 어떻게 일치했는가?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제3의 존재인가? Christus - Deus - Homo 의 삼각관계가 Deus - Homo 의 관계보다 선재했는가? 이에 대해 강생하는 순간부터 실존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에서 다시 생겨나는 것이 이른바 네오 아리스토니즘이다. 문제는 두 학파 모두 강생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그 강생을 이해할 때 강생을 단순히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동시에 그것이 종착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강생의 의미는 하강의 구원사의 종점이라는 점이다. 이는 신화의 출발점이지만 하느님께서 완성하신 것으로서 강생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는 변증론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의 완성이자 출발점으로 해석할 때 이 문제가 조화있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예수를 끈질기게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느님의 강생인 동시에 인간의 신화(神化) -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것 - 에 대하여 선취적인 것으로 강생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체톤 공의회에서는 예수가 지닌 이 이중성과 단일성의 문제에 대한 종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Al. : persona의 견지에서의 일치,조화
An. : 본성의 이중성
여기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persona divina를, 즉 divinitas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persona는 Humana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divinitas쪽으로 기울게 되었던 것이다. Deus - Homo 도 마찬가지로 divinitas쪽으로 기울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형이상학적이 아닌, 교의적이 아닌, 실천적이요 구원론적인 고백이 필요하다. 이럴 때 Jesus - Deus - Homo 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ꠏꠏ ** 종 합 **
ꠐ 첫번째,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구원은 예수로부터 올 수 없다. 두번째, 반대로 예수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구원은 주어질 수가 없다. 세번째, 인성이 하느님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Deificatio는 불가능할 것이다.
네째, 우리들의 인성이 부족한 인성이라면 구원된 인성은 제3자의 것일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의 결합, 신-인 합치인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이 칼체톤 공의회의 고백이었다.
5세기의 그리스 문화권에서 그 용어를 빌릴뿐이지만 아직도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의 Natura는 Humana 인데 persona가 없을 수 있는가 하는 현대 신학의 문제제기이다. 즉 그리스도의 Natura는 Humana 인데 그동안의 그리스도론에서 persona Humana는 온데 간데 없고 persona divina 만 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체톤 공의회의 구체적인 존재인 예수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은 그분의 실존적인 양식을 고백한 것이지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고백한 것은 아니다. 즉 persona divina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위격적인 Natura Humana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언어는 현재와 다르기에 그것에 대해 기계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Natura라는 것은 지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인간 본성이라고 할 때 이의 발전, 상황, 과정등을 고려하는 것이다. 즉 persona는 Natura의 확인인 것이다.
보프에 의하면 부활은 수난과 죽음에 대한 확인이며, Natura에 대한 확인이 persona라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의 Natura라는 것은 예수의 인성도 반드시 포용해야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persona Humana와 divina의 일치는 여전히 고민으로 남는다.
persona는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이기에 열려져 있는 존재이다. 즉 항상 타자와 관계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에 대하여 정의할 때 보프는 타자를 위한 존재, 즉 예수는 자기를 비웠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이 케노시스의 의미, 강생의 의미로서, 하느님의 자기 비움의 의미인 것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다른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실존적 주체는 항상 하느님께 열려져 있고, 타자에게 열려져 있고, 하느님을 수령할 수 있고, 인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즉 자기 개인 중심의 삶을 사는 예수가 아니라 타자에게 열려진, 타자를 위한 존재가 예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Deus-Homo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부활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육체를 취한 로고스가 영적인 존재로 이행하는 것이 부활이라면 바로 이러한 고백의 의미도 natura에서 persona로 옮겨가는 도식으로 애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칼체톤 공의회에서 남아있던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해답의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에 나타난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자렛의 예수를 통해서 인간과 하느님을 이해해야할 것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인간을 꿰뚫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을 꿰뚫었다. 그래서 예수가 바로 Homo - Deus인 것이다. 즉 양쪽을 다 관통할 수 있는, 구원을 보장해 주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동시에 Deus - Homo인 것이다.
여기서 전체적인 의미에서 예수가 인류의 정점, 역사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라고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나타난 예수 ; 한 비천한 인간, 가난한 자의 벗,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한, 그 시대에 이의를 제기하고, 종교 정치 문화에 이의를 제기하고, 제도개혁을 꿰하며 성실하게 살다가 죽어간 그분. 그는 죽음의 삶이 곧 부활임을 이야기한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는 보증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보프는 이렇게 예수가 개방적인 존재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28에 나타나듯이 유다인과 이방인의 벽을 깬 예수, 자유인과 노예의 벽을 깬 예수, 남성과 여성의 벽을 깬 예수, 세계의 역동적인 의미로서 예수를 파악할 수 있다면 평등성의 실현, 세계의 역동적인 의미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수는 다른 이들을 위한 존재였다. 동시에 이것이 완전한 인간을 향한, 철저한 인간으로 향한 존재였던 것이다. 동시에 이는 하느님과 가장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예수, 의탁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하느님께 의탁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었다.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전적으로 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된 것이다.
따라서 칼체톤의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는 “예수는 위타적인 존재이다”라는 현대적인 말로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의 인간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었다는,인간의 비참한 역사, 비참한 신음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포용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현실, 비참한 현실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그러한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강생은 인간 조건 모두, 역사의 조건 모두를 수렴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교회와 세속을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가현론에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출처 : 밀씨선교사 동문카페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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