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서 나온 빛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 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 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 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로마 6,8-11)
부활성야에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침묵에서 음악으로, 억압적인
숭배에서 터져 나오는 알렐루야의 기쁨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셨고 또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시고 우리를 위해 해주실 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신바람이 용솟음친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소중한
전부가 되셨다. 세례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로 그분은 사람들의 참된 자아로서 우리 각자를
통해 당신이 뜻하시는만큼, 아니 우리가 허용하는만큼 당신을 표현하신다.
부활성야의 부활초(paschal candle)에서 흘러 나온 빛은 교회 전체로
퍼져 나가 우리 마음 속에서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으로
가득참으로써 우리의 존재 중심에 작은 빛으로 살아 계신다.
이 빛은 온갖 기능을 통해 퍼져 나가 마침내는 우리의 존재를 빛으로
채운 다음 우리를 통해 세상 곳곳에 하느님의 사랑의 불을 밝히는
힘을 가진다. 이 같은 변화는 개개인의 삶이나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그런 겉모습이
속임수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바오로의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도록"(로마 6,11) 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자아이므로 인간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명하실 수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까닭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는 둘도 없이 소중한 전부가 되어 우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부활의 힘을 쏟아붓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힘이 이미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손에 넣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부활초처럼 사방으로 전파되어 간다. 하지만 우리의 내밀한
존재 속에, 사람들 속에 거처하시는 그리스도의 체험을 깨닫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 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라고 하신 새로운
계명이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창조라는 경이로운 선물을 통해,
그리고 구원을 위한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경이로운 선물을 통해
그분의 존재를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저마다 독특하고 저마다
개성있는, 다시 말해 저마다 한계를 지닌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 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다는 표지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은 돌아서기가 불가능하다.
긔고 이 사랑은 끊임없이 기다리고 참아주고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섬기기를 좋아한다. 부활절 은총이 맺는 달콤한 열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용서와 수용과 섬김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네가 되시는 그리스도, 내가 되시는 그리스도, 우리 각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의 계명에 토대가 되는 실재이시다.
토머스 키팅 신부와 함께 걷는 「깨달음의 길」에서
토머스 키팅 지음 / 성찬성 옮김 / 바오로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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