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성찰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

뚜르(Tours) 2008. 5. 12. 00:03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법규정이나 전통을 깬 사람을 교정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건강하지 않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수치심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잘못한 학생에게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 앞에서 잘못을

폭로합니다. 군대에서 다른 사병들에게 시범케이스로 규칙을 어긴

사람에게 재제가 가해집니다.

수치심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났기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때때로 그 충격이 클 경우에 삶의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에 정통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전통을 어긴 제자들의 잘못을 폭로합니다.

그들의 속뜻은 잘못된 행위보다는 그 행위를 잘못한 제자들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을 내포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율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처럼,

고발하는 내용은 율법을 어긴 행위가 아니라 율법을 범한 사람을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법과 내용 그리고 행위와 존재를 뒤바꾸어 놓은

사람들을 질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마르 7,8).

형식적이고 타성적이며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율법은 사랑의 법과

진실을 깨게 됩니다.

이러한 법에 의해서 고발을 당한 사람은 수치심이 내면화 되어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책감과 수치심을 혼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죄책감은 개인적인 기준이나 가치를 위배하거나 깨는 어떤 것을

함으로서 또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법과 계약을 깸으로서

오는 불쾌하거나 고통스런 느낌입니다.

따라서 죄책감은 우리의 행위와 우리가 한 것에 대한,

또는 우리가 하리라고 예상했던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나쁜 느낌에 관계가 있습니다.                  


대부분 느끼는 것처럼, 죄책감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유용한 감정이 될 수 있습니다.

죄책감은 우리의 양심이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반을 한 후에 후회나 죄책감을 결코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어려움을 겪고, 전통적으로 반사회적인 성격장애를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유용하고 건설적인 죄책감을 우리는 “건강한” 최책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분쟁이나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의 잘못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또는 우리의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일련의 죄책감을

사용합니다.

죄책감이 우리의 정신, 정서, 그리고 영적성장을 포함해서

우리의 안정, 마음의 평화, 그리고 우리의 기능에 해로운 것이 될 때,

우리는 이것을 “건강하지 않은” 죄책감이라고 부릅니다.


분쟁이 있는 또는 기능장애 가정이나 역기능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주 건강한 그리고 건강하지 않은 죄책감을 혼합합니다.

건강하지 않은 죄책감은 항상 작용되지 않거나 움직여지지 않고

때때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손상되는 것을 즐깁니다.


우리가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죄책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다음 그 감정이 이끄는 데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책감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신뢰할만하고 적당한 다른 사람들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단순한 해결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상처를 주거나 속일 수 있는 사람에게 사과하고

그들에게 용서를 청할 수 있습니다.

더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깊은 곳에 있는 죄책감에 관해서

그룹 또는 개인적인 치료를 통해서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죄책감은 자주 수치심보다 인식하고 해결하는 것이 쉽습니다.

러나 수치심은 우리가 우리의 일부분이 결함이 있고, 나쁘고,

불완전하고,

열등하고, 진실하지 않고, 부적당하거나 실패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경험하는 불쾌하거나 고통스런 느낌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잘못함으로 해서 나쁜 느낌을 갖는 죄책감과 반대로,

수치심은 우리가 어떤 것이 잘못되거나 나쁘게 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죄책감은 교정될 수 있고

용서를 할 수 있는 반면에, 수치심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의 아이나 참된 자아는 건강한 방식으로,

수치심을 느끼고 안전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종속 또는 거짓 자아는 수치심을 갖지 않은 척하고,

그것에 관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수치심을 갖고 있습니다.

수치심은 인간 존재에게 보편적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뚫고 나아가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수치심은 우리가 희생양이 될 때까지 점점 더 축적되고 우리에게

짐을 안겨줍니다.


결점이 있거나 부적당하다는 느낌 외에,

수치심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어떤 면에서,

때때로 우리의 전존재 안에 결점들이 드러났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수치심은 희망이 없다는 느낌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무엇을 했건 간에,

우리는 그것을 교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그러한 느낌을 혼자만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수치심으로 인해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수치심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나쁘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우리 자신에 대해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것을 가두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주 그것에 벽을 쌓거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마치 어떤 다른 느낌이나 행동이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수치심을

위장하기까지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투사합니다.

이렇게 위장전술을 펴게 될 때, 종속관계나 거짓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수치심이라는 느낌에 대항해서 방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치심에 대항해서 자신을 잘 방어할지라도,

이것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습니다.

비록 머리를 치장하고, 몸을 숙이고, 눈을 마주치거나 사과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혐오감, 냉랭함, 움츠러듦 그리고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수치심에 대항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했건

상관없이, 우리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치심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른다면,

안전하고 지지해주는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치를 조장하는 환경에 대해 올바로 인식할 때,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일과 상황에 집중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무시한다는 말입니다.

느낌들 알고 확인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지나치게 염두 해 둔다면,

그의 원의에 초점을 맞추게 되다는 말입니다.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맡겨진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만족할 정도로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이러한 성향에 젖어 있었던 사람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느꼈던 것들을 알아차리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 상처 또는 화와 같은 감정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적당함과 수치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느낌들을 거부하거나 외면한다면, 거짓 자아가 위장 전술을

펴게 되고 거부하거나 외면한 감정들로 인해 계속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의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의식은 어떤 것을 잘못 했어 라고 말하지만

수치심은 나에게 어떤 것이 잘못 되었어 라고 말합니다.

죄의식은 실수를 했어 라고 하나 수치심은 나는 실수하는 사람이야 라고

말합니다.

죄의식은 내가 한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나 수치심은 나는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죄의식은 나의 자아와 행동을 분리합니다.

만약 내가 어떤 것을 잘못하고 건강한 죄의식을 갖는다면,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강한 죄의식은 “우리의 믿음과 가치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따라오는” 감정입니다. 이때 죄의식은 우리의 양심을 친근하게

두드립니다.


반대로, 해로운 수치심은 나의 전 존재를 잘못된 행동과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나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겸손과 아주 유사합니다.

겸손은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무엇보다도 아무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수치심은 실제로나 상상으로 자신의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정체성을 불안전하게 만듭니다.

“정체성의 차원에서 수치심을 갖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흠이 있고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심을 갖게 되면 용서나 탈출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유해한 수치심은 학대하는 부모로부터 내려온 유산으로서

참된 자아를 무시하거나 억압합니다.

부모로부터 조금만 잘못을 해도 지나치게 간섭을 받아 온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수치스러운 감정을 키우게 됩니다.


과잉 간섭은 잘못한 것에 대해 즉각적으로 내려지는 끔찍한 벌로 등장을

하기도 합니다.

부모에 의해서 끔찍한 벌을 받게 될 때, 신체적인 아픔뿐만이 아니라,

꾸짖는 부모의 모습입니다.

잔인한 한 사람에게 “자비”만을 바라보고 종속된 관계나 거짓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영향을 받습니다.

어린 시절에 잘못을 했을 때마다 지나치게 벌을 받아온 직장인의 경우

지나치게 경직되거나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안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신체적으로는 매일 소화불량에 걸렸고,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을 의심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순종적으로 대하거나

사과하는 성향을 띤 사람도 있었습니다.

부모와 같이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판에 도전하거나 협상

하는 등의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어떤 것을 개선하려고 청하지도 않았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힘없는 어린이에게 벌을 주는 부모의 통제되지 않는 분노를

참아야 했던 사람에게 배어있는 일반적인 사고의 패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대로 인해 생긴 수치심이고 이 수치심은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파괴적인 패턴에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회복에 대한 경험과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수치심으로 인한 제한하고 억제하는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의 고통스런 이야기를

안전하고 지지해 주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표현하고 나누는 것은 우리의 모든 약함들과 모든 힘을 지니고 있는

우리 내면의 아이 곧, 진실한 아이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수치심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줄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곤경과 고통을 확인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수치심에  대해 들을 때,

우리는 그들의 수치심을 치유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마찬가지로 우리도 도움을 받습니다.

이러한 나눔과 들음에 의해서 우리는 조건 없는 사랑의 원리를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아이를 치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감성적 학대에 의한 심리적 상처 모두를

치유함으로서

우리 내면의 아이가 치유될 때,

우리는 자녀들에게 학대하는 행동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으며

학대의 위험한 순환 구조를 깰 수 있습니다.

상처의 자국은 남을 것이지만 이러한 상처의 자국들은

전쟁에서 새겨진 영광의 상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상처 곧,

매일의 삶의 가치를 손상시키고 특별히 가족이나 친구들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를 손상시키는 투사함으로서 입은

상처를 치유할 것입니다.


상처에 조치가 취해진다면 치유될 수 있고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심리적인 상처들을 치유 하고자 하는 노력을 방해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 곧, 부정하려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체면을 지키려는” 데서,

우리의 부모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데서

또는 치유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힘든 작업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데서 연유됩니다.

그 이유야 어쩌건 간에, 결과는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삶 안에서 그리고 다음 세대로 넘어 가면서

상처가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수치스러운 것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너무 자만하거나 게으르거나 기타 등등으로 자신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움을 청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문제로 도움을 구하는 데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상담의 형태이건 교육 프로그램이건 또는 도움을 주는

모임이건 간에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양

가르친다.’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마르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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