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스크랩] 6.토마스 머튼의 선에 대한 이해

뚜르(Tours) 2008. 10. 18. 10:54

6.토마스 머튼의 선에 대한 이해

 

토마스 머튼은 그의 저서 {Zen and the Birds of appetite}(번역: 선과 맹금, 장은명 옮김, 성바오로출판)에서 그의 친구이자 영적 동역자인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禪)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그의 선에 대해 그의 논지를 펴 나가고 있다.

1). 선이란 무엇인가?

"이름을 듣는 것보다는 얼굴을 보는 것이 더 낫다"(선의 격언)
토마스 머튼은 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선을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한 "어떤 것도 그 구조의 기본적 요건을 고려하지 않고는 착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머튼은 선이 하나의 사회적, 종교적 복합체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볼 때, 또 선이 어떤 문화적 체계 내의 다른 요소들과 관련이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옳다고 본다. 구조주의적으로 선을 이해한다면 여타 어는 종교와도 선을 대비시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을 볼 때 선을 가톨릭의 구조와 대비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가톨릭의 구조, 즉 가톨릭의 성사, 전례, 영적 기도, 봉헌, 규칙, 신학, 성서, 가톨릭의 대성당들과 수도원, 성직과 위계 조직, 평의회와 회칙 등을 선의 구조적인 요소들과 대비시킬 수 있다. 그 속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

그것은 이 둘은 문화적, 종교적 특징을 공유한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이다. 하나는 아시아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사양의 유다-그리스도교이다. 하나는 인간에게 형이상학적 깨달음을 주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 구원을 주는 종교이다. 그러나 그 구조주의적 인류학의 체계 내에 짜 맞춰지는 것은 '종교'이지 '선'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머튼은 선을 하나의 종교적 체계나 구조물로 정의함은 선을 파괴함으로, 오히려 선을 완전히 오해함으로 말한다. 선은 체계적으로 '구성될' 수 없고, 따라서 파괴될 수도 없기 때문에, 파괴란 표현은 쓸 수 없는 것이다. 선이란 우리가 "저것이 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스즈키의 말을 빌리면 "대립의 세계, 지적인 구별에 따라 구성된 세계 너머에 있다…. 선은 절대적인 관점에 도달함을 목표로 하는, 구별이 없는 영적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양적, 플라톤적 방법으로 절대성과 비절대성을 '구별한다면' 이것도 함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스즈키는 이렇게 부언한다. "절대성은 구별이 존재하는 세계와 결코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성은 대립의 세계 안에 존재하며 그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D.T.스즈키, {불교의 본질}, 런던, 1946, p. 9)

선은 특정한 형태나 특정한 체계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의식(意識), 문화와 종교와 형태를 초월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선은 어떤 의미에서는 '공(空)'이다. 그러나 선은 종교적 체계이건 비종교적 체계이건 이런저런 체계를 통해 빛날 수 있다. 그렇다고 선을 선종(禪宗)으로 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선은 '종교체계', 신학적, 철학적 '주의'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을 잠시 돌려보면 그리스도교에서도 그들의 믿음의 '종교적' 국면 너머의 것을 보는 여러 종류의 특이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순수한 개신교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종교'라고 부르는 일에 이의를 제기했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회적, 문화적 구조물 속에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한 우리는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구조물들은 신앙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며 신앙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믿는다.

물론 문화적 구조물들이나 형식들은 존재하며 그것들 없이 살아가거나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선은 불교의 교리를 초월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교리도 초월한다. 예를 들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반야심경) 이 표현은 출애굽기의 불타는 가시덤불의 대목에서 나오는 "나는 곧 나다"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이 표현은 명제(命題)와 부정(否定)을 초월한다. "나는 곧 나다"라는 히브리말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자들이 각 시대의 정신에 따라 해석하여 추측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문화적, 구조적 종교(또는 비종교)의 한계를 뚫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영적인 탄생' 또는 지적인 각성에 따라 단순한 공(空)에 이르게 된다. 이 공(空) 안에서는 모든 것이 행위 함이 없는 행위이므로 모든 것이 자유이다.

다시 한번 선에 대한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은 직접적인 내적 체험이지 중개된 지식으로서의 특정 종교의 교리 체계가 아니다"

둘째,
"선은 모든 논리를 초월하거나 부정하는 비논리적, 초논리적 사고이다." 선이 인간의 이성 기능이나 논리학의 일정 한계 안에서의 유용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의 틀과 법칙이 우리의 본래 마음을 규정하고 재갈 채우고 분열시켜 버릴 때 선은 그 모든 논리를 미련 없이 버린다.

셋째,
" 선은 자기의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 진아(眞我), 절대무(絶對無)의 체득을 궁극 목적으로 한다." 선은 단순한 정신 수양이나 정신요법의 방편이 아니다. 선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린 가장 진지한 인간의 자기 찾기의 몸부림이다.

넷째,
"선을 수련하는 목적은 결국 '깨달음'에 이르려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 혹은 '깨우침'(enlightenment)은 지적(intellectual) 이해나 논리적 이해와 대조되는 직관적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깨달음'은 참된 자기와의 일치요 그것의 되찾음이요 회복이다. 기독교로 말하면 "하느님의 형상"이다.

다섯째,
" 선은 초월적 신비주의나 타계주의 및 현실적 삶의 도피가 아닌 삶의 현장 한복판에로의 귀환과 실천성을 강조한다."

2) 선과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의 차이점

그리스도교에서는 객관적 교리가 역사적으로 항상 우선되고 존중되어 왔다. 선에서는 역사적인 면이 아니라 중요성의 면에서 체험이 항상 우선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 선은 계시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리고 심지어는 성스러운 전통(적어도 경전에 의한 전통)에 대한 독자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생각조차도 버리고, 오직 존재의 자연스럽고 존재론적인 근거를 통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선물과 은총을 바탕으로 한 종교이고, 선은 쉽사리 '종교'로 분류할 수가 없다.(선은 사실 모든 종교적 구조에서 분리되어 불교가 아닌 종교나 무종교적 토양에서도 번성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체험이 가진 중요성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교적 체험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리스도교의 몸인 교회의 공동체적 삶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이 체험은 항상 특별한 양상을 지닌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이고, 심리적 차원을 초월하여 '교회와 함께 신학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체험을 기록할 때는 다른 그리스도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상징을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다.

반면 선은 쉽게 전달하려는 모든 유혹을 단호히 물리친다. 선의 가르침과 수행에서 볼 수 있는 역설과 폭력은, 제자의 '체험'으로부터 손쉬운 설명과 편안한 상징이라는 디딤돌을 치워 버리려는 의도에서 사용된다. 선에서 전달되는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낱말'이 아니다. 그 낱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선이 전달하는 것은 잠재적으로는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만 그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하나의 인식(認識)이다. 그러므로 선은 선교(宣敎)가 아니라 깨달음이며 계시가 아니라 의식이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성부로부터의 소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에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근거에 대한 인식이다. 바로 이것이 선의 목적으로 심오한 존재론적 인식을 일깨우는 것, 즉 일깨워진 사람의 존재의 근저에 있는 직관적 지혜(반야)를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서 언어라고 하는 도구는 우리의 논리적 선입견과 언어 양식에 들어맞는 방식으로만 사물을 보게 한다. 선은 이러한 선입견을 쓸어버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거짓된 '사실'을 파괴하여 우리로 하여금 '똑바로 볼 수 있게'해준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선은 "생각하지 말라. 보라!"고 말한다.

3) 불교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유사점

선이 보여주는 '사실'은 하나같이 넘어갈 수 없는 쓰러진 나무처럼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십자가를 예로 들을 수 있다. 부처의 '불난 집에 대한 설법'이,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불교 신자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킴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그의 삶의 의미와 타인과 그의 관계, 주위의 세상과 그의 관계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준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둘 다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의 생존을 소재로 삼는다는 점이 유사하다.

이 두 종교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고통을 설명하려는 사람이나 설명 자체가 도피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고통은 불가해함을 보여 준다. 고통은 우리가 그것이 바깥에 서서 통제할 수 있는 어떤 '문제'가 아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각각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통은 다름 아닌 우리의 자아와 경험적 생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에서 말하는 '큰 죽음'에 의해, 또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변화되기위해 모순과 혼란의 한가운데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머튼은 계속해서 스즈키의 말들을 인용하여 반야, 혹은 반야지에 대한 설명과 그리스도교의 지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반야(선의 형이상학적 직관지)는 순수 행위, 순수 체험이다…. 그것은 명확한 순수이성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직관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반야 직관의 경우에는 직관될 뚜렷한 대상이 없는 까닭이다…. 반야 직관에서 직관의 대상은 세밀한 추론 과정을 거쳐 가정된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이것'이나 '저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대상에 국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D.T. Suzyki, Studies in Zen, London, 1957, p. 87-89) 이런 이유로 스즈키는 반야 직관이 '우리가 종교적, 철학적 논문들에서 흔히 마주치는 그런 종류의 직관'과 다르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선은 다만 볼뿐이다. 무엇을 보는가? 하나의 절대적 객체가 아니라 절대적 봄을 본다.

이러한 설명이 그리스도교와 아주 먼 설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성서에 나타난 '직접적 체험'의 중요성을 명심해야 한다. '직접적 체험'은 '반야'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의 말씀'은 이론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죽어가는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강력하고 실존적인 체험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quot;(갈 2:19-20; 롬 8:5-17 참조) 참된 그리스도교에서는 십자가와 자기 비움의 이런 체험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듯 불교에서 '반야'는 '부처의 마음을 가짐'이라고 설명될 수 있으므로 불교적 체험과 그리스도교적 체험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본다.

4) 초월적 체험과 열반

4.1) 초월적 체험
'초월적 체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용어는 불만스럽긴 하지만 범위를 좁히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초월적 체험은 '지고한 체험'보다는 더 명확한 것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신비적인 자기 초월의 체험이며 동시에 객체라기보다는 주체로서의 '초월자' 또는 '절대자' 또는 '신'에 대한 체험이기도 하다. 이것은 절대적 존재 즉 '그분 자신'의 안에서, 또 '나 자신'의 안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이때 '나 자신'은 없어져서 '그분 안에서' 발견된다. 또한 이것은 초월적인 자아와 관련되어 있다. 초월적인 자아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설명하면 형이상학적으로는 하느님의 자아와 구별되지만 사랑과 자유에 따라 하느님의 자아와 완전히 동일시되므로 하나의 자아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월적 체험은 다음의 것들이 아니다.
초월적 체험은 자아 도취적 고요함 속에서 자연, 우주 또는 '순수 존재'안에 퇴행적으로 침잠함, 따뜻하고 퇴행적이고 어둡고 광막한 탈혼 상태 속에서 행복하게 정체성을 상실함은 아니다.

그것은 성애적(性愛的)인 절정의 체험이 공생적(共生的)이라기 보다는 확실히 인격적인 경우에도 그 체험과 정확히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것은 또한 윤리적 초월성, 자기를 내주는 행위에서 보이는 그 영웅적 관대함에 대한 체험 이상의 것이다. 물론 초월적 체험은 우리 자신을 넘어서 한 단계 고양된 윤리적 영웅주의와 결합하거나 그것 또한 넘어서 신비로운 자기 희생과 자기 증여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는 있다.

그것은 평범한 수준의 종교적 또는 영적 체험(이것도 확실한 체험이다)을 초월한다. 이런 영적 체험에서는 지성과 '마음'(수피즘, 정적주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통적이며 전문적인 용어)이 계시, 또는 존재, 또는 삶의 의미에 대한 통찰에 의해 밝아진다.

이 모든 체험들은 자아 인식적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을 여전히 다소 의식하는 수준에서, 그 주관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고 정화되는 수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초월적 체험에서는 주체 안에 근본적이며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 체험을 묘사하고 논의할 때 그것의 유일한 주체는 개별적 인간인 자아라고 당연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 경험적 자아는 그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나는 존재한다"고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데 이 자아가 바로 초월적 체험의 주체인 동시에 수혜자라고 우리는 추측한다.

참으로 초월적 체험은 전의식(前意識)이나 무의식으로의 퇴행이라기 보다는 초의식의 문제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의 전통적 용어인 '황홀경'은 심미적이거나 성애적인 체험의 고유의 영역인 '넋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자기 자신의 위로'들어 올려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 체험의 초점은 개별적 자아 안에서가 아니라 이 자아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또는 성령 안에서 발견한다. 바로 이 자아가 공(空)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적 전통에서 자아는 결코 단순히 순전한 경험적 자아가 아니고 신경증적이고 자아 도취적인 자아는 더욱더 아니며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그리스도와 동일해진 '인격'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모든 초월적 체험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참여함이다.

그러므로 초월적 체험은 모든 고등 종교들의 전통에서 초월적 깨달음의 길이 금욕적인 자기 비움과 '자기 무화(무(無化)'의 길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길은 자아 확인, 자아 실현 또는 '완전한 성취'의 길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특별하고 독특한 체험을 할 잠재능력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하거나 깨달음, 성취, 실현 등을 이룰 수 있는 주체라고 생각하는 개념에서 탈피하는 것이"중요하다.


4.2) 열반
불교에서는 형이상학적 통찰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이 신학을 대신하고 있으며 불교를 '종교'라기보다는 종교철학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여러 학파들에서는 많은 철학적 사변(思辨)이 있었지만 불교의 근본적 통찰은 사변을 초월하며 그것을 부인한다. 석가모니 자신은 사변적 질문에 대한 질문을 거부했으며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교의(敎義)는 교의가 아니라 세상에서의 존재 방식이다. 그의 종교는 일련의 신념과 확신, 또는 의식(儀式)과 성사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개방이었다. 그의 철학은 세계관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침묵이었다.

그렇지만 불교의 기본적인 통찰은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이다. 그 통찰은 존재와 지식의 근원을 꿰뚫으려는 노력이다. 그 꿰뚫음은 추상적인 원리와 공리의 추론이 아닌 윤리적, 종교적 의식(意識)을 정화하고 확장하여 주체와 객체가 하나인 초의식적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곧 열반이다.
여기서 불교적 깨달음의 성질을 논의하고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그와 유사한 것이 발견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신비주의와 신비적 체험의 수준에서 비교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신학적 문제점을 제기하고 불교의 입장에서는 자료제공의 신학적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둘째: 윤리적 수준에서 비교하는 방법이다. 불교의 대비(大悲)와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비교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신학적 미덕이므로 여기서도 문제가 첫째와 같이 발생한다.

셋째: 형이상학적 수준이 있다. 여기서는 만남이 가능하다. 그 가능성을 머튼은 샐리 도넬리의 논문과 가브리엘 마르셀의 논문에서 찾았음을 말하고 있다. 샐리 도넬리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전통이 상응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찰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상응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 이해와 삶의 실질적 행동의 면에서도 이 두 종교 사이에 상응점이 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도 있다. 샐리 도넬리의 연구 가치는 세계 내의 존재를 강조한 점이다.

세계내의 존재란 개념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에 공통되는 것이다. '다르마'(우주의 이법을 뜻하는 로고스와 유사하며 번역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단어)와 타타타(진여)라는 불교적 개념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하며 열반은 부재와 부정보다는 '순수한 존재'를 의미한다. 또한 삶의 의미는 존재에 대한 개방성 안에서, 그리고 의식의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존재함' 안에서 발견된다고 샐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열반에 대한 서구인의 왜곡된 생각을 머튼은 불교에 대한 부정적 국면만을 강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왜곡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십자가의 성 요한 안에서도 나타나는데 요한을 삶을 부정하고 세계를 혐오하는 금욕주의자로 말함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왜곡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이다. 이것은 자아를 절대적, 중심적 실체로 간주하려는 성향이며, 욕망이나 혐오를 대상으로서 자아와 관련시키려는 경향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실재에 대한 관점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의 탓으로 돌린다. 원죄란 쾌락이나 권력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욕망에 사물들이 언제라도 기여하게 만들기 위해 사물들의 본성을 왜곡하려고 노력하는 단호한 고집을 의미한다.

이렇듯 열반을 우리의 왜곡된 욕망 속에서 체험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음을 또한 비판하고 있다. 열반은 불교 신자들이 말하듯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지 다른 어떤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된 삶 자체는 고(苦)의 상태에 있으며 욕망의 모든 움직임은 지속적 기쁨보다는 고통이라는, 사랑보다는 증오라는, 창조보다는 파괴라는 궁극적 열매를 맺는 경향이 있다고 불교는 말한다. 이 불교적 형이상학의 순수성이 정당하게 평가될 때, 즉 절대적 실재가 또한 절대적 위격(그러나 결코 객체가 아닌)으로 인식될 때는 하느님의 개념에 대하여 불교 신자들과 진지한 논의를 할 근거들이 확립될 것이다.

출처 : 가톨릭 영성의 향기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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