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ㅣ (1) 어둠으로부터의 구원

뚜르(Tours) 2008. 10. 18. 11:40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1-1. 어둠으로부터의 구원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죄를 거부하고 자신을 아무런 타협없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봉헌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며,

하느님의 신비 안에 들어가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빛 안에 잠기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1고린 6,19 참조).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

그분의 성령이 세례 때에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신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궁전이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우리의 욕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로부터 당연히 받으셔야 할 것을 받으실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자신의 천성적인 약점과 무질서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께 속한 것들은 그분의 성스러운 사랑의 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이기심으로 썩고, 비이성적인 욕망으로 눈이 멀고, 자만으로 굳어져서

결국 죄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허무의 심연(the abyss of moral nonentity)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죄는 영적 생활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할 때 나오는 내면의 질서와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는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이나

그분이 금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만이 아니다.

 

죄는 우리가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에 숨겨져 있는

우리 자신의 신비롭고 가변적인 영적 실재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죄란 창조 때 이미 계획된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 ─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형상 ─ 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죄는 마치 자유를 행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자유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거룩함과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부르심을 받는다.

그 중 몇몇 사람들은 특수한 소명을 받고 수도 서원을 통해 더욱 엄숙한 계약을 맺어,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명인 거룩함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기도 한다.

그들은 더 확실하고 더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복음적 권고인 ‘완전하게 되기’를 서약한다.

그들은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세속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리스도께 더욱 완전히 자신을 바치고자 한다.

그들에게 성화(聖化)는 궁극적 목표로서 추구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업(本業)’이 된다

─ 수도 서원을 한 이들에게는 인생에서 성인이 되는 것 이외에 해야 할 일이 없고,

이 목표에 따라가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며 시급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도자나 성직자에게는

직분상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수도자나 성직자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고,

평신도는 어떤 면에서든 그들보다 뒤떨어지는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젊은 시절 사막으로 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훗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룩함으로 부르심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에 지시되어 있는 바 오직 하나의 덕행,

하나의 거룩함만이 있을 뿐이다.

신약성서에 나와 있듯이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는 만큼

평신도의 신분은 분명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런 만큼 평신도들은 단순히 ‘죄를 피하기만 하는 것’,

최소한의 어떤 정적인 거룩함만을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가끔 이러한 직분의 차이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심하게 왜곡되고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신부와 수사와 수녀들은 완전함을 향해 성숙해야 하고

진전을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평신도들은 은총의 상태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성직자들의 옷자락에 매달리거나 홀로 ‘완전함’에 불린 전문가들에게 이끌려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수도자들의 삶이 더 엄격하고 힘들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평신도들에게 그들의 생활이 덜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자칫 그들의 구원은 참다운 구원이 아니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수 있다.

오히려 반대로,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하느님은 수도원의 엄격함을 매일의 의무로 요구하실 만큼

우리(평신도와 재속 회원)을 엄하게 다루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분이 주신 권고에 따라)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셨다.

어떤 사람은 동정을 지켜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음식을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소유물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만 도둑질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것을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을 뿐이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주석 중).


 달리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일상적인 절제와 정의와 자선은

수도자들의 정결 서원이나 청빈 서원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이다.

 

수도자들의 봉헌 생활이 좀더 엄격하고 내적인 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철저하고 전적으로 헌신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평신도들의 삶을 하찮게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혼인 역시 그 특성상 아주 신성한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혼인에 따르는 희생이 수도자들의 희생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그 신분이 무엇이든 실제 삶에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질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수도자들만이 완전함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평신도들은 지옥만 면하면 된다는 오류에 맞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평신도든 수도자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완덕을 향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나무는 단지 살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되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집트를 떠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우리는 약속된 나라에 가야 한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설교 중).

동시에, 예를 들어 정결을 지키는 것을 비롯하여

복음의 이런저런 권고를 아무리 완전하게 지킨다 해도,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덕인 정의와 자선을 베풀지 않는다면

앞으로 말한 권고를 실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단식을 하거나 바닥에서 잠을 자는 고행,

재를 지키거나 쉬지 않고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만약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베풀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며,”(‘디도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설교 중)

“당신이 정결을 지킨다 할지라도 자선을 베

풀지 않으면 주님의 신부(新婦)가 되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 관한 설교 중)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은 교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의 기도와 거룩함은 교회 전체에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수도자, 성직자들의 표양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들 역시 ‘이 세상의 이방인이자 순례자’임을 가르치고,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도시의 허망한 동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들의 표양은 모든 일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만을

추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지복은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우주적 재앙”이 될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새로운 신원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면

누구나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우리의 행동은 그분과의 일치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현존을 우리 안에서, 또한 우리를 통해 드러내 보이셔야 한다.

 

생각하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강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사람 안에 있는 “빛”은 하느님의 자녀 됨이며,

우리 안에 살아 계신 말씀이라고 믿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외적인 경신례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을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으로 보존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클레멘스는 덧붙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함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행하시는 영적 교육의 장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대상은 평신도이지 수도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빛이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암흑에 싸여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룩함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성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쳐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인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가?

 

주제넘은 생각은 아닌가?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인가?

사실 많은 평신도들은 물론 성직자들조차도

현실적으로 자신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적인 사고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겸손일까, 아니면 직무 유기인가?

패배 의식인가, 절망감인가?


 하느님이 우리의 성화를 바라신다면,

그리고 거룩함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사실상 그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빛과 힘과 용기를 틀림없이 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반드시 주신다.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받고 있는 은총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