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ㅣ (2) 불완전한 이상

뚜르(Tours) 2008. 10. 18. 11:38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1-2. 불완전한 이상


그렇지만 이 미묘한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는 이유가 항상 악의, 게으름, 우둔한 죄 때문이라고

추측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혼란, 무지, 약함, 몰이해 때문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이 지니는 의미와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페 3,8)를 어떻게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한 구원과 무한한 자비의 신비는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도 모호하고 믿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이 지닌 깊은 의미에 응답할 용기도 힘도 없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우리의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그것이 가져올 참된 결과를 왜곡한 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회적 관계에 필요한 신분 상승의 도구 정도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을,

신앙의 어두운 밤 가운데에서도 은총에 대해 꾸준히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실제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남부끄럽지 않게

조하는 것이 거룩함이라고 간주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외적인 징표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식주의를 무조건 바리사이주의로 몰아세운다면

그것 역시 지나치게 진부한 사고방식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고상함에도 도덕적인 선의가 내포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선한 의도를 놓치시는 법이 없으시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희생 ─ 동료들과는 전혀 다른

외롭고 고통스러운 책임을 져야 하는 희생 ─ 을 통해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면,

깊이의 부재와 편파성 때문에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거룩함의 길은 어떤 경우에도 힘들고 엄격하다.

우리는 단식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고통과 희생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기는 가운데, 이따금 ‘우리의 의향을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 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막연한 정신 자세는 자신이 진부하다는 것을 초라하게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세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다.

독실한 척하는 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상징적이어서는 안 되고, 완전한 현실로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머릿속 활동이 아닌,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내어 주는 선물이자 투신이어야 한다.


 확실히 이 점은 우리 가운데 “종교가 되살아나고 있다.”라고 믿도록 유도하는

영성이 결여된 대중 종교가들의 설교보다는 조금은 더 진보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는 말자.

사람들이 겁을 먹고 불안해하며, 장밋빛 슬로건에 혹하여 자신들의 고통받는 영혼을 달래 주는

인간적인 위로를 받고자 더욱 자주 교회로 달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종교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어쩌면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는 증세일 수도 있다.

병의 증세를 깨닫는 것은 좋지만, 병을 근본적으로 고치지는 않고 엉터리 약으로

대충 증상만 치료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에 대해 단순하고 유아적으로 판단하여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뿌리가 깊지 않고 인간과 사회의 요청에 대해 응답하지 못하는

피상적인 신앙은 결국 종교적 절대 의무를 피하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 시대는 중대한 잘못(혹은 적어도 쉽게 죄로 인식되는 잘못들)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건설적이거나 선한 일도 거의 하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교회는 뻔질나게 드나드는 종교인들을 원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존경받을 만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긍정적인 도덕적 가치나 깊이 없이 단순히 외적인 존경을 받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20세기 독재 체제의 경험으로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극도로 불의한 사회에서도

잘살고 일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든 악에 눈을 감아 버리거나 심지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 체제에 동참하였다.

신심이라는 울타리를 친 자신들의 공간에만 관심을 두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모든 일로부터는 물러나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종교를 이유로 내건 이 같은 초라한 변명은 무지몽매함과 도덕적 불감증을 가중시키고,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와 사회 전반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런 경향이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노동자 계급의 상실을 야기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함’보다는 ‘거룩함’에 관해 이야기해야 된다.

‘거룩한’ 사람은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행동에 의해 성화된 사람이다.

그는 자신 안에서 또한 자신을 통해 그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거룩한 교회’의 삶, 믿음, 자애에 깊이 잠기는 삶을 살기 때문에 거룩하다.

 

그렇기에 ‘거룩함’보다 ‘완전함’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미묘하지만 이기적인 성향에 기울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처지는 고려해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켜 비교하고 즐거워하면서

모든 덕을 완전히 갖춘 우월한 존재로서 자신을 관상하고자 하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와 연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반면 ‘영적 완전함’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바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비법에 관한 지식과 훈련을 통하여,

격정이 더 이상 그의 순순한 영혼을 방해할 수 없는 평정의 상태에 들어선

철학자에게나 어울리는 개념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교에서 의미하는 거룩함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