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나의 기쁨
나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기쁨에 관한 구절들을 읽을 때는
늘 바흐가 1723년에 과부의 장례식을 위해서 작곡한 무반주
다성성악곡 '예수님, 나의 기쁨' 을 떠올린다. 바흐는 이 곡
을 만들면서 1653년에 요한 프랑크(Johann Frank)가 작곡
한 성가를 활용했다. 그 성가는 다음과 같다.
" 예수님, 나의 기쁨, 내 마음의 목장.
예수님, 나의 장신구.
아 얼마나 더, 아 얼마나 더
나의 마음은 근심에 놓여 있어야 하고,
당신을 그리워해야 하나!
하느님의 어린양, 나의 신랑.
이 지상에서 당신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어야 하리라."
바흐는 이 곡을 무덤을 흙으로 덮기 전에 부르도록 했다.
죽음은 예수님이 당신의 말씀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선사
한 영원한 삶으로 새로 태어나는 최종적인 과정이다.
바흐의 이 무반주 다성성악곡이 그 당시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로 청중들을 강하게 사로 잡는 힘을 가진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서 영위하는 일상의
생활에서 오는 작은 기쁨들과는 다른 기쁨에 대한 그리
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기쁨이 존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근본적인 바탕인 기쁨, 죽음을 통과해
서도 존재하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우리 기쁨의 참된 근원에 대해서는 교회의 성가대들도
많이 노래했는데, 특히 지난 30년 전쟁시기에 유래한
성가에 이런 노래가 많다.
기쁨이 사람을 치유하는 데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
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1646년에 크리스티안 카이만(Christian Keimann)이
작곡한 성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너희 그리스도인들아, 모두 기뻐하여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기뻐하여라!
하느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행하셨다.
큰 소리로 기뻐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매우 존중하시고,
당신을 우리의 친구로 만드셨다.
기쁨, 기쁨에 더한 기쁨!
그리스도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신다.
환희 , 환희에 더한 환희!
그리스도는 은총의 태양."
내게는 마음의 기도(Herzens Gebet)가 예수님을 나의
기쁨으로 예감하는 길이고, 이따금 기쁨을 체험하기도
하는 길이다. 나는 그리스도 이콘(Christusikone) 앞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는
예수 기도를 바치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계시며 기쁨이 어떻게 그와 함께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내 안에 예순님과
함께 기쁨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기쁨은 아무도 나에게서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매일 아침, 묵상할 때마다
나는 기쁨의 한 원천과 접한다. 이 기쁨은 일상생활의
갈등으로 부서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이콘 앞에서 느끼는 고요한 기쁨
왜냐하면 이 기쁨은 매우 깊은 곳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쁨은 황홀하게 다가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매우 고요한 기쁨이다. 이러한 기쁨 속에서는 내가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 말할 수도 없다. 단순히 기쁨에 대한 체험일
뿐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고 계신 공간은 동시에 기쁨
의 공간이기도 하다.
기쁨은 이 공간을 채우는 질적인 것(Qualita"t)이다.
그것은 경쾌함과 넓음, 유쾌함과 평화, 성스러움과 일치 같은
질적인 것이다.
묵상을 한 후 미사를 드리러 가면, 필자는 이 기쁨의 공간을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이 기쁨을 일상의
대화들과 만남들 안으로 이끌어들이는 것이 나의 과제임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내 안에 있는 이 기쁨을 잘 보호
해야 한다는 사실도 느낀다. 왜냐하면 이 기쁨은 이러저러한
작은 불편에 대한 짜증으로 쉽게 덮여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삶 안에 개입해 들어오는 여러 종류의 실망이 풍기는
쓴맛 안으로 매우 쉽게 스며들어가 버린다.
기쁨은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일상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중에,
그리고 상담을 하는 중에 쉽게 전달받는 부정적인 정서들
아래로 기쁨이 눌려 들어가서 질식되지 않도록 내 기쁨을
보호해야 한다. 나는 상담을 하는 중에 전달받아 내 안에 자리
잡게 된 짜증과 억압이 내 안에 들어 있는 기쁨과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는 것을 종종 느낀다. 내가 나를 다른 사람들로
부터 오는 부정적인 느낌들에 사로 잡히도록 허락할 것인가?
아니면 내 안에 있는 기쁨을 지켜 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
에게도 성공적으로 전달할 것인가?
「다시찾은 기쁨」에서
안셀름 그륀 지음 / 전헌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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