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스크랩] 대사제

뚜르(Tours) 2010. 4. 6. 15:00
대사제

성경은 소설과는 달리 ‘듣는 것’이다.
성경을 들으면서 우리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스도교신자는 입으로 하느님을 믿는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고백의 원음에 귀를 기울이는 존재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귀 기울임이 없을 때 그 고백은 우리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7,25-8,6)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7,26)
우리는 그리스도가 대사제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제직을 수행한다고 교리를 통해 알고 있다.
“예수님이 대사제다. 우리가 사제다.”라고 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사제는 그냥 여러 단어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과 평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냥 추구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대사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대사제를 필요로 한다. 정말 우리는 그 필요성을 느끼는가?

대사제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대사제를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7,26)으로
설명하면서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7,27)하고 말한다.
사제는 본래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면서 죄의 용서를 빌고 자기와 자기의 백성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
그가 대속 제물로 바치는 대상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처럼 다른 생명체이다.
그런데 죄가 없기에 대속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는 대사제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잡아
하느님께 바치며 자비를 구한다.
다른 사제처럼 다른 생명체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
나는 사제이다. 매일 미사를 드린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잡아 바친다.
언제까지 나는 그리스도를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며 우리를 평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인가?
언제 나는 그리스도처럼 내 이웃을 위하여, 이 세상을 위하여 나 자신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을까?
미사를 드릴 때마다 하느님께 미안하고 그리스도께 미안하다.

우리가 대사제를 필요로 한다면 이는 우리 사회가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대사제를 요구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대사제의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다. 평화를 달라는 기도하는 사람을 넘어 자신의 몸을 희생의 몸으로 내놓는
사람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많은데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내놓는 사람이 없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폭력을 당하는 저 철거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대사제적 용기이다.
그때 이 사회에는 평화가 찾아 올 것이다. 돈과 힘이 주지 못하는 안정과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사제가 절실히 필요하다. 희생이 절대 요구된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는 이유도 나만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대사제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도 궁극에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여러분이 오늘 봉헌한 미사예물의 지향에 이것이 잘 드러난다.
여러분의 미사 지향은 한결같이 남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배우자와 이웃과 죽은 자를 위하여 미사를 봉헌한다.
이런 지향을 바치면서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배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 미사를 필요로 한다.

오늘 복음(마르 3,7-12)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드는 이야기를 들었다.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3,7-8)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그분께 모여 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3,9.10)
사람들이 모여 든다는 것은 - 요즘 말로 말하자면 - 인기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위하여 배를 준비하게 하신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과 거리를 두고자 하시는가? 대자제의 희생과 연관시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병을 고쳐주기를 청한다.
개중에는 더러운 영이 걸린 사람도 있다.
더러운 영들도 그분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를 줄 안다.
이들은 모두 자기의 병이 낫기만을 기원한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거리를 두셨다는 것을 자기만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에서
거리를 두셨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들과 거리를 두고자 한 그분의 마음을 느끼면서 그들은 자기만의 평화를 위하여 그분께 다가간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희생을 배울 것이다.
거리를 둔 곳에서 들려오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은 이제 병과 고통마저
 하느님께 바치는 일을 배우게 될 것이다.
(1월 22일 연중 2 주 목)
출처 : 평화의 길
글쓴이 : Ann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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