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우리는 루카복음에서 마니피캇(Magnificat), 곧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를 들을 수 있다. 마리아 노래가 과연 성모님이 지은 것인지 여부는 학자들마다 논란이 분분하지만, 마리아 노래는 구약의 사무엘 상권에 나타나는 사무엘 어머니 한나가 부르는 '한나의 노래'(1사무 2,1-10)와 닮아 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정말 하느님 때문에 떨리고 설렌 적이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간절히 원하고 찬미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나 싶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하느님 때문에 마음속에 늘 설렘을 갖고 살았다. 구원은 불행한 상황에서 역전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리아 노래는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노래'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에 '보잘것없는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곧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빔(anavim)을 뜻한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서 저자는 산상설교를 통해 각각 '마음이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썼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나빔'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나빔은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통을 지키고자 다른 나라 문화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재물에 대해 초연할 수 있었던 마음이나 자세에 있다. 재물도, 권력도, 재주도 없고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오로지 하느님밖에 없다는 믿음의 사람, 맘몬 곧 재물보다는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이 바로 아나빔이다. 어쨌든 마리아의 노래는 불행한 처지에서 역전되는 구원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 탄생(루카 2,1-7)을 보게 된다. 베들레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열두 부족에게 땅을 분배할 때 유다 부족이 갖게 된 땅이어서, 유다 출신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 했다. 루카복음 사가는 특이하게 등록 당시 아우구스투스 황제나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15년라는 표현을 등장시켜 세계사적 연대기 안에서 하느님 구원 계획과 구원사를 바라보려고 한다. 이어 천사가 목동들에게 예수님 탄생을 알리고 뵙는 목동들의 경배(루카 2,8-20)가 나온다. 목동들 경배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천사들의 찬미가 나온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방법은 뭘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반듯하게 살 때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또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다. 평화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할아버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 풍랑 이는 바다에 뜬 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모습을 본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 폭풍이 이는 바다에 떠 흔들리는 배 안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우리를 평화롭게 해준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는 믿음 안에서만 이를 수 있는 평화다. 루카복음 2장 21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할례와 작명을 보게 된다. 신약에 등장하는 요한 세례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또한 이름이 지어져 있었다. 이어 성모님은 요셉과 함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다(루카 2,22-24). 성모님은 모세나 주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성모님은 정결례나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라는 주님의 율법에 그대로 따랐다. 시메온의 예언(루카 2,25-35)은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 곧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대목이다. 이는 성모님 역시 신앙의 어두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예언이기도 하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고통과 고난의 길을 겪었다. 성모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누구보다 그리스도를 따른 분이었다. 또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낸 한나도 예언을 통해 아기 예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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