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스크랩] ** 사람들을 사랑한 하느님의 사람 토마스 머튼 **

뚜르(Tours) 2010. 12. 24. 20:39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기도

기도는 머튼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완전함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하느님의 개입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의 과정으로, 도구로서의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기도에 대해서 머튼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머튼에게 있어서 기도는 아담이 하느님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에로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완전하게 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존재는 기도로써 지고한 완성에 도달하며, 기도는 우리의 가장 완전한 행위중의 하나이다. 즉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체험을 기점으로 자연적인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단계로 질적인 전환을 하고 우리의 영적 생명도 자연적인 일치를 넘어서 초자연적인 일치로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 기도를 두단계로 나누는데 그것은 자연적 단계의 기도로 능동적 기도인 묵상(meditative prayer)의 단계와 초자연적 기도로 수동적 기도인 명상(contemplative prayer)기도의 단계이다.

 

 

1)묵상 기도(meditation prayer)

머튼이 말하는 묵상기도는 능동적 기도를 나타내는데 다른 말로는 정신기도(mental prayer),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 묵상(meditation) 등을 사용하고 있다.

묵상 기도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구가하며, 의지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을 단순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신학과 철학과 예술, 음악의 모든 자료를 다 활용하고 있다. 내적인 삶에 관한 모든 전통적인 방법과 실천들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하느님에 의해 위가 일깨워지고, 그분과 우리들의 참다운 관계의 실현이 충만해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여는 능동적인 노력이다"라고 한다. 이것에는 우리의 사고와 행위, 그리고 의지작용이 요청된다. 그렇다고 객관적이고 사변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정신을 일깨워 준비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올리도록 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좀더 알고자 하고, 그분 안에 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묵상의 참 목적은 이러하다. 사람이 어지러움과 괴로움밖에 찾아볼 수 없는 피조물과 현세의 관심을 자유로이 훌훌 털어 버리도록 가르치는 것, 그래서 자기가 몹시 필요한 줄 아는 하느님의 도움을 즐겨 받을 수 있도록 의식적이며 사랑스런 하느님과의 접촉에 들어가는 것,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와 사랑-지금은 이를 돌려 드리는 것이 그의 기쁨이 된 사랑-을 갚아 드리는 것이다.

이런 능동적인 기도로서의 묵상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자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생명과 신앙의 진실에 대해 직접적, 실존적인 파악과 개인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 내부에 하느님의 앎과 사랑이 들어오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이 우리의 중심에 계심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 하느님을 인식한다.


둘째 묵상 기도는 사랑에로 통하는 길을 닦아준다.
그것은 순명과 겸손을 가르쳐 준다. 묵상으로 하느님께 끌려간 영혼은 곧 복종의 가치를 알아 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날이면 날마다 자기의 이기심과 교만, 무능과 졸렬의 짐 때문에 당해야 하는 난관과 번민은 남의 인도와 조언과 지도를 받고자 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머튼에 따르면 묵상 기도의 목표는 "순수한 마음"(purity of heart)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무조건적이고 완전히 겸손한 항복, 하느님이 의도하신대로 우리 자신과 처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을 말한다. 바로 새로운 영적 정체성, 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실재에 부합하는 "자기"와 상호 관계가 있다.


셋째로 묵상 기도에는 우리의 노력이 능동적이며 의식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그것은 아직 기도하는 원천이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묵상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향한 우리들 전존재의 의도적 개방이며, 우리 영혼의 거록한 중심으로 뚫고 들어감이다.

 

2) 하느님의 직접개입(God's direct intervention)

 

머튼은 묵상 기도에서 명상 기도로 전환시키는 하느님의 직접 개입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첫째, 그것은 깨달음의 선물이라는 분명한 체험으로 비교적 드물게 나타나지만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갑자기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비우는 공(空, emptiness)으로써 우리를 접촉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단순하게하는 단순성(simplicity)으로써 우리를 움직이신다. 일체의 다수성(multiplicity)은 끝난다" 둘째, 그것은 메마름의 광야를 거치는 것으로서 명상 기도에 이르는 가장 일반적인 길이다. 이때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떤 내적인 고통과 근심만은 의식하고 있다. 발전함에 따라 이런 무미건조한 고요함 속에서 쉬는 법을 배운다. 이런 체험의 복판에 현존하는 어떤 위로하는 강한 힘이 생긴다. 그리하여 본능과 본능의 모든 기능에는 고통인 빛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 주신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빛은 우리의 이기심과 어두움과 불안전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셋째, 맛과 휴식과 향유가 가득한 고요함이 있다. 이 고요함은 우리 영혼 속에 보내진 그리스도의 사명과 관계 있으며, 그리스도가 우리와 더불어 계시다는 표지이다. 이런 평정은 대부분 성만찬에서 얻어진다고 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직접개입을 통하여 비로소 묵상 기도는 명상기도로 질적인 전환을 하게 되고, 우리의 영적 생명도 자연합일의 상태에서 초자연합일의 상태로 변형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 이전에 이미 인간의 영혼 안에 명상과 거룩성의 씨앗은 뿌려졌으나 그저 잠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씨앗은 싹이 트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 즉 자연합일의 상태에 에 있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직접 개입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새로운 세계, 모든 자연적인 지식과 모든 자연적인 사랑의 단계를 뛰어넘는 풍부한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신비합일은 즉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은 명상기도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3) 명상 기도(contemplation prayer)

 

이는 수동적 기도의 단계를 나타내는 말로 명상(contemplation), 수동적 명상(active contemplation), 주부적 명상(infused contemplation), 신비적 명상(mystical contemplation)등을 사용하고 있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은 하느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니, 그분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대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한다. 명상은 순수 사랑의 발전이요 완성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명상이란 무엇인가 39) 명상은 사람의 지적 영신적(靈神的) 삶의 최고의 표현으로 깨어 활동하며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생명 자체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존재가 보이지 않는 초월적 그리고 무한히 풍요로운 원천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는 것이다. 명상은 이성과 믿음이 본질적으로 염원하는 일종의 영적 통찰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은 "보지 않으면서" 보고 "알지 못하면서"알기 때문에 통찰력이 아니다.

명상은 보다 깊은 믿음이며 형상이나 말, 명확한 개념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지식이다. 명상은 말과 상징으로 암시될 수는 있지만 그 아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순간 명상은 안다고 했던 것을 취소하고 확인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명상중에 우리는 "알지 못함으로" 알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아는것이나 "알지 못하는 것"을 모두 넘어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 음악 그리고 예술은 명상의 체험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명상은 이 모든 것을 점유하고 초월하며 완성시키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이 모든 것을 대체하고 또 그것을 모두 부인한다. 달리 말해 명상은 초월적이며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아는 데에까지 뻗어 나가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명상은 일깨워 주는 뜻밖의 은총, 모든 실재 안에서 실체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주는 뜻밖의 은총인 것이다. 즉 한정된 우리 존재의 뿌리에 있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생생한 일깨움이다.

또한 명상은 부르심의 응답이기도 하다. 우리 존재의 심연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부터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이 대답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생명이며 하느님의 창조성이다. 우리 자신은 하느님의 반향(反響, echo)이 되고 하느님의 창조성이 되는 것이다.

명상의 생활은 두 단계의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데 첫째는 질문의 의식이고, 둘째는 대답의 의식이다. 이 둘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고 엄청나게 서로 다른 단계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에 대한 의식이다. 질문 그 자체가 대답인 것이다. 우리 자신은 그 둘 다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명상은 철학적인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본질에 대한 정적(靜的) 인식 또한 아니다. 명상은 하느님안에 있는 나의 생명을 통해서, 또는 신약 성서가 말하는 "자녀 됨"을 통해서 하느님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은 종교적이고 초월적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우리 안에 감추어진 신비의 창조 사업을 자비로이 완성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명상은 일깨움이며 계몽이고, 하느님께서 창조적이며 역동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사랑이 확신하게 해주는 놀라운 직관적 인식이다.

즉 "우리 존재의 심층에서 형언할 수 없는 영적인 접촉에 의해 지각된 우리 자신의 무(無, nothingness)와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실존적 인식"이고, 하느님의 지혜와 깨달음의 선물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각별한 배려로써 길러 주시고 완성시키고자 우리 영혼 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의 활동이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명상을 분석하려 하면 할수록 명상의 진정한 내용은 없어지게 된다. 이런 명상의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이성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명상은 외적 자아의 기능이 아니며 또 기능일 수도 없다. 명상에서만 깨어나는 초월적 깊은 자아와 일반적으로 단수 일인칭으로 불리는 피상적이며 외적 자아는 정반대이다. 이런 피상적인 "나"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개체성"이며 우리의 "경험적 자아"인 것이다. 세상에서 일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며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는 진정한 "나"가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우리 대부분이 죽기 전에는 찾지 못하는 신비스럽고도 알려지지 않은 "자기"의 흔적, 가면,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명상은 이런 "나"는 진정으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관찰과 반성의 범주를 넘는, 설명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나"에 대한 일깨움이다.

이것에 근거해서 머튼은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에 대해 비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자기의 정신적 근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유리된 존재, "생각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기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어떤 위안을 얻으려 애쓰는 소외된 존재의 선언이다. 이것은 자신을 한 개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신비를 직접 또는 즉각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스스로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은 반대로 실체를 주관적인 것으로서 경험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외적 자아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상징되는)"나의 것"이 아니고 실존적 신비 안에 있는 "나 자신"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명상은 연역(演繹)을 통해 실존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유롭고 인격적 실체가 실존적 심원(深原)에서 생도하며 하느님의 신비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직관적 인식을 인해 현실화한다.

머튼은 또한 명상을 황홀이나 무아지경, 갑자기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듣는 것도, 상상력도 아니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도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명상에 따라오는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명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들을 명상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명상기도의 완성은 신비 합일 즉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합일이다. 이것은 "앎과 사랑에 있어서 마음과 뜻의 완전한 동일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앎과 사랑을 초월하는 완전한 영적 교통 속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하나 됨(perfect coalescence)이다." 이런 순수하고 완전한 명상기도의 단계에서 안간은 무화(無化)된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행동의 원천과 행위자와 종착지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완전한 명상의 기도의 사람들 안에서 세상에 평화가 이룩된다.

 

 

토마스 머튼의 그리스도 이해

 

 

머튼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돋보기가 햇빛의 작은 점을 모아 마른 잎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빛과 불을 한데 모아 사람의 영혼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불을 붙이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 세상에서 사시고 죽으시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어 하늘에 계시는 당신의 아버지께 올라가신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Ut dum visibiliter Deum cognoscimus, per hunc in invisibilium amorem rapiamur.(즉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을 앎으로써 그분을 통해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에 이끌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비로운 모든 체험이 우리에게 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은 서로 갈라져 있지도 않고 서로 멀리 있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우정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하면 하느님이며 동시에 우리의 형제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수준에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즉 하느님도 그리스도 없이는 초성적 지식과 체험으로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은혜와 신앙으로 당신 자신을 형성하고, 동시에 그들을 당신 안으로 끌어들여 당신과 하나되게 한다.
이런 그리스도의 내재하시는 신성과의 우리 영혼의 초자연적 일치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되게하고, 또 우리를 당신의 신성에 참여하게 한다. 그곳에는 "새로운 존재"가 생기고 나는 "새 사람"이 된다. 이 새 사람은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새로운 의식의 필요성은 첫째,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 참된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성이다. 이것은 또한 지구상에서 인류라는 종(種)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들, 곧 전쟁, 인종 분쟁, 기아, 경제적·정치적 불평등 등의 문제에 접근할 때에 철저하게 진지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한다. 둘째, 평범한 생활에 나타나는 일상적인 자아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다. 천국의 생활만이 진실이며 지상의 생활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이상주의 철학은 이제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인간은 일상 생활 속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일고 인간적 문제들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궁극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셋째, 자아의 상상적, 감정적, 지성적, 정신적 국면들뿐 아니라 육체적 국면까지 포함한 자아의 모든 국면에서 전채적이고 통합된 체험을 해야 할 필요성이다. 현대인의 의식은 사람이나 사물보다는 기호를 선호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그 이유는 기호를 사용하면 의식이 사물들로 넘치지 않고 다분화되기 때문이다. 넷째, 이들 중대한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과다한 자의식과 완고함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과다한 자의식과 극대화된 자기 인식과 자아 확인에 대한 강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 모두, 특히 네 번째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소박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할 수만 있다면 그 가르침을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결부시키지 말고 '성령 안에서'이루어지는 새롭고 자유로운 창조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인간의 자기 중심적 욕망을 자극하고 이용함으로써 번영하는 현대 문명이 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간성은 그 영적인 상태로 완전히 복귀되었고 모든 인간의 신성화(divinization)는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의 완전한 융합으로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참된 아들들로 변형되는 것이 가능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란 머리와 지체로 구성된 신비체, 즉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인해 하나가 된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신비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하나의 위격 안에서 일치로서 존재론적으로 완전하여 파괴될 수 없는 일치이며 영원한 하느님이신 한 위격적 존재 안에서의 본질들의 일치이다. 그로 인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의 성서 이해

 

 

"성서는 어떤 책인가?" 이 물음은 그리스도인, 유대인, 나아가 회교도들이 성서에 대해 가져 온 매우 특이한 주장, 즉 성서는 다른 책과 다르고 인간의 운명은 바로 이 책에 달려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여기서는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는 근본 주장의 의미부터 밝혀 보고자 한다.

성서는 자신이 지닌 메시지가 단순히 누구를 가르친다거나, 혹은 먼 옛날의 일을 알려준다거나, 혹은 어떤 윤리적인 원칙들을 일깨워 준다거나, 혹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설명하는 데 만족할만한 가설을 제시한다거나,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그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제기한 근본 주장은 권위 때문에 성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그 자체의 힘에 의해 인식되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실제 경험을 통해서 인식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어떤 일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씀은 그 사람의 실존 전체를 바꾸어 버린다. 그래서 성서는 인간 존재의 근거이자 원천이고 동시에 인간 역사의 중심이며 인간의 운명을 이끄는 궁극적인 자유가 벌인 사적이면서 복합적인 인간 세계의 침입, 이 궤뚫음, 이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다.

성서는 우리가 누구인가 되묻는 책이다. 성서의 바닥에 깔려 있는 이상하리만치 기묘하게 완곡하면서도 집요한 주장들은 정체(正體)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는 여타 책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정체를 묻고 있다. 바르트(K. Barth)가 지적하고 있듯이, 성서에 대해 묻기 시작하는 사람은 동시에 성서가 그에게 묻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현대인들의 반응은 재미없어 하거나 무슨 뜻인지 몰라 당혹해 하고, 금방 잊어버리며, 심지어는 성서가 수면제 구실을 하기도 한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성서가 항상 흥미로운 책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최종적으로 성서 안에 몰입할 때, 나아가 성서에서 이야기되는 내용에 대해 좀더 파악하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성서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서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서의 진리에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변적인 물음을 갖고 성서에 다가갈 때, 도리어 성서는 우리에게 지독하게 실제적인 물음을 던지며 맞서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성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신앙이 없거나 또는 스스로 신앙이가정하고 있는 비합리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자들 보다 더 나은 위치에서 성서와 대화를 나누고 씨름하면서 성서 속으로 몰입해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그들은성서가'하느님의말씀'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반면 신자들은 성서에 대한 호의적으로 성서를 대하므로 인해서 무의식중에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서가 오로지 자기만의 책인 양, 또는 자신이 성서에 관한 모든 것을 알기나 한 것처럼 지나치게 만족하여 자신의 신분과 외적인 특권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이 시대의 보편적인 관점은 선조들의 광적(狂的)인 신심을 반성하도록 우리를 일깨워 준다.

성서에 빠져든다는 것은 아무런 이의없이 성서의 주장을 그냥 다 받아들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서는 정직하지 못한 복종보다 오히려 솔직한 항변을 더 높이 평가한다. 달리 말해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주장에 머리로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자신이 성서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가 주장하는 기본 진리 가운데 하나는 단순히 하느님은 항상 옳고 인간은 언제나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진실된 대화 속에서 서로 대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대화는 서로 상대방의 권리와 자유를 충분히 존중하는 두 인격 사이의 참된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성서는 인간들에게 여전히 타당하고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그런 꿈을 선포하고 있다. 이런 꿈에 대해서 머튼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방식에 동의한다. "성서는 수 천년 동안 정당성을 지녀 온 수많은 규범과 원칙을 담고 있는 특이한 책이다. 그 책은 인간들에게 여전히 타당하고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그런 끔(vision)을 선포하고 있다"(당신도 신처럼 될 수 있다 에서) 무슨 꿈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프롬에게 있어서 그것은 '철저한 인본주의(radical humanism)'로서, 인류의 하나 됨과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내적 조화와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프롬은 성서에서 자유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계속 강조한다. 그가 성서에서 발견한 철저한 인본주의는 "완전한 독립을 인간의 목표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허구와 환상을 꿰뚫고 들어가 현실을 완전히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한다. 실로 성서에서 가장 당황스럽고(이성적으로 볼 때) 터무니없다고 느껴지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께서 끝내는 인간을 죽음에서까지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서의 메시지가 무의미해지고, 현대인에게 냉담하게 무시당하고 있는 무신론적 유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신자들은 한탄한다. 이런 기묘한 현대의 문제점에 부딪히면, 우리는 성서가 모든 이의 책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서는 교회의 신자들만의 책이 아니다. 어쩌면 진지하게 성서에게 물음을 던지는 비신자가 오히려 신자가 놓쳐버린 그 무엇을 성서 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할 점이 있다. 우리는 성서의 메시지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 무거운 짐 진 자, 억눌린 자, 아무런 기본군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메시지임을 잠시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서는 원래 특별히 그 메시지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음송되고 들려지던 구전을 모아 놓은 것으로 생생한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에서 말해지거나 읽혀지고, 영창, 노래로 불려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가 회당 혹은 교회(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 라는 말은 '듣고 응답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한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메시지 그 자체가 공동체나 모임을 이루고 이를 굳건히 결속시키는 그 무엇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말씀'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의식을 행하는, 곧 함께 믿고 응답하며, 받아들이고, 확인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일이 필수적이다.

전승되어 온 모든 위대한 종교 고전(古典)들은 인간들에게 무엇인가에 이르는, 곧 인간의 내면적인 의미에 닿는 생명의 길로 가는 열쇠, 아마도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기를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혁신을 일으킬 열쇠를 제공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간과 역사에 영향을 끼쳐 왔다.

그러나 성서는 다른 모든 고전들과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알 때 우리는 다른 고전에 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무언가를 성서에서 얻으려고 기대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에 아주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자세로 각 본문의 저자들이 의도했던 실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또한 성서 각 권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는 문학 형식과 역사적 배경의 폭넓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통일성을 가진 책으로 읽어야 한다. 성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세속적인 책'이다. 인간의 삶, 노동, 동료들과의 관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놀이와 즐거움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서를 우리들의 편견적인 신앙이나, 신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왜곡되고 잘못된 환상에 빠지게 된다.

성서 본문을 통해 독자에게 도전하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동참, 자유의 결단과 투신,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판단을 요구하는 성서 속내용에서 나오는 신앙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는 결코 성서를 이해할 수가 없다.

불트만이 제시한 성서를 이해하는데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 번째는 성서 본문 자체의 의미를 미리 파악하는일(Vorverst ndnis)인데, 이것은 주로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에 관한 문제라 하 수 있다. 두 번째 차원에 가서야 성서는 실제로 파악된다. 성서 정경의 저자와 편집자가 본격적으로 성서 저술 및 편집에 착수하게 된 것도 바로 한층 깊은 두 번째 차원에서였다.(이 깊은 차원은 반드시 '신비적'이거나 모호하지 않고 오히려 분명하게 인격적이다).

이제는 성서를 진지하게 읽을 때 체험하는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성서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우리는 성서가 어떤 이론이나 이념보다는 사건들(events)을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서의 메시지는 크고 작은 각종 사건들(happening)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그 사건들의 의미 속에 암시되어 인류와 하느님의 백성, 우리 각자에게 전달된다. 둘째로 이 사건들은 모두 예상할 수 없고 자유로운 개입 또는 침투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들은 종종 폭발적이고, 놀라우며 극적이다. 셋째로 만일 인간이 단순히 자신의 경향성과 이념만을 따르기로 한다면, 비록 그것들이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잘못이나 부정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내면의 진실과 우리 삶의 실재에 충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우리 자신을 완전히 초월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진리에 충실함을 포함하고 또한 요구한다. 넷째로, 갈등하는 두 가지 자유의 대립과 그것들이 서로 다른 두 차원에서 벌이는 역사상의 상호 작용은 가만히 있는 것도, 일정한 방향 없이 제멋대로 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성서의 매우 중요한 관념인 계약 개념이 대두된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인하게 된다. 사건을 이끌어 가시는 자유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발전시키고 완성하게 된다. 다섯째로 이점에서 신약과 구약의 관계가 뚜렷해진다. 여섯째로 이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사건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안이 되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갈라놓게 되었다.

성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성서 안에서 서로 작용하고 있는 제각기 다른 여러 역동적인 요소들, 서로 다른 갖가지 관점과 여러 가지 경향, 자료 및 문학 형태를 모두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토마스 머튼의 인간 이해

 

 

머튼의 인간관은 인간의 무능력보다는 오히려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기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머튼에게 있어서, 인간은 죄인이기에 앞서 하느님의 형상이다. 머튼은 하느님의 형상을 깊은 자기(inmost self), 지성소(inmost sanctuary), 내적 자기(inner self), 참나(true I)와 같은 여러 이름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하느님의 형상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생명을 부여받은 모든 영혼 안에 있다. 즉 우리 영혼의 중심, 하느님의 형상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선천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합일"(natural union), "자연일치"(natural unity)라고 부른다. "유일하신 하느님과 우리의 자연합일은 육체적 생명의 원천으로서 우리 영혼 속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과의 즉각적, 실존적 합일이다."

그러면 참된 자기인 하느님의 형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 일치(natural unity)의 바탕이다. 하느님의 형상에서 나오 하느님, 나와 이웃은 둘이 아니고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과 자유이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끄는 동적인 성향이다. 사랑과 자유는 우리의 본성에 뿌리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의 형상인 우리 존재의 특질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실천은 무사(無私)한 사랑(disinterested love)의 실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그 둘은 하나이다. 사랑은 절대 가난과 무(無)의 바탕에서 샘솟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실제적인 힘이며, 초월적 영적인 힘이다.

그럼 죄는 무엇인가? 죄는 인간의 무질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형상의 부제이다. 그러한 죄는 우리 인격의 가장 깊은 내면을 강타하고, 우리의 참된 개성과 정체성과 행복이 의지하여 기대한 단 하나의 실재를, 즉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근본적인 지향을 파괴시켜 버린다. 그래서 머튼은 죄를 거짓 자기가 정체성을 부여하는 구조와 동일시하고 있다. 거짓 자기는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거부로부터 발생하는 거짓과 환각의 전체적인 증후군이다.

그러나 거짓 자아와 육체를 하나로 보아서는 안된다. 육체는 죄도 아니며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실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실체는 거룩한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옳은 말이다. 그리고 영혼은 선이고 육신은 악인 것처럼 영혼과 육신을 대립시켜 자신을 쪼갬으로써 자기의 자연적 일치를 속(俗)되게 하지 않도록 할 것을 경고한다. 그래서 거짓 자아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참된 자아를 찾지 않고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함을 말한다. 이런 노력이 영성 생활이다. 이 영성 생활이 머튼에게 있어서 바로 명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이다.

 

 

토마스 머튼의 선에 대한 이해

 

토마스 머튼은 그의 저서 {Zen and the Birds of appetite}(번역: 선과 맹금, 장은명 옮김, 성바오로출판)에서 그의 친구이자 영적 동역자인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禪)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그의 선에 대해 그의 논지를 펴 나가고 있다.

 

1). 선이란 무엇인가?

"이름을 듣는 것보다는 얼굴을 보는 것이 더 낫다"(선의 격언)
토마스 머튼은 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선을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한 "어떤 것도 그 구조의 기본적 요건을 고려하지 않고는 착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머튼은 선이 하나의 사회적, 종교적 복합체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볼 때, 또 선이 어떤 문화적 체계 내의 다른 요소들과 관련이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옳다고 본다. 구조주의적으로 선을 이해한다면 여타 어는 종교와도 선을 대비시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을 볼 때 선을 가톨릭의 구조와 대비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가톨릭의 구조, 즉 가톨릭의 성사, 전례, 영적 기도, 봉헌, 규칙, 신학, 성서, 가톨릭의 대성당들과 수도원, 성직과 위계 조직, 평의회와 회칙 등을 선의 구조적인 요소들과 대비시킬 수 있다. 그 속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

그것은 이 둘은 문화적, 종교적 특징을 공유한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이다. 하나는 아시아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사양의 유다-그리스도교이다. 하나는 인간에게 형이상학적 깨달음을 주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 구원을 주는 종교이다. 그러나 그 구조주의적 인류학의 체계 내에 짜 맞춰지는 것은 '종교'이지 '선'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머튼은 선을 하나의 종교적 체계나 구조물로 정의함은 선을 파괴함으로, 오히려 선을 완전히 오해함으로 말한다. 선은 체계적으로 '구성될' 수 없고, 따라서 파괴될 수도 없기 때문에, 파괴란 표현은 쓸 수 없는 것이다. 선이란 우리가 "저것이 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스즈키의 말을 빌리면 "대립의 세계, 지적인 구별에 따라 구성된 세계 너머에 있다…. 선은 절대적인 관점에 도달함을 목표로 하는, 구별이 없는 영적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양적, 플라톤적 방법으로 절대성과 비절대성을 '구별한다면' 이것도 함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스즈키는 이렇게 부언한다. "절대성은 구별이 존재하는 세계와 결코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성은 대립의 세계 안에 존재하며 그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D.T.스즈키, {불교의 본질}, 런던, 1946, p. 9)
선은 특정한 형태나 특정한 체계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의식(意識), 문화와 종교와 형태를 초월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선은 어떤 의미에서는 '공(空)'이다. 그러나 선은 종교적 체계이건 비종교적 체계이건 이런저런 체계를 통해 빛날 수 있다. 그렇다고 선을 선종(禪宗)으로 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선은 '종교체계', 신학적, 철학적 '주의'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을 잠시 돌려보면 그리스도교에서도 그들의 믿음의 '종교적' 국면 너머의 것을 보는 여러 종류의 특이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순수한 개신교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종교'라고 부르는 일에 이의를 제기했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회적, 문화적 구조물 속에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한 우리는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구조물들은 신앙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며 신앙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믿는다.

물론 문화적 구조물들이나 형식들은 존재하며 그것들 없이 살아가거나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선은 불교의 교리를 초월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교리도 초월한다. 예를 들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반야심경) 이 표현은 출애굽기의 불타는 가시덤불의 대목에서 나오는 "나는 곧 나다"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이 표현은 명제(命題)와 부정(否定)을 초월한다. "나는 곧 나다"라는 히브리말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자들이 각 시대의 정신에 따라 해석하여 추측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문화적, 구조적 종교(또는 비종교)의 한계를 뚫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영적인 탄생' 또는 지적인 각성에 따라 단순한 공(空)에 이르게 된다. 이 공(空) 안에서는 모든 것이 행위 함이 없는 행위이므로 모든 것이 자유이다.

 

다시 한번 선에 대한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은 직접적인 내적 체험이지 중개된 지식으로서의 특정 종교의 교리 체계가 아니다"

둘째,
"선은 모든 논리를 초월하거나 부정하는 비논리적, 초논리적 사고이다." 선이 인간의 이성 기능이나 논리학의 일정 한계 안에서의 유용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의 틀과 법칙이 우리의 본래 마음을 규정하고 재갈 채우고 분열시켜 버릴 때 선은 그 모든 논리를 미련 없이 버린다.

셋째,
" 선은 자기의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 진아(眞我), 절대무(絶對無)의 체득을 궁극 목적으로 한다." 선은 단순한 정신 수양이나 정신요법의 방편이 아니다. 선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린 가장 진지한 인간의 자기 찾기의 몸부림이다.

넷째,
"선을 수련하는 목적은 결국 '깨달음'에 이르려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 혹은 '깨우침'(enlightenment)은 지적(intellectual) 이해나 논리적 이해와 대조되는 직관적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깨달음'은 참된 자기와의 일치요 그것의 되찾음이요 회복이다. 기독교로 말하면 "하느님의 형상"이다.

다섯째,
" 선은 초월적 신비주의나 타계주의 및 현실적 삶의 도피가 아닌 삶의 현장 한복판에로의 귀환과 실천성을 강조한다."

 

2) 선과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의 차이점

그리스도교에서는 객관적 교리가 역사적으로 항상 우선되고 존중되어 왔다. 선에서는 역사적인 면이 아니라 중요성의 면에서 체험이 항상 우선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 선은 계시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리고 심지어는 성스러운 전통(적어도 경전에 의한 전통)에 대한 독자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생각조차도 버리고, 오직 존재의 자연스럽고 존재론적인 근거를 통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선물과 은총을 바탕으로 한 종교이고, 선은 쉽사리 '종교'로 분류할 수가 없다.(선은 사실 모든 종교적 구조에서 분리되어 불교가 아닌 종교나 무종교적 토양에서도 번성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체험이 가진 중요성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교적 체험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리스도교의 몸인 교회의 공동체적 삶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이 체험은 항상 특별한 양상을 지닌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이고, 심리적 차원을 초월하여 '교회와 함께 신학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체험을 기록할 때는 다른 그리스도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상징을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다.

반면 선은 쉽게 전달하려는 모든 유혹을 단호히 물리친다. 선의 가르침과 수행에서 볼 수 있는 역설과 폭력은, 제자의 '체험'으로부터 손쉬운 설명과 편안한 상징이라는 디딤돌을 치워 버리려는 의도에서 사용된다. 선에서 전달되는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낱말'이 아니다. 그 낱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선이 전달하는 것은 잠재적으로는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만 그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하나의 인식(認識)이다. 그러므로 선은 선교(宣敎)가 아니라 깨달음이며 계시가 아니라 의식이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성부로부터의 소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에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근거에 대한 인식이다. 바로 이것이 선의 목적으로 심오한 존재론적 인식을 일깨우는 것, 즉 일깨워진 사람의 존재의 근저에 있는 직관적 지혜(반야)를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서 언어라고 하는 도구는 우리의 논리적 선입견과 언어 양식에 들어맞는 방식으로만 사물을 보게 한다. 선은 이러한 선입견을 쓸어버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거짓된 '사실'을 파괴하여 우리로 하여금 '똑바로 볼 수 있게'해준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선은 "생각하지 말라. 보라!"고 말한다.

 

3) 불교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유사점

선이 보여주는 '사실'은 하나같이 넘어갈 수 없는 쓰러진 나무처럼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십자가를 예로 들을 수 있다. 부처의 '불난 집에 대한 설법'이,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불교 신자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킴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그의 삶의 의미와 타인과 그의 관계, 주위의 세상과 그의 관계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준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둘 다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의 생존을 소재로 삼는다는 점이 유사하다.

이 두 종교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고통을 설명하려는 사람이나 설명 자체가 도피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고통은 불가해함을 보여 준다. 고통은 우리가 그것이 바깥에 서서 통제할 수 있는 어떤 '문제'가 아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각각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통은 다름 아닌 우리의 자아와 경험적 생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에서 말하는 '큰 죽음'에 의해, 또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변화되기위해 모순과 혼란의 한가운데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머튼은 계속해서 스즈키의 말들을 인용하여 반야, 혹은 반야지에 대한 설명과 그리스도교의 지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반야(선의 형이상학적 직관지)는 순수 행위, 순수 체험이다…. 그것은 명확한 순수이성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직관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반야 직관의 경우에는 직관될 뚜렷한 대상이 없는 까닭이다…. 반야 직관에서 직관의 대상은 세밀한 추론 과정을 거쳐 가정된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이것'이나 '저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대상에 국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D.T. Suzyki, Studies in Zen, London, 1957, p. 87-89) 이런 이유로 스즈키는 반야 직관이 '우리가 종교적, 철학적 논문들에서 흔히 마주치는 그런 종류의 직관'과 다르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선은 다만 볼뿐이다. 무엇을 보는가? 하나의 절대적 객체가 아니라 절대적 봄을 본다.

이러한 설명이 그리스도교와 아주 먼 설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성서에 나타난 '직접적 체험'의 중요성을 명심해야 한다. '직접적 체험'은 '반야'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의 말씀'은 이론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죽어가는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강력하고 실존적인 체험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quot;(갈 2:19-20; 롬 8:5-17 참조) 참된 그리스도교에서는 십자가와 자기 비움의 이런 체험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듯 불교에서 '반야'는 '부처의 마음을 가짐'이라고 설명될 수 있으므로 불교적 체험과 그리스도교적 체험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본다.

 

4) 초월적 체험과 열반

4.1) 초월적 체험
'초월적 체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용어는 불만스럽긴 하지만 범위를 좁히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초월적 체험은 '지고한 체험'보다는 더 명확한 것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신비적인 자기 초월의 체험이며 동시에 객체라기보다는 주체로서의 '초월자' 또는 '절대자' 또는 '신'에 대한 체험이기도 하다. 이것은 절대적 존재 즉 '그분 자신'의 안에서, 또 '나 자신'의 안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이때 '나 자신'은 없어져서 '그분 안에서' 발견된다. 또한 이것은 초월적인 자아와 관련되어 있다. 초월적인 자아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설명하면 형이상학적으로는 하느님의 자아와 구별되지만 사랑과 자유에 따라 하느님의 자아와 완전히 동일시되므로 하나의 자아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월적 체험은 다음의 것들이 아니다.
초월적 체험은 자아 도취적 고요함 속에서 자연, 우주 또는 '순수 존재'안에 퇴행적으로 침잠함, 따뜻하고 퇴행적이고 어둡고 광막한 탈혼 상태 속에서 행복하게 정체성을 상실함은 아니다.

그것은 성애적(性愛的)인 절정의 체험이 공생적(共生的)이라기 보다는 확실히 인격적인 경우에도 그 체험과 정확히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것은 또한 윤리적 초월성, 자기를 내주는 행위에서 보이는 그 영웅적 관대함에 대한 체험 이상의 것이다. 물론 초월적 체험은 우리 자신을 넘어서 한 단계 고양된 윤리적 영웅주의와 결합하거나 그것 또한 넘어서 신비로운 자기 희생과 자기 증여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는 있다.

그것은 평범한 수준의 종교적 또는 영적 체험(이것도 확실한 체험이다)을 초월한다. 이런 영적 체험에서는 지성과 '마음'(수피즘, 정적주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통적이며 전문적인 용어)이 계시, 또는 존재, 또는 삶의 의미에 대한 통찰에 의해 밝아진다.

이 모든 체험들은 자아 인식적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을 여전히 다소 의식하는 수준에서, 그 주관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고 정화되는 수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초월적 체험에서는 주체 안에 근본적이며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 체험을 묘사하고 논의할 때 그것의 유일한 주체는 개별적 인간인 자아라고 당연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 경험적 자아는 그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나는 존재한다"고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데 이 자아가 바로 초월적 체험의 주체인 동시에 수혜자라고 우리는 추측한다.

참으로 초월적 체험은 전의식(前意識)이나 무의식으로의 퇴행이라기 보다는 초의식의 문제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의 전통적 용어인 '황홀경'은 심미적이거나 성애적인 체험의 고유의 영역인 '넋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자기 자신의 위로'들어 올려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 체험의 초점은 개별적 자아 안에서가 아니라 이 자아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또는 성령 안에서 발견한다. 바로 이 자아가 공(空)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적 전통에서 자아는 결코 단순히 순전한 경험적 자아가 아니고 신경증적이고 자아 도취적인 자아는 더욱더 아니며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그리스도와 동일해진 '인격'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모든 초월적 체험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참여함이다.

그러므로 초월적 체험은 모든 고등 종교들의 전통에서 초월적 깨달음의 길이 금욕적인 자기 비움과 '자기 무화(무(無化)'의 길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길은 자아 확인, 자아 실현 또는 '완전한 성취'의 길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특별하고 독특한 체험을 할 잠재능력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하거나 깨달음, 성취, 실현 등을 이룰 수 있는 주체라고 생각하는 개념에서 탈피하는 것이"중요하다.


4.2) 열반
불교에서는 형이상학적 통찰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이 신학을 대신하고 있으며 불교를 '종교'라기보다는 종교철학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여러 학파들에서는 많은 철학적 사변(思辨)이 있었지만 불교의 근본적 통찰은 사변을 초월하며 그것을 부인한다. 석가모니 자신은 사변적 질문에 대한 질문을 거부했으며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교의(敎義)는 교의가 아니라 세상에서의 존재 방식이다. 그의 종교는 일련의 신념과 확신, 또는 의식(儀式)과 성사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개방이었다. 그의 철학은 세계관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침묵이었다.

그렇지만 불교의 기본적인 통찰은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이다. 그 통찰은 존재와 지식의 근원을 꿰뚫으려는 노력이다. 그 꿰뚫음은 추상적인 원리와 공리의 추론이 아닌 윤리적, 종교적 의식(意識)을 정화하고 확장하여 주체와 객체가 하나인 초의식적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곧 열반이다.
여기서 불교적 깨달음의 성질을 논의하고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그와 유사한 것이 발견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신비주의와 신비적 체험의 수준에서 비교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신학적 문제점을 제기하고 불교의 입장에서는 자료제공의 신학적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둘째: 윤리적 수준에서 비교하는 방법이다. 불교의 대비(大悲)와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비교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신학적 미덕이므로 여기서도 문제가 첫째와 같이 발생한다.

셋째: 형이상학적 수준이 있다. 여기서는 만남이 가능하다. 그 가능성을 머튼은 샐리 도넬리의 논문과 가브리엘 마르셀의 논문에서 찾았음을 말하고 있다. 샐리 도넬리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전통이 상응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찰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상응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 이해와 삶의 실질적 행동의 면에서도 이 두 종교 사이에 상응점이 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도 있다. 샐리 도넬리의 연구 가치는 세계 내의 존재를 강조한 점이다.

세계내의 존재란 개념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에 공통되는 것이다. '다르마'(우주의 이법을 뜻하는 로고스와 유사하며 번역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단어)와 타타타(진여)라는 불교적 개념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하며 열반은 부재와 부정보다는 '순수한 존재'를 의미한다. 또한 삶의 의미는 존재에 대한 개방성 안에서, 그리고 의식의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존재함' 안에서 발견된다고 샐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열반에 대한 서구인의 왜곡된 생각을 머튼은 불교에 대한 부정적 국면만을 강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왜곡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십자가의 성 요한 안에서도 나타나는데 요한을 삶을 부정하고 세계를 혐오하는 금욕주의자로 말함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왜곡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이다. 이것은 자아를 절대적, 중심적 실체로 간주하려는 성향이며, 욕망이나 혐오를 대상으로서 자아와 관련시키려는 경향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실재에 대한 관점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의 탓으로 돌린다. 원죄란 쾌락이나 권력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욕망에 사물들이 언제라도 기여하게 만들기 위해 사물들의 본성을 왜곡하려고 노력하는 단호한 고집을 의미한다.

이렇듯 열반을 우리의 왜곡된 욕망 속에서 체험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음을 또한 비판하고 있다. 열반은 불교 신자들이 말하듯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지 다른 어떤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된 삶 자체는 고(苦)의 상태에 있으며 욕망의 모든 움직임은 지속적 기쁨보다는 고통이라는, 사랑보다는 증오라는, 창조보다는 파괴라는 궁극적 열매를 맺는 경향이 있다고 불교는 말한다. 이 불교적 형이상학의 순수성이 정당하게 평가될 때, 즉 절대적 실재가 또한 절대적 위격(그러나 결코 객체가 아닌)으로 인식될 때는 하느님의 개념에 대하여 불교 신자들과 진지한 논의를 할 근거들이 확립될 것이다.

 

 

윤동주님의 논문에서 발췌

출처 : 수호천사
글쓴이 : 천상의모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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