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사과 네 개

뚜르(Tours) 2011. 3. 11. 19:16

안동 농암종택(聾巖宗宅)에서 하루를 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차에 시동을 거는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왔습니다. 
이거 왜 이렇게 뻑뻑하지, 하면서도 조금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믿고 출발을 했습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차를 집사람과 번갈아 조심조심 몰면서 굽이진 길을 오르고 돌아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군자마을(광산 김씨 마을)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날씨는 몹시 더웠지만 옛 한옥의 멋과 선비들의 풍류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시대가 아니라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양반으로! 

   그러나 차는 갈수록 무겁고, 커브 길을 돌 때면 다른 차와 부딪히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큼 점점 더 핸들 회전이 어려워졌습니다. 
안동 시내에 들어가면서 자동차 정비업소를 열심히 찾았지만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문을 연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 지도를 보면서 시내 중심가로 들어섰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할 수 없이 한우갈비골목의 주차장을 찾아 들어가 차를 세워놓고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 받은 뒤, 주차장 직원에게 정비업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음식점에서 고기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 직원으로부터 문 연 정비업소를 찾았다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여러 군데 전화를 해 보았다는 그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지리를 모르는데 혼자 어떻게 찾아가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동행을 해주겠다고 나선 그가 나를 옆에 태우고 직접 운전을 했습니다. 
그 정비업소는 우리가 아침에 지나온 길에 있었고, 제법 규모도 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곳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싶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주차장 직원은 “수리하는 데 돈이 많이 들 것 같으면 여기서는 간단히 정비만 하고 서울 가서 제대로 고쳐라”, “정비업소가 손님을 속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니던 곳에 가는 게 좋다”고 코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정비업소에 도착해서는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차의 상태를 설명하고 정비 과정을 꼼꼼하게 지켜보아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엔진 오일이 다 새어 나간 상태였고, 전에 어느 정비업소에서 그랬는지 억지로 끼워 넣은 호스가 찢어져 있었습니다. 

   30여분 만에 정비를 마친 뒤 음식점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참 좋고 안심이 됐습니다. 
차를 고치지 못했다면 고속도로에 올랐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그 주차장 직원은 길을 일부러 우회해서 나를 딱 음식점 앞에 내려주더니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식당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그를 칭찬하는 이야기를 한참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주차장에 가서 고마운 그 직원에게 저녁 먹는 데 보태라며 돈을 좀 주었습니다. 한사코 사양하던 그는 마지못한 듯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서려 할 때 그와 함께 일하는 여직원이 차를 세우더니 사과가 든 비닐봉지를 답례로 나에게 주었습니다. 
기분 좋게 웃으며 받았습니다. 
푸른 사과 네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고속도로에 가기 위해 안동 시내를 지나가는데 비가 그야말로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차를 고치지 못했다면 이 비에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 
그럴수록 주차장 직원이 고마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비는 거짓말처럼 금방 그쳤습니다. 서울까지 무사히 잘 왔습니다. 


   나의 작은 배려와 친절이 다른 사람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일이 많습니다. 
한 번도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돕고 사는 게 인간사회입니다. 
최근에 만난 신문사 퇴직선배는 10여년 전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내가 신속하게 도와주어 병원에 입원했던 일을 환기시키며 그때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나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저 “아, 예. 그야 뭐…” 이러고 말았지만, 남을 도와준 사람은 그 일을 곧 잊어 버려도 도움을 받은 사람은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 날 받은 사과는 유난히 맛이 좋았습니다. 
1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다 먹지 않았습니다. 



                     임철순 / 한국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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