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누가 나에게 진정한 벗인가?

뚜르(Tours) 2011. 4. 4. 09:41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지 5년쯤 된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습니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제자는 남자 나이 서른이 넘으니 세상 사는 게 자꾸 겁이 난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가장 두렵냐고 물었더니 엉뚱하게도 그는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정한 벗이 없어 걱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한 벗이 없다는 그의 고백에서 깊은 결핍감을 느꼈습니다. 
어째서 아는 사람은 많은데 진정한 벗은 없다고 하는 걸까요.

옛날과 달리 요즘은 사람보다 조건을 보고 교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력, 직장, 직위, 학연, 지연 같은 것을 따지고 그런 것에서 교제의 동기를 찾기도 합니다. 
그렇게 교제를 하게 되니 진심을 열어놓고 인생을 논할 바탕은 사라지고 드라마, 주식, 영화, 유행 패션, 자가용, 아파트 같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뿐입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며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고 군자답게 살 수 있다고 한 공자의 가르침이 무색한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진정한 벗의 조건이 오직 사람에게 국한돼 있었습니다. 
진심과 진실로써 교류하고 싶은 대상을 만나면 나이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단원 김홍도는 스승 강세황보다 서른세 살이나 어렸지만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습니다. 
“단원과 관청에서 아침저녁으로 같이 거처하고 나중에는 예술계에서 나이를 잊고 지내는 벗이 되었다”고 스승 강세황은 술회했습니다.
 

다산 정약용과 다성 초의선사의 나이 차를 뛰어넘는 학문적 친분도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오랜 교우관계도 숱한 덕담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58세의 퇴계 이황이 32세의 고봉 기대승을 만난 뒤부터 시작된 학문적 교류는 사단칠정 논쟁을 통해 조선 최고의 ‘사상 로맨스’로 깊어졌고 성리학의 수준을 절정으로 이끌어 올렸습니다. 

세상을 넉넉하게 살아가려면 좋은 말벗과 글벗과 길벗을 만나야 합니다. 
벗을 사귐에 있어 진정한 기준이 되는 것은 진실과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성품입니다. 
재산은 어느 정도인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지위와 직책은 무엇인가, 어느 동네 몇 평 아파트에 사는가 따위는 진정한 벗의 조건과 하등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퇴계 이황의 ‘자성록’에는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고 싶은 글귀가 남아 있습니다. 
“선배면 어떠하고 후배면 어떠하며, 스승이면 어떠하고 제자면 어떠하며, 저것이면 어떠하고 이것이면 어떠하며, 취하면 어떠하고 버리면 어떠하겠습니까? 한결같이 도리에 합당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을 취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결같고 도리에 합당하고 바꿀 수 없는 것, 그것이 진정한 벗의 바탕입니다.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합니다. 
그렇게 희생적일 수 있는 친구, 주위를 둘러보며 진정한 벗을 생각해야 할 시간입니다. 
누가 나에게 진정한 벗인가, 나는 누구에게 진정한 벗인가.

                        박상우 /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