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하숙집 아주머니 최필금

뚜르(Tours) 2011. 8. 7. 08:16

최필금(54)씨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상처투성이다. 
11남매 중 셋째인 그는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탓에 늘 헐벗고 굶주렸다. 
경남 밀양에서 초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학교에 가려고 보면 신고 나갈 신발이 없을 정도였고, 학교 마치고 오면 동생들을 업어 키우는 게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운동장에 꿇어앉아 있기 일쑤였고 제대로 먹지 못해 창자가 꼬여 큰일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 같은 유년시절을 보낸 그가 3일 고려대학교 발전기금으로 1억 원을 기부했다. 
25년간 고려대 인근에서 하숙집을 운영해 온 그가 5년 전부터 꼬박꼬박 모은 돈이다. 
그는 “가정형편 탓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77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야간 낚시터를 돌며 라면과 밥을 팔고 재래시장에서 국수를 삶아 팔기도 했다. 
당시를 떠올리던 그는 “아들(유성재ㆍ33)이 어렸을 때 ‘떡볶이 장사하면 실컷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는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방 7칸짜리 건물 세를 얻어 하숙생 10명으로 시작한 게 1985년.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살펴 주고 싶기도 했지만 밥은 굶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세를 얻은 건물이 팔려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는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싶어 빚을 내 건물을 올렸다. 
이자를 갚느라 하숙에 남의 집 아기를 돌보는 일까지 했다. 
하숙생을 치르느라 아들 성재씨는 6년여간 주방에서 지냈다. 
“늘 미안했는데 군에 있을 때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여성으로 존경한다’는 편지를 받고 어찌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가 돌본 하숙생이 1,000여 명. 사법시험 합격자만 200~300명 될 거란 게 그의 설명이다. 
 


다들 아들 딸 같다는 그에게도 특히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을 터. 
“경영대에 다닌 친구였는데 학생운동을 하다 경찰서에 잡혀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속 많이 끓였죠. 
나중에 공인회계사시험(CPA)에 합격해 첫 월급을 탔다며 과일바구니를 들고 왔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그가 아들 딸이라 부르는 하숙생들의 칭찬도 그칠 줄 모른다.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는 직접 깨워도 주시고 신경 많이 써 주세요.”(박준희ㆍ경영 3년) 
“밤에 간식도 챙겨주시고 집에서 지내는 것처럼 편해요.”(박영채ㆍ한국사학 4년) 
“낚시터 아줌마ㆍ국수 아줌마ㆍ하숙집 아줌마, OO아줌마란 이름으로만 20여 년 간 살았는데 이제야 이름을 찾은 느낌”이라는 그는 “힘이 닿는 한 하숙집을 계속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는 이날 이기수 총장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운초우선 교육관(사범대 교육관) 308호를 ‘유정 최필금 강의실’로 명명, 현판식을 가졌다. 

                                           (한국일보 2010년 11월 3일자)  


저는 생도시절 전공이 전자공학이었는데, 임관 후 항해과 장교의 길도 의미가 있지만, 후배생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길을 걷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라 판단하여 교수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를 계속한다면 전자공학보다는 역사를 하고 싶었는데 10년 만에 역사교수를 선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세 학교가 모두 장점이 있었지만 저는 왠지 고려대의 분위기에 이끌려 고려대를 선택하였습니다. 
 


학교 후문이 있는 종암동에 하숙집을 구하려고 하루종일 헤맸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목이 말라 가게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가게에 들렀습니다. 
저는 아주머니에게 “집은 허름해도 좋은데 주인이 좋은 하숙집을 소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전화번호 하나는 건네주었는데, 바로 그 집이 위의 신문 기사에 나온 주인공아주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이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저에게 처음 건넨 말씀은 “저는 돈을 벌 욕심은 없습니다. 
아이가 둘 있는데 이 아이들이 고대생들 틈에서 자라다보면 비슷하게는 되겠지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주머니의 마음씀이 마음에 들어서 이 집을 하숙집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때는 하숙집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초창기였기 때문에 아주머니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남편은 당시 사우디에 일하러 가셨고 친정어머니께서 일을 도와주셨습니다. 
아들이 7살, 딸이 4살이었는데 저를 삼촌으로 불렀습니다. 
 


아주머니의 마음씨는 식사준비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아침 반찬이 12가지 이상 나왔으니까요. 
그리고 시험기간에는 삼계탕을 내어 놓으시며 “삼촌, 시험기간에는 무엇보다 몸 건강이 제일이야!”라고 하시며 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룸메이트는 법대생이었는데 처음, 그리고 두 번째 룸메이트가 모두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현재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음 해에 아주머니는 아래에 있는 빌라를 사서 이사하시면서 하숙생들을 모두 데리고 가셨는데, 반찬 소문이 나서 그런지 하숙은 다른 집에서 하면서 식사만 우리와 같이 하는 학생들도 숫자가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학생들 중에서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그런지 모두 동생 같아서 학생들의 생일을 기억했다가 밤 11시가 되어서 도서관에서 돌아오면 케?과 과일을 제가 준비해서 조촐한 생일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33회생일 때는 학생들과 함께 장미꽃 33송이를 선물하여 가슴 뭉클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11월 4일, SBS 8시 뉴스에서 하숙집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소개한 시간에는 33회 생일 때 제가 아주머니에게 장미꽃을 선물한 사진이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가끔씩 연락을 하며 서울에 출장 갈 기회가 있으면 하숙집에 들르곤 하였습니다. 
지금은 50개의 원룸이 있는 빌딩 두 개, 식당, 주택, 아파트를 가진 넉넉한 살림을 하고 계시지만, 지금도 제가 하숙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가 참 인간적인 면도 많았고 기억에 남는다는 말씀을 하곤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두 아이들은 이제 시집장가 가서 두 자녀씩을 둔 의엿한 부모가 되었습니다. 
 


2년 동안의 하숙생활을 통해서 저는 참으로 소중한 많은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각박하다고들 하지만 우리 주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는 아름다운 분들도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오늘은 여러분 바로 곁에 있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격려의 말 한 마디보다는 그냥 따스한 미소를 보내 여러분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여러분의 마음을 훈훈하게 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조덕현 /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겸 군사전략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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