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교육현장을 돌팔매질한다고 왕따가 사라질까?

뚜르(Tours) 2012. 1. 17. 11:04

언론이 초중고의 ‘왕따’와 ‘집단 괴롭힘’에 대해 연일 보도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대구에서 한 평범한 중학생이 역시 평범해보이는 급우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것이 계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보도가 우리 교육환경을 개선시키는데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로 보도하는 듯해서 울가망합니다.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첫째, 과연 옛날에는 학교가 인격교육의 장이었는데 요즘 와서 갑자기 ‘폭력 문화의 싸개통’으로 바뀐 걸까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한 학교만의 이야기였을까요?

 

둘째, 우리 사회의 다른 곳과 달리 학교만 폭력적인가요?
온-오프라인에서 자기 생각과 다르면 떼거지로 저주를 퍼붓는 문화가 ‘멋진 문화’로 자라고 있는데, 학교만 평화로운 마당이 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물들이는 게임, 만화, 드라마, 영화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셋째,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정말 이기는 것보다 더불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나요?
언제부터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고, 손해 보는 삶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을까요?

넷째,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공부를 시킬 준비가 돼 있습니까?
청소년이 책을 읽고 사색에 빠지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까요?
중고교에서 체육, 음악, 예술 등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요?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가 있을까요?

 

다섯째, 지금 언론의 보도가 왕따당하는 학생의 자살을 유발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사회 전체가 폭력성의 쳇바퀴 속에서 돌고 있어 모두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교사들과 몇몇 학생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언론의 보도방식 또한 선정적이고 폭력적이지 않은가요?

어쩌면 답은 쉬울지 몰라도,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려운 질문일 겁니다.

동물심리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짚은 대로 파괴적 공격성은 인간의 악한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정확히 파악한 대로 악행은 대부분 악한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대구의 중학생들이 그랬듯 너무나 평범합니다.
시인 김수영이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 읊은 대로 ‘우리들의 적은 커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고/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폭력 속에 있습니다.
가끔씩 악에 휩쓸리지 않는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가 닥치지만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치기가 영웅시되고
모범적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야유를 받는 분위기에서
’멋진 폭력’에 평화적으로 맞서며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이성적이고 성숙하게 변모하지 않는다면, 학교폭력은 모양을 바뀌면서 계속 일어난다고 봅니다.
풍선처럼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으로 삐져나올 겁니다.
그렇다고 지금 현재의 학교폭력을 방치해서도 안 되는 이 딜레마!
여러분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성주의 건강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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